Ⅳ. 삼조선 (BCE 13세기∼BCE 6세기)
1. 삼조선 성립
(1) 삼조선의 성립 과정
기후변화로 辰韓 지역 쇠퇴하여 삼한조선 해체됨
辰韓 지역은 따뜻한 날씨가 천년 지속되다 BCE 1,500년부터 한랭건조추세가 나타난다. 중심국인 辰韓의 농업생산성이 떨어지고 인구가 감소하면 이는 당연히 정치적 격변을 야기하였을 것이다. BCE 1,370년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관통했는데 이러한 기상현상은 소빙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군세기』는 20세 단군이 BCE 1,338년 천하가 편안하지 못할 때 붕어했고 BCE 1,285년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22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태백일사』는 BCE 1,323년 고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손자인 색불루가 삼한을 무찌르고 즉위했다고 하며, 색불루는 서우여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해 번한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규원사화』는 34세 단군(BCE 1,342년∼BCE 1,321년)이 도읍을 낙랑홀로 옮기고 진번후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하며, 진번후가 용가(龍加)가 되어 다물을 37세 단군(BCE 1,293년∼BCE 1,284년)으로 세웠고, 39세 단군(BCE 1,266년∼BCE 1,237년) 시 숙신후(속진후)가 용가가 되었다 한다. 『단군세기』에서는 단군이 서우여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색불루가 무력으로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권력투쟁에서 최후에 승리한 색불루로 지칭된 이가 숙신후이고, 먼저 용가가 되어 단군을 조종하고 있었던 진번후가 서우여로 추측된다.
단군조선 = 삼한조선은 천 년 정도 존속
그런데 『규원사화』는 조선이 47세 단군까지 1,195년간 존속된 후 망했다고 기술하고, 『제왕운기』는 단군의 재위기간을 1,028년으로, 『제왕운기』가 인용하는 『본기』는 1,038년으로, 『응제시주』와 『동국통감』은 1,048년으로 단군의 수명이나 재위기간을 기술한다. 『제왕운기』는 조선이 망한 후 164년간 나라가 없었다고 기술하는데, 이 164년을 『제왕운기』 등이 기술하는 조선의 존속기간 천여년과 더하면 『규원사화』의 존속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164년은 BCE 1,122년 성립한다는 기자조선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므로, 辰韓은 BCE 1,300년경, 숙신 세력이 단군으로 즉위하는 BCE 1,285년 이전 실질적으로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辰韓이 삼한조선의 천자국이므로 辰韓이 망하였다는 것은 삼한조선이 해체되었음을 의미한다. 『단군세기』는 단군의 재위기간을 늘려 47명이 대부여까지 2,094년 다스렸다고 하여 정통성의 단절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 의하면 제위를 다툰 색불루와 서우여 모두 엽호(獵戶)를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규원사화』도 숙신의 땅은 매우 추워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칼을 차고 활을 메고 어울려 일하고 놀며 사냥을 한다 하고 숙신후가 최후의 용가가 되었다고 하므로, 기후변화로 농경민이 남쪽으로 이주하고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는 세력이 辰韓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숙신국은 자신들이 조선의 천자국이 되었다 생각하여 국호나 왕칭호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국호를 조선으로 유지하였지만 표기의 차이로 숙신(속진=주신=조선)이라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 유학적 사고가 확산되면서 숙신은 오랑캐라 생각하여 숙신이 천자국이었던 시대를 지우고 기자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는 속진후가 달루홀로 옮겼다 하므로 辰韓의 수도는 이전된 것으로 추측된다.
辰韓人의 남하와 번조선의 성립
기후변화로 辰韓의 농경집단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단군세기』는 BCE 1,266년 藍국이 강성해져 고죽국과 함께 도적을 쫓아내고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다고 한다. 『규원사화』도 藍후가 강성해지더니 후에 제후들을 거느리고 고죽국을 물리치고 남으로 도읍을 옮겨 살고 있었는데 은 부근이었다고 한다. 이 기사들은 辰韓의 서남쪽 번국인 藍국이 기후변화로 가장 먼저 남하하여 은과 가까운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藍국이 옮긴 곳은 番韓이 있던 자리로 산동성이다. 『사기정의』는 「하본기」 “海岱維青州(바다와 태산 사이가 청주이다)”에 대한 주석에서 우순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규원사화』는 우순이 藍국에 인접한 땅으로 영주를 삼은 지 수십년 되었는데 부루가 제가로 하여금 그 땅을 회복하게 하였다고 한다. 물론 우순이 영주를 설치할 때는 청구국이 있었겠지만, 藍국이 청구국이 있었던 곳으로 옮겼으므로 『규원사화』는 영주를 藍국에 인접한 땅이라 하였을 것이다.
藍국은 산동성을 근거지로 하여, BCE 1,266년경에는 여파달을 빈 기로 보내 여(黎)를 세우고, BCE 1,196년경에는 회대지간으로 진출하여 서국과 회국을 세우고, 포고(박고)씨를 엄에, 영고씨를 서에, 방고씨를 회에 봉하였으며, BCE 1,170년경에는 회남까지 진출하여 선모국을 세웠다. 이로써 藍국은 番韓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여 辰朝鮮에서 독립적인 番朝鮮을 세웠다.
