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사 기초 낭독 2

역사회복 2026. 4. 11. 07:53

https://youtu.be/ujc7oyj21LQ

 

2. 광개토대왕릉비문 해독

 

(1) 고구려 건국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 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焉永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𦊆,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옛적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다. 북부여에서 오셨다. 천제의 아들이시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태어나시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 ▨▨▨▨▨▨ 수레를 출발시켜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오시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게 되었다. 왕께서 나루터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을 떠오르게 하라.” 하셨다.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가 엮이고 거북이 떠올랐다. 그 후 강을 건너셨다.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영락(영원한 즐거움)이 대대로 왕위에 이어졌다. 천제께서 황룡을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오르셨다. 유명(遺命)을 받은 세자 유류왕께서 도로써 뛰어나게 다스리셨고, 대주류왕께서 왕업을 이어받으셨다.

 

▨▨▨▨▨▨ 삭제

삭제된 부분은 북경 북쪽의 지명이었다. 정미년조의 정복 대상이 후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자들을 삭제하면서 이 부분도 같이 삭제하였다. 이 부분들 외에도 고구려의 강역이 내몽골 몽골은 물론 하북성 남부와 산동성 북부까지 이르렀음을 알리는 부분과 백제의 하북성 산동성 영토를 알리는 부분을 일제는 모두 삭제하였다.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강단 유사사학은 뒤의 까지 포함하여,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이라 하고, “비류곡 홀본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 해석한다. 그러한 의미가 되기 위해선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이 아니라 城於沸流谷忽本西山上이 되어야 하므로 사이비들의 해석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의 부용 세력으로서 의 영토인 요동군 내에서 건국하여, 원천적으로 성을 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은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웠다이다.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 순천부총도(順天府總圖)에 성산(城山)이 구수(泃水) 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비류수는 구하이고, 비류곡 즉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금의 平谷區)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도 고구려는 홀본부여이고 홀본은 요동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홀본이 요동군 내라 하고 있다. 삼국사도 추모왕이 비류수 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궁실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궁실을 짓지 않았고 산을 도읍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독립된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사백제 비류 시조설에 의하면, 비류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자고 했으며,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 백제가 도읍한 지역과 홀본은 남북으로 있어 비류 시조설의 비류 이동과 일치한다.

 

焉永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강단 유사사학은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라 하여 , 으로 판독하고 세속의 왕위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천제가) 황룡을 보내니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로 해석한다. 그런데 일제 참모본부 편집과의 요코이를 비롯하여 일제 유사사학조차도 으로 판독하고 있다. 나라를 세운 창업주가 왕위가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는가? 설사 시조가 그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왕의 공적을 기리는 비문에 쓸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세속이라는 의미도 없다. 으로 본다면, 기쁘지 않은 주체와 황룡을 보내는 주체가 달라 황룡을 보내는 주체인 하늘을 생략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된다. 강단 유사사학의 천박함은 끝을 모른다. 일제의 날조보다 더 고구려를 깎아내리기 위해 일제보다 더 악랄하게 비문을 날조하고 있다.

윗부분과 연결하여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영락(영원한 즐거움)이 대대로 왕위에 이어졌다.”가 올바른 해석이다.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永樂을 넣어서 시조의 위업을 찬미하는 문장은 얼마나 수준 높은가. 글자 뜻도 모르고 문법도 모르고 문맥도 모르면서 일제보다 더 천박한 소설을 쓰는 강단 사이비의 천박함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2) 광개토대왕 업적 개괄

 

遝至十七世孫, 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께서 18세에 왕위에 오르셨다. 왕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였다. (대왕의) 은택은 하늘에까지 미치고, 무위는 온 세상에 떨치어 ---를 쓸어 없앴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편안하여,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으시어, 39세에 수레를 멈추고 돌아가셨다. 갑인년(414) 929일 을유일에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이에 비를 세워 훈적을 새기어 후세에 보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3) 을미년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 躬率往討. 過富山, 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候城, 力城, 北豊, 五備海, 遊觀土境, 田獵而還.

영락 5년 을미년에, 왕께서는 비려가 --- 하여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과 산을 지나 염수가에 이르러, 그들의 3개 부락 6~700 영을 격파하셨다. (노획한) ··양떼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수레를 돌려 귀환하시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후성, 역성, 북풍, 오비해를 거치며, 영토를 살피고 사냥을 하며 돌아오셨다.

