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단군조선 (삼한시대) (BCE 24세기∼BCE 13세기)
우리 역사의 삼한시대는 (고)조선 전기인 단군조선시대이다. 이 이외에 삼한시대는 없다. 강단이 주장하는 BCE 2세기에서 CE 3세기까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는 삼한은 소설상의 나라이다. 일부 재야가 주장하는 BCE 2세기 이후의, 한반도 중·남부 후삼한도 소설이다. 진한과 번한은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적이 없다. 삼한시대 시 진한은 요서의 내몽골과 몽골 지역이었으며, 번한은 중국 동부였고, 모한은 요동과 한반도였다. BCE 2세기 이후의 삼한은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에 있었으므로 한반도 중·남부와는 무관하며, 사실상 마한 한 나라였으므로 삼한이라 할 수도 없었다. 강단·재야 유사사학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소설을 작성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날조가 한반도 중·남부에 삼한이 있었다는 날조이다.
1. 단군조선(삼한조선)의 건국
소위 전삼한이 고조선이다
홍산문화 지역에 남았던 신시국 세력은 BCE 3,000년부터 BCE 2,500년까지의 한랭건조한 기후를 견뎌내야 했기 때문에 생존의 많은 부분을 수렵과 목축에 의존하였다. 인구는 적고 넓은 지역에 분산되므로 정치체는 비왕(裨王) 즉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게 된다. 조선을 여는 단군은 24년간 웅씨왕의 비왕이었다. 홍산문화 지역이 BCE 2,500년부터 천년간 기후가 다시 따뜻해져 농경과 가축 사육이 증가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정치체의 힘이 커졌을 것이다. 이들은 커진 힘을 기반으로 남쪽으로 진출하여 요동과 한반도의 환국세력, 중국 동부의 청구국 세력을 전쟁으로 정복하였다. 이는 단군이 전사한 웅씨왕의 뒤를 이어 구환을 통일하였다는 기록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구빈마을 전설이 이 시기의 정복을 증명한다. 단군은 전통에 따라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신한(辰韓)은 단군이 직접 다스리고, 모한(慕韓)은 왼쪽 변방이며 번한(番韓)은 남쪽 변방이다. 신한의 辰은 임금, 천자(天子)의 뜻으로 쓰였다. 모한의 慕는 ‘뒤를 따르다’의 의미로 쓰였다. 번한의 番은 울타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조선(아사달)은 수도의 명칭인데 국호로서 사용되기도 하고, 辰韓은 천자왕(대왕)의 뜻인데 천자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며, 慕韓과 番韓은 비왕(좌현왕, 우현왕)의 뜻인데 비왕이 관할하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삼한은 모두 70국이다. 모한은 요동과 한반도로 환국의 영역이고, 번한은 치우집단이 확보한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부 지역이고, 신한은 원 신시국 영역이다. 삼한 즉 조선의 강역을 이렇게 보아야 삼한이 방사천리이고 남쪽이 왜와 접경한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와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의 기술과 일치한게 된다.
[삼한조선의 강역]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의 증거
조선의 辰韓은 하가점하층문화(BCE 24세기∼BCE 15세기)에서 나타난다.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은 연산산맥 북동쪽에서는 내몽고 적봉, 통료(通遼) 및 요녕성 조양(朝陽), 부신(阜新), 호로도(葫蘆島), 금주(錦州) 등지에 분포하며, 연산산맥 남서쪽에서는 하북성(河北省) 승덕(承德), 당산(唐山) 소관장(小官莊), 북경(北京) 창평(昌平) 설산(雪山) 그리고 천진(天津) 대창(大廠) 대타두(大坨頭) 등지에 나타난다. 발해와 갈석산이 辰韓과 番韓의 경계이므로 대타두문화 지역도 辰韓에 속하였다. 조선의 慕韓은 고태산 문화(BCE 20세기∼BCE 14세기), 마성자문화(BCE 20세기∼BCE 13세기) 쌍타자2기문화(BCE 20세기∼BCE 15세기)에서, 조선의 番韓은 산동 용산문화(BCE 25세기∼BCE 20세기), 악석문화(BCE 20세기∼BCE 16세기)에서 나타난다. 북한은 대동강문화가 조선의 중심이고 단군릉이 평양에 있다고 하나 대동강문화는 모한의 문화이고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릉은 모한왕릉 즉 제후왕의 릉으로 보아야 한다.