은나라는 辰韓인의 남하로 멸망
『후한서』 「동이열전」도 藍국의 진출에 대해 “仲丁 때에 이르러 藍夷가 침입하였다.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년간 계속하였다. 武乙에 이르러 (殷이) 衰弱해지자, 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淮水와 岱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정 때가 BCE 1,500년경 이후로 추정되므로 기후변화 시기와 일치하며 3백여 년간 공방이 있었다고 하며 결국은 회대지역까지 진출했다 하므로 『규원사화』의 기술과 일치한다. 이로부터 은상은 폭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辰韓으로부터 내려오는 농업집단에게 농경지를 뺏기고,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하다 국력이 쇠약해져 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
辰韓 지역 재건되며 삼조선 체제 성립
BCE 15세기 하가점하층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농경민이 이주했음을 의미한다. BCE 12∼6세기에 하가점상층문화시기에는 수렵 농경 목축의 복합경제가 나타나는데 이는 辰韓 지역에서도 한랭건조한 기후에 적응한 농업기술이 개발되어 생산성은 온난한 기후 때보다는 낮겠지만 농경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또 후술하듯 상업을 발달시켜 기후변화에도 불구하고 辰韓은 상당한 인구와 국력을 가진 국가로 재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한조선은 辰韓이 지배하는 통일국가였으나, 삼조선 체제는 각 조선이 병립하는 시대였다. 삼조선은 BCE 1,285년부터, 번조선이 중국 동부에서 밀려나는 BCE 6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번조선에서 밀려난 농경세력은 BCE 425년 진조선을 멸하고 (대)부여를 건국하였다.
(2) 삼조선의 관계
기후변화가 시작되면서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은과 싸우면서 농경지를 확보하는 전쟁의 중심국인 남국이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므로 辰朝鮮의 중심국으로서의 지위는 형식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 성왕 때 은나라 유민들과 淮(영고씨)와 徐(방고씨)가 주나라에 대항하였으나 주공이 이를 진압하였고, 엄(박고씨)도 성왕 때 져서 番朝鮮이 약해졌다. 번조선과 은의 치열한 전쟁은 둘 모두의 쇠퇴를 가져와 주나라가 어부지리를 한 격이 되었다. 반면 辰朝鮮은 농경이 일부 재개되고 상업이 발달하였다. 진조선이 어는 정도 국력을 회복한 후에는 실질적으로도 중심국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말조선은 『관자』에서 發朝鮮으로 나오는데, 馬韓이 말한 말칸으로 발음되고 馬朝鮮이 말조선으로 발음되어 한자 표기 시 發朝鮮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관자』에서 발조선은 문피(文皮)의 생산국으로 언급되는데, 문피의 주산지는 백두산 일대로 말조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기』 「오제본기」 제순조에 발식신(발조선)이 나오는데, 이는 많은 오랑캐를 열거하기 위해 발과 식신을 다른 것으로 보아 후세에 사용된 발조선이라는 국호를 차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조선은 당시 사치품이었던 문피를 말조선이 생산하고 신조선과 북부 번조선이 유통하여 판매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러한 공통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서로 독립적인 나라이지만, 신조선을 중심국으로 삼아 연대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BCE 1285년에 삼한이 삼조선이 된다는 『태백일사』의 기록은 삼한이 하나의 조선으로 辰韓 1인의 지배를 받았다가, 각 韓(王)이 독자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된다는 의미이다. 신조선의 경우 강역이 넓고 비왕을 두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신한 영역 내에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었다.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는 이를 간과하고, 辰朝鮮의 좌·우현왕과 말조선·번조선을 같은 것으로 기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2. 기자조선의 허위성
『제왕운기』가 말하는 164년의 공백기는 기자조선을 주장하기 위한 날조
『제왕운기』는 전조선이 망하고 164년 후에 기자조선이 성립하는데, 위만에 망한 준왕의 조선이 기자조선이며, 기자조선 후, 위만조선-삼한 소국들-삼국의 순으로 이어진다고 기술한다. 『제왕운기』가 말하는 164년과 『규원사화』가 타 사서보다 늘린 전조선의 존속기간은 기자조선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간설정이다. 『규원사화』가 참고한 사서가 기자조선을 기술하고 있어 북애자는 전조선만 기술하고 기자조선을 제외하였을 것이다. 즉 이 164년은 『단군세기』가 반란을 일으킨 고등의 혈통이 단군이 된다고 기술하는 BCE 1285년, 『태백일사』가 삼한이 삼조선이 된다고 하는 BCE 1285년과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BCE 1122년의 차이를 메꾸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제왕운기』 저술 당시 BCE 1285년 이전에 삼한조선이 망했다고 기술한 사서가 있었음을 의미하며, 『태백일사』와 『단군세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한다. BCE 1285년 삼조선이 시작함에도 이승휴는 기자조선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164년의 공백기를 두었다. 공백기가 있다면 BCE 1285년 이전에 있어야 한다. 기후변화로 辰韓이 붕괴되고 혼란기를 거쳐 BCE 1285년 辰조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번조선의 하남성으로 온 망명자일 뿐이다