 

(4) 병신년조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攻取 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弖利城, ▨▨,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句牟城, 古須耶羅城, ▨▨▨▨,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農賣城, 豆奴城,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亐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 味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刾迫城. ▨▨侵穴, 便圍城, 而殘主困逼,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잔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臣民(신라)을 위하여, 영락 6丙申년부터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우리 군사들이 ----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 미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 로성, 구천성을 공취하였다. ▨▨▨▨▨ ---그 도성을 ---. 백잔이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맞서 싸웠다. 왕께서 크게 노하시어 아리수를 건너 정예 부대를 보내 도성을 압박하셨다. 군사들이 ▨▨로 침입하여 거점을 파고들고, 하여 곧바로 성을 포위하니, 백잔의 주가 곤궁하고 절박해져서, 남녀 생구 1,000명과 고운 베 1,000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지금 이후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께서 지난날의 미혹된 허물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그 후 순종해 온 정성을 받아들이셨다. 이에 58700촌을 얻고 백잔 주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도읍으로 돌아오셨다.

 

삭제와 변조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에서 일제는 처음에 입공우와 연침을 삭제하였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우기만 하는 경우 당시 상황을 기술하는 삼국사등 사료에 의해 입공우와 연침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는 백제까지 지울지 아니면 글자를 변조할지를 고려하였을 것이다. 일제는 변조하기로 정한 후, 渡海破를 입공우 자리에 새겨 넣었다. 연침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聯侵이 있는 곳의 대각선 아래로 10행과 11행도 지웠다.

227글자와 35글자가 연속으로 지워진 부분도 일제가 삭제하였다. 광개토대왕이 공격한 곳이 (황하 동쪽 제수 북쪽)임을 알려주는 지명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김병기는 서예학에 근거하여 渡海破의 필체가 다르며 글자 위치도 맞지 않음을 보이고, 원 글자를 入貢于로 보고 入貢于에서 渡海破로의 변조과정을 증명하였다. 入貢于로 보는 경우 백제와 신라 사이는 聯侵이 될 수밖에 없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날조된 부분을 보완하면 당시의 상황과 비문이 완벽하게 부합한다. 백제는 3세기 말부터 열도로 진출하여 4세기 중후반에는 열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4세기 말 열도인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渡海破의 문맥상 불가능성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渡海破를 날조로 보지 않고,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으로 판독하여, ‘왜가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가라),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한다.

사이비들은 이 부분을 신묘년조라 하여 독립된 문장으로 파악한다. 이 경우 백제를 토벌하는 이어지는 내용과 문맥이 전혀 연결되지 않게 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왜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에 반항하는 나쁜 놈의 두목이므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고구려가 왜를 격파한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백제를 격파한 사실이 주가 되고 있다. 따라서 바보가 아닌 한, 도해파 부분과 결자 부분에는 백제가 두목이 되어 신라를 침략했다는 내용이 나와야 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더구나 왜와 관련된 399400404년의 첫 기사인 399년 기해년 기사에서 왜가 관련되었음에도, 백제가 396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한 맹세를 어기고 왜를 사주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한다. 백제가 왜의 신민이라면 왜의 침입 시 백제와의 내통이나 백제가 맹세를 어겼다는 사실을 도대체 언급할 수가 없다. 그것을 언급하면 말하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내통이 있더라도 자기 부하에게 지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가 주인이고 왜가 종이기 때문에 종이 행동해도 주인인 백제가 미워, 백제가 사주한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릉비문의 화자는 왜는 백제의 조종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왜가 침입을 해도 백제가 조종한 것에 분개하고 있다. 화통(내통)이라 표현한 것은 왜도 백제도 고구려의 아래에 있어야 하므로, 백제가 왜 위에서 왜를 조종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어떻든 왜와 백제의 우열관계 판단에서 백제의 우월한 관계를 명시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들 유사사학의 주장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즉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앞뒤가 어긋나는 문장이 된다. 초등학생의 독해력만 있다면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도해파가 날조임을 바로 알 수 있음에도 이들은 야마토가야설을 위해 눈을 감는다.