2.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이 기술하는 삼한조선
진수와 범엽은 삼한이 한 번 있었다고 착각
진수와 범엽은 낙랑·대방군의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 지역의 韓·倭 침략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시 획득한 사료와 침략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동이의 역사에 관해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약탈한 사료를 잘못 해석하였다. 가장 중요한 실수가 삼한조선의 삼한과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 지역의 마한(이 때의 신한=진한과 번한은 마을 단위의 소국으로 마한의 속국이었다)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마한과 마한의 마을에 불과했던 신한(진한)과 번한을 삼한으로 오해하고, 삼한조선에 관한 사료도 마한에 대한 사료로 오해하여 마한 기술에 활용하였다. 그들은 韓에서 마한이 우위였던 사실과 삼한조선에서 辰王이 삼한을 지배했던 사실을 합하여 이상한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진수와 범엽이 없는 것을 쓴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삼한을 기술하는 사서와 『삼국사』에 나오는 韓 지역의 마한을 기술하는 사서를 모두 보았다. 이들은 고구려나 韓·倭에서 약탈한 사료에 나온 것을 나름대로 편집하여 韓의 마한 역사를 썼다. 이들이 약탈한 사료에서 본 삼한조선을 기술하여 준 덕분에 『삼성기전』, 『단군세기』,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변한과 변진의 모호성
진수는 마한을 설명하면서, 위만에 공격당한 준왕이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서 韓의 땅에 자리잡고 스스로 韓왕이라 하였다고 하며, 범엽은 삼한을 설명한 다음에, 衛滿에게 패한 준왕이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는데, 準의 後孫이 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고 한다. 辰韓에 대해선 진수와 범엽 모두 辰韓 노인들의 말을 근거로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國으로 왔고,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辰韓에게 주었다고 기술한다. 둘 모두 弁韓이나 弁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진수는 韓은 馬韓 辰韓 弁韓이라 한 후, 馬韓 辰韓을 설명한 다음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弁韓이라 하지 않고, 弁辰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범엽은 삼한은 馬韓 辰韓과 弁辰이라고 한다. 3韓 중 辰韓과 弁韓이 있기 때문에 弁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데 이들은 아무런 설명없이 넘어간다. 왕회분(王會汾)은 『晉書』, 『梁書』, 모두 ‘弁韓’이라 하니 弁辰은 틀린 말이라고 한다.
BCE 24세기의 삼한조선은 辰韓, 慕韓, 番韓의 삼한이다. BCE 2세기 韓 지역의 마한은 마한 한 나라이다. 韓 지역이 원래 번조선 지역이므로 마한의 변한은 원주민 마을로서 마한의 주민(속국)이다. 예맥조선(위만조선)이 망하고 왕검성의 주민들이 요동고새 남쪽의 낙랑군으로 강제이주당할 때, 韓 지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辰韓의 유민으로서 辰韓(신라)을 자처하였다. 이들도 마한의 주민(속국)이다. 弁辰은 진한을 자처한 신라와 원주민 마을인 변한이 통합한 마을이다.
진수와 범엽은 삼한조선에 대한 사료를 마한에 대한 사료로 오해하여 BC24세기 삼한조선의 진한, 모한, 번한, BCE 2세기 마한의 진한 변한 변진을 구별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였다. 강단 사이비들은 이러한 횡설수설을 수용하면서, 마한의 위치만 한반도의 중·남부로 이전하여 BCE 2세기 이후, 70여 소국의 삼한시대라는 소설을 작성하여 야마토가야설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辰王은 삼한조선의 천자
진수는 마한 55국을 열거하고 辰王이 마한의 月支國을 통치했다고 한다. 진수는 弁辰은 24국인데 그 중 12국은 辰王에 臣屬되어 있으며,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진수의 말은 횡설수설의 연속이다. 진한은 12국이고 변진도 12국이라 하면서도 弁辰은 24국이라 한다. 실제 변진으로 열거하는 나라는 23국에 지나지 않는다. 24국 중 12국이 진왕에 속하고 마한의 월지국도 辰王이 통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辰王이 통치하면 진한에 속해야지 마한에 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수의 횡설수설은 삼한조선에서 慕韓王은 항상 辰韓 사람으로 왕을 삼았고, 세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慕韓王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기술한 사료를 마한이 우위인 韓 지역의 마한에 적용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삼한조선에서 辰王 즉 辰韓의 직할지인 目支國(진수에 의하면 月支國)은 진한 12국에 속한 나라다. 진수는 마한이 우위인 韓 지역의 마한에서 辰王의 직할지인 目支國(진수에 의하면 月支國)이 마한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목지국을 진한에서 마한으로 옮겼다.
