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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광개토대왕릉비문 날조
우리 역사학의 상황
우리는 아직 국사를 과학적 방법에 의해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유학자들이 날조한 이래 계속하여 날조되어 왔다. 일제 참모본부는 조선 침략을 위해 한국사를 날조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배를 위해 어용학자와 매국노를 동원하여 날조하였다.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은 각각 남한 내 확실한 반공정권 수립과 집권을 위해 일제 부역자와 협력하였다. 일제의 한국사 날조에 부역한 매국노들이 해방 후에도 학문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부역을 학문 연구로 위장하였다. 날조를 실증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날조된 사실이 객관적 학문 연구의 성과인 것처럼 왜곡하여 그들의 부역 사실을 은폐하