 

渡海破와 고구려 천하관의 배치

사이비들의 주장은 고구려 천하관에 배치된다. 속민이나 신민을 거느릴 수 있는 주체는 고구려밖에 없다. 왜가 다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표시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고구려의 강성함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에서 불가능한 표현이다. 고구려의 토벌대상으로 나오는 왜에게 臣民을 둘 정도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왜가 실제로 백제와 신라를 다스렸더라도 왜가 포학하게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써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 이외의 다른 국가가 신민을 거느리거나 거느리려 하였다고 결자를 보완하거나 자구를 수정하는 어떤 시도도 옳지 않다. 또한 속민과 신민은 같은 의미이고 백제와 신라는 이미 속민이라 규정했으므로 다시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삼았다)’라고 만드는 시도도 옳지 않다.

 

병신년조 초입부가 기술하는 역사적 사실

반면에 본고에서와 같이, 도해파를 入貢于로 대체하고, 결자를 연침으로 보완하면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以爲臣民이라 할 때 신민은 고구려에 충성하며 복종하는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선 신라를 의미한다. 병신년조 초입부의 왜는 391(신묘년)에서 396(병신년) 사이에 신라를 공격한 왜이므로, 백제 지배 하의 열도인들을 의미한다. 삼국사에 왜가 393년 신라를 침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릉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병신년조 도입부는 396년 백제를 공격하는 정당성을 밝힌다. 371년 고국원왕 전사 이후 고구려는 줄곧 백제를 공격하고 있었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신라를 굴복시켰다. 20193차원 스캐닝으로 충주고구려비 전면 상단의 글자가 永樂七年歲在丁酉397년으로 판독되었고 비문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과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는 구절이 있다. 충주고구려비의 내용과 3911월 신라로부터 볼모를 받았다는 삼국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3911월 이전 신라를 굴복시켜 실성을 인질로 받았으며, 고구려군을 신라에 주둔시켜 신라의 통제와 백제의 공격에 활용하였고, 397년 이전에 백제 영토였던 충주를 점령하고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3913월에는 고국양왕이 불교를 숭상하여 복을 구하고 國社를 세우고 宗廟를 보수하라 명하는데, 이 때의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은합이 서봉총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제사에 참여한 인질 실성이 은합을 하사받았고 귀국 시 그 은합을 신라로 가져간 것을 의미한다.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에 집중하기 위해 393년 열도 주민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396년의 백제의 수도가 있는 정벌이 행해졌다.

백제를 공격하는 이유(고국원왕의 전사)를 사실대로 쓰면 천자국의 체면이 없어진다. 그래서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한 행위를 문제삼고 있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게 된 근본원인이 결국은 고국원왕 전사에 따른 고구려의 반격에 대한 대응이므로, 표면상 신라 공격을 언급했으나 이는 고국원왕 전사에 대한 백제의 책임을 묻는 것이 된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태왕께서 지난날의 미혹된 허물을 은혜로이 용서하고라 하여 고국원왕 전사는 명시하지 않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백제와 신라가 속민이었다는 표현을 고구려측의 과장이라 주장하는데, 고구려는 辰韓(辰國, 辰朝鮮) 영역을 차지한 나라이므로 모든 조선의 나라에 대해 천자국임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른 나라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라도, 고구려는 조선의 천자국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천자국 고구려의 속민인데, 백제가 그러한 고구려 중심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행동)을 하여 충실한 신민인 신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중심의 질서를 확인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한다고 한 것은 고구려인의 사고체계에선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다만 표면상의 명분(신라 구원)과 실제의 이유(고국원왕 전사에 대한 복수)가 다를 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글이 쓰여진 역사적 맥락에 대해 무지하고, 오로지 일제·중제 유사사학에 충성하기 위해서만 사고하므로,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해서 과장으로 몰아가려 한다.

以六年丙申396년의 백제 정벌이 397년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지역은 수렁이 많고 강이 많아 여름에 공격하는 경우 원정군이 홍수나 진창에 의해 애를 먹을 수 있어 광개토대왕은 연말에 공격하여 연초에 완료하였을 것이다.