범엽은 삼한은 모두 옛 辰國이라고 하면서,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고,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이라고 한다. 범엽의 말도 횡설수설이다. 왜 마한이 가장 강대하면서 왕의 이름을 馬王이 아닌 辰王으로 하는지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辰韓이 없다면 辰王으로 이름지을 수 있으나, 辰韓이 옆에 있는데 왕의 이름을 辰王으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범엽의 횡설수설 역시, 삼한조선에서 삼한이 모두 辰國이며 辰韓이 가장 강대하였고, 辰韓의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의 왕으로 군림하였고, 삼한의 제국왕의 선대는 모두 진한인이라 기술한 사료를 마한이 우위인 韓 지역의 마한에 적용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범엽은 목지국을 마한에 소속시키면 나라의 갯수를 54, 12, 12로 할 수 없어 국명을 열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수와 범엽은 삼한조선에서 辰王이 삼한을 지배했다는 사료를 韓 지역의 마한에서 마한이 弁辰(신라)을 지배했다는 사료에 부합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사료를 해석 또는 조작했던 것이다.
삼한조선은 방사천리
진수와 범엽은 삼한이 방사천리라 한다. 삼한조선은 방사천리의 대국이었다. 그러나 마한은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 지역을 차지한 작은 나라였다.
삼한조선 시 우리의 영토가 가장 광활하였다. 중국 동부에서 몽골 만주를 지나 한반도까지가 우리의 영토로서 방사천리였다. 중국 동부의 번조선은 전국시대에 영토를 거의 빼앗기고 韓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BCE 2세기에는 주요 국가로, 당산 지역의 예맥조선, 내몽골과 몽골 지역의 북부여, 한반도 북부의 낙랑국이 있었고, 그 외에 마한(말한=말갈)을 자처한 소국들이 있었다. 삼한조선 이후에는 우리 민족의 국가로서 방사천리의 대국이 없었다.
삼한조선은 70여국
韓의 마한은 나라들의 연합체가 아니다. 마한이 백제에 망할 때 끝까지 저항한 것은 어떤 나라가 아니라 城(원산성과 금현성)이다. 진수와 범엽이 삼한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는데, 농경 정착생활을 하면서 성곽이 없다는 것은 BCE 2세기 이후에는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성곽이 없다는 기술은 삼한조선에 해당하는 말이다. BCE 2세기 마한의 辰韓은 12나라가 있지도 않았고, 여섯 마을이 결합한 나라이다. 『삼국사』는 서나벌의 건국세력이 조선의 유민인 辰韓 6부라고 명시한다. 진수가 辰韓은 6국이었는데 12국으로 나뉘었다고 한 것은 상반되는 두 자료 즉 6촌과 12국을 아우르기 위한 진수의 추측에 불과하다.
진수와 범엽이 말한 馬韓 50여국, 辰韓과 弁韓 각 12국은 삼한조선의 나라 수이다. 진수가 기록한 마한의 나라이름은 전삼한 慕韓의 각국 이름이다. 辰韓과 番韓의 나라이름은 진수가 弁辰으로 헷갈려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弁辰이 붙지 않은 나라 11개는 辰韓의 국호, 弁辰이 붙은 것 12개는 弁辰을 빼면 番韓의 국호이다. 삼한조선은 방사천리의 대국이므로 여러 국가가 있을 수 있다. 모한의 남부는 바다이므로 남쪽에서 왜와 접하는 것은 番韓이다. 즉 번한은 양자강 유역의 왜와 접하는 지점까지 중국 동부를 차지하였다.