기자의 묘는 상구에 있는데 준왕의 조선은 예맥조선으로 당산 지역에 있었던 소국이다. 기자가 왕이었다면 묘의 위치가 이해될 수 없다. 『삼국유사』에 실린 조선의 역사설화는 단군이 산신이 되기 전 나이를 1908년이라 하는데, 1908년은 『단군세기』에 의하면 조선이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는 BCE 425년까지의 기간이다. 기자조선이 준왕의 조선이라면 1908년은 불가능하다. 구전되어 온 역사설화에 나타나는 1908년은 거짓이 되기 어렵다. 『사기』 「송미자세가」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는 아니었다라 하는데 이는 모순되는 말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의미밖에 없다. 봉하면 당연히 신하인데 신하가 아니라 하므로 봉했다는 말은 기자에 차인 무왕의 자존심을 살리는 기술에 불과하다. 이 말로부터 기자묘가 있는 하남성 상구가 주와 무관한 조선의 영토라는 것과, 주나라 초기에는 번조선이 하남성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는 번조선에 망명하였을 뿐이고, 기자나 그 후손이 번조선의 왕이나 제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기자조선은 중국인들과 사대주의자들의 사기
『漢書』 「지리지」는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전잠직작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이미 기술하였듯이 환국과 신시국에서의 과잉인구의 이주로 중국에서 문명이 시작하여 중국이 비로소 농사와 비단을 알게 되었으므로, 기자가 이를 조선에 전해주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濊조는 “일찍이 箕子가 朝鮮에 가서 八條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일컬었다”라고 하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에 배송지가 인용한 『위략』은 주나라가 약해졌을 때 연나라의 동쪽에 있는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의 나라와 연나라가 싸우려다 말았다가, 나중에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였고, 전한 때 위만이 조선왕 준을 물리쳤다고 한다. 진개가 침략한 조선은 진번조선이고, 준왕의 조선은 예맥조선이므로 중국 사서는 조선이 나오면 근거없이 기자를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도 진개가 침략한 진번조선은 「흉노열전」에서 동호라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열전」은 위만이 찬탈한 예맥조선을 기술하고 있어 두 조선을 구별하고 있다. 『구당서』에 고구려가 기자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거짓까지 추가하는 다른 사서의 태도로 볼 때 고구려가 기자신을 섬겼다면 이전의 중국 왕조 역사책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漢代 이후 편찬된 사서에서 기자조선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과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역사적 연고권을 내세우는 허구에 불과하다.
준왕은 기자의 후손이 아니다
『단군세기』에는 읍차였던 기후(箕詡)가 BCE 323년 스스로 번조선 왕이 되고 허락을 구했다 기술되어 있다. 기후가 기자의 후손이라 한다면 129년간 기자조선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기자로부터 800년이 지난 후여서 기후가 기자의 후손인지 여부도 불확실하고, 당산 지역의 대부여 제후국에 불과하므로 ‘기자가 세운 후조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동사」, 「기씨보」, 「기자지」 등에 전하는 현존 기후의 계보는 기후가 기자로부터 35명의 조상을 추존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왕조 개창 시 조상을 추존하는 관행이 황제국의 경우 5명, 제후국의 경우 4명에 그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부여의 우현왕에 불과한 기후가 무려 35명의 조상을 추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후 계보는 후세 사람들이 대부여의 우현왕이 된 기후를 기자와 연결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기후의 후손인 기준은 BCE 194년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가므로 기후의 나라는 예맥조선이다. 준왕은 위만을 예맥조선의 서쪽에 두는데, 이곳이 패수의 동쪽인 왕검성이므로 예맥조선의 위치는 현재의 당산 일대이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는 기후를 번조선의 왕으로 보지만, 기후는 대부여(진조선) 내의 제후인 우현왕(番韓)에 불과하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는 대부여 내의 우현왕과, 중국 동부의 番朝鮮을 혼동하고 있다.
청동 예기는 기자조선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발해 북안과 대릉하유역에서 발견되는 청동예기가 상말 주초의 유이민 즉 기자집단의 것이라는 주장은 성터와 같은 이주민의 거주를 증명하는 유적이 없고 대형의 용기만 있어 이주민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중국인들이 청동예기의 㠱를 箕자로 잘못 판독하였음이 밝혀졌고, 㠱가 적힌 예기는 산동성에서도 여러 개 발견되어 청동 예기를 근거로 한 기자조선의 주장은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이들 청동예기에는 㠱 이외에도 庚, 亶伯, 鹿, 戊, 伯矩, 倗万, 史, 叔尹, 亞, 魚, 尹, 舟, 車 등 국가나 씨족의 여러 족휘(族徽)가 새겨져 있고, 예기가 좁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된 사실은 이 예기들을 교역, 조공, 약탈 등으로 취득할 수 있었던 강력한 토착세력의 존재를 추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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