 

王躬率水軍

강단 유사사학은 水軍를 못 본 척한다. 일제도 라고 판독하였다. 강단 사이비들은 백제와 전연의 전쟁, 백제와 위의 전쟁 등으로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음이 드러날까 두려워 를 안 보려고 한다. 당시 후연이 영정하 북쪽의 고구려와 황하 동쪽의 백제 사이에 있어 광개토대왕은 배를 타고 에 상륙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수묘인이 되는 韓穢

광개토대왕은 미추성을 함락시켰는데 미추성은 비류가 도읍한 미추홀이므로 396년의 공격은 백제 북부에 대한 것임이 증명된다. 비문에 58700촌을 획득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의 북쪽을 점령하여 영토로 편입하였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북쪽 해안가는 예인(왜인)과 한인(변한·진한인)이 살던 곳이므로 광개토대왕은 그가 정복한 지역의 예인과 한인을 수묘인으로 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비문에 나타난, 의 수묘인을 뽑은 성 36개 가운데 모루성, 고모야라성, 아단성, 잡진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미추성, 야리성, 두노성, 오리성, 대산한성, 윤노성, 고모루성, 전성, 삼양성, 산나성, 나단성, 구모성, 어리성, 세성의 21성이 396년 획득한 성에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도 고구려가 통치하면서 이름이 달라진 성일 것이므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영토로 유지하였음이 재확인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영토에서 수묘인으로 차출한 한예가 한강과 임진강에 있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광개토대왕이 수군으로 공격한 사실과 모순된다.

 

(5) 무술년조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肅慎土谷, 因便抄得, 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영락 8년 무술년, 왕께서 편사(별동대)를 보내, 숙신의 토곡을 살피라 하셨다. (별동대)는 살피는 길에 막라성과 가태라곡에서 남녀 300여 명을 잡아 왔다. 이로부터 숙신이 조공하고 정사를 아뢰었다.

 

(6) 기해년조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太王()後 稱其忠▨ ▨遣使還告以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께서 평양으로 순시하셨을 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에서 도주하여, 제가(노객은 신라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신하임을 자처하는 말임) 그들을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왕께 보고하여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기뻐한 후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어 지시사항을 내리셨다.

 

글자 날조

김병기는 入貢于渡海跛로 날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潰于城池潰破城池로 날조되어 있음을 밝혔다. 일제는 潰于城池潰破城池로 날조하여 왜의 항복을 신라를 깨뜨린 것으로 변조하였고, 그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기뻐한 것도 감추어야 하므로 太王()를 지웠다.

 

潰破城池의 문맥상 불가능성

강단 유사사학은 潰破城池로 해독하는데, 뒤의 말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사이비들은 신라왕이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차 城池를 부수고 奴客으로 하여금 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자 광개토대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칭찬하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奴客으로 하여금 으로 삼으려 하니라는 그들의 놀라운 국어 구사력에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추종하는 일제 유사사학이 왜가 신라 사람들을 왜의 백성으로 삼았다라는 말이라고 주장하니 그와 비슷한 말로 이해하고 반박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노객을 신라 사람들이라 한다. 노객은 자신을 낮추는 말이므로, 노객을 많은 신라 사람이라 해석할 수는 없다. 노객을 신라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비문의 글자를 날조하는 것보다도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들의 과감한 용기에 감동이 밀려온다. ‘삼으려 하니라는 의도를 표시하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다. 또 신라왕이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구원은 없고 명령을 요청했다는 글자만 있다. 없는 글자의 뜻을 창조하고 있는 글자에 없는 뜻을 창조하는 그들의 창의성에 다시 한 번 감동해야만 한다. 구원을 청하는 것은 광개토대왕이 칭찬할 신라왕의 충성이 될 수 없으며, 광개토대왕이 계획을 세우게 하는 것은 구원요청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없다.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을 끝까지 연결시키는 그들의 인내심에 또 한 번 감동해야 한다.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은 이처럼 한계가 없다.

 

일제가 기해년 기사를 날조한 이유

본고처럼 김병기가 수정한 문장으로 하고 결자를 로 보완하여 해석해야, 광개토대왕이, 항복한 왜인을 백성으로 삼은 일을 보고한 내물왕의 충성심을 칭찬할 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그 일에 대한 지시도 할 수 있다. 기해년 날조에서도 날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장으로 인해 조작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일제가 기해년 기사를 날조한 것은 399년에 포로가 된 전라도왜가 403년 이후 나라로 보내져 고구려계 국가의 지배를 받고 6세기 이후에는 백제의 지배를 받는 왜집단(나라의 大倭)임을 숨기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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