양잠을 하고 면포를 생산
후삼한은 한 나라이므로 즉 한 골짜기에 수천가가 살 수는 없으므로, 진수와 범엽이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라 한 것은 전삼한에 관한 기술이다. 농경 정착생활을 하면서 성곽이 없다는 것은 BCE 2세기 이후에는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성곽이 없다는 말도 전삼한의 모한에 해당된다.
마한의 백성은 정착하여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전삼한 모한에 관한 기술이다. 환국인이 이동하여 만든 홍산문화에서 옥잠이 출토되며, BCE 3,000년의 것인, 평양 호남리에서 밑바닥에 통잎 뽕나무 무늬가 있는 질그릇이 출토되었고, 봉산 지탑리 신석기 유적에서는 메뽕누에를 반복하여 새긴 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고, 만주와 한반도 신석기유적에서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뽑는 가락바퀴가 출토되므로, 모한에서 양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에도 단군이 양잠을 권하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물론 발해만 남쪽과 한반도 남부도 양잠이 가능하지만, 면포를 생산했다는 다음 말로 보아, 전삼한 모한에 관한 기술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출토된 면직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상대 후기인 3,300년에서 3,600년 정도 된 것인데,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인도면은 중국에 7세기에나 들어오며, 백첩포를 만드는 원료인 야생의 초면은 한랭한 대륙성 기후에서 자라서 중국에서는 초면이 없었고, 강계에서 청동기시대의 물레가 출토되었고, 고구려와 9세기의 신라가 백첩포를 중국에 수출했으므로, 모한에서 상에 수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면포를 만들었다는 말은 전삼한 모한 북부에만 해당된다. 초면은 따뜻한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으므로 초면을 만든 나라를 한반도 남부의 나라로 보기 어렵고, 황하 하류의 발해만 남쪽은 건조한 지역이 아니므로 후삼한 마한으로 보기도 어렵다.
농업 관련 제천의식과 소도
진수와 범엽이 등가죽을 뚫고 막대기를 꼽아 일을 한다느니, 금은과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마한사회를 기술하는 부분은 사료가치가 떨어지긴 하지만, 원시적 사회를 묘사하는 점에서 전삼한의 모한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5월과 10월의 농업관련 민속과 소도에 관한 기술은 모한의 사회상과 부합하다고 할 것이다.
3. 辰國(辰韓)과 馬韓(말갈)
삼한조선 시의 辰國(辰韓)과 慕韓(馬韓, 말갈)이 후대에 보통명사로 사용되므로 여기에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한다. 강단과 재야의 유사사학이 辰國(辰韓)과 마한(말갈)을 특정한 정치체의 이름 즉 고유명사로 파악하여 우리 역사의 이해를 막고 있다. 辰國(辰韓)은 삼한조선의 진한을 승계한 나라라는 의미로, 마한(말갈)은 辰國은 아니지만 이인자로서 辰國 이외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나라를 자처하는 의미로 쓰인다.
辰國은 요서를 차지한 정통성 승계국을 지칭하는 말로 됨
범엽은 삼한이 모두 옛 辰國(신국 진국)이라 하였고, 진수는 辰韓(신한 진한)이 옛 辰國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사서에 『단군세기』와 같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삼한조선 시 辰韓이 천자이고, 辰韓이나 辰國은 삼한의 영토 모두를 의미하기도 하고,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호칭이 삼한조선이 망한 후에도 유지되어, 조선의 중심국을 일반적으로 辰國으로 불렀다. 역계경이 우거왕과 정책 차이로 예맥조선을 떠나 동쪽의 辰國으로 갔는데, 역계경 집단이 예맥조선과 조공이나 번상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당시 예맥조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북부여밖에 없다. 이는 북부여가 조선의 중심국이라는 의미로 신국(진국)이라 불리었음을 증명한다. 낙랑왕 최리가 호동에게 북국 神王(辰韓)의 아들이라 하고 사위로 삼았는데, 당시 고구려는 동부여를 점령하여 辰國이라 할 수 있었다. 낙랑국은 辰國인 고구려와 혼인을 통한 우호적 관계를 맺어 나라를 보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소위 발해의 국호가 진국(震國)이나 大震이었는데, 이는 조선으로부터의 정통성은 부여와 고구려를 거쳐 대진에게 이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발해는 당이 부른 명칭일 뿐이다. 징기즈칸은 진국칸 즉 震國王이다. 징기즈칸도 辰韓과 大震으로부터의 정통성을 주장한 조선인이었음을 그 호칭으로부터 알 수 있다.
마한(말갈)은 이인자를 자칭하는 말로 됨
대부여가 망하고 열국시대에 접어든 후 소국들은 마한(말칸=말갈)을 자처하였다. 즉 조선의 중심국인 辰韓(辰國)은 아니지만 辰國 이외의 나라들에게는 예속되지 않겠다는 의미로 마한이라 하였다. 삼한조선 시 모한 즉 좌현왕이 진한(천자) 다음의 이인자였으므로 마한이라 자처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BCE 2세기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 지역에서도 그 왕이 마한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예맥조선이 망하면서 왕검성 사람들이 韓으로 망명하자 마한 왕이 이들을 동쪽에 살게 하였다. 망명자들은 진한의 유민을 자처하였고, 韓 지역이 원래 번조선(번한) 지역이어서 원주민이 번한을 자처하였다. 즉 당시 韓 지역은 마한 한 나라였는데 진한의 유민이 이주하였고, 이 지역이 번한지역이었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인해 진수와 범엽이 韓 지역의 마한을 삼한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韓의 마한은 CE 9년 백제에 의해 망하고, 백제가 韓을 지배하게 된다.
고구려가 건국할 때 걱정한 말갈은 오환인들이거나 동부여에 속하는, 마한을 자처한 소국이다. 유철은 흉노의 지배 하에 있던 오환인들을 상하장(요동고새 북쪽 요동외요 남쪽)으로 이주시켜 흉노에 대비하였는데, 이들은 흉노에 지배 당했던 북부여인들로서 이인자란 뜻의 말갈을 국호로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요동군의 오환인 집단이었는데, CE 12년 왕망이 유리왕을 살해하자 독립하였다. 고구려가 걱정한 말갈은 하나의 정치체가 아니라, 말갈이나 마한을 자처한 주변의 여러 세력을 말한다.
백제가 건국할 때 걱정한 말갈은 상하장의 오환인들이다. 『삼국사』에 의하면, 온조왕은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하는데, 백제 북쪽의 말갈은 요동고새 북쪽의 오환인들이다. 백제를 공격한 오환인들은 백제와 인접했던 우북평이나 어양의 오환인들일 것이다. 『삼국사』에 의하면 말갈이라 자처한 오환은 BCE 16년, BCE 11년, BCE 9년, BCE 8년, BCE 1년 백제를 침범하였다.
『삼국사』에 의하면 말갈은 CE 22년부터 507년까지 백제와 20차례나 전쟁을 하고, 125년부터 481년까지 신라와 10차례 전쟁을 한다. 이 말갈은 고구려의 지방자치단체로서 고구려의 주민이다. 이들 요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말갈 마을은 고구려에 복속하여 고구려의 주민이 되었으나 일정 수준의 자치를 인정받아 독자적으로 또는 고구려의 명령에 의해 백제나 신라를 약탈하는 전쟁을 하기도 하며, 고구려의 동원이 있을 때는 항상 고구려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후한서』는 122년(연광 원년) 2월조에서 “부여왕이 병사를 파견하여 현도를 구하고 고구려 마한 예맥을 격퇴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 하며, 김부식도 『후한서』에 맞추어 121년의 고구려와 후한 전쟁의 참가자를 마한으로 표기하는데, 마한=말갈이므로 여기의 마한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고구려의 지자체를 말갈이 아닌 마한으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백제·신라와 전쟁을 하는 말갈도 역시 하나의 고구려 지자체가 아니다. 말갈은 고구려의 지자체이므로, 하북성, 요동반도 북쪽, 한반도 북쪽 모두에 있었다. 공격 대상인 백제·신라의 영토와 가까운 말갈이 백제·신라를 공격했다.
CE 61년에 마한의 수장 맹소가 복암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하는데, 이 마한은 경상도의 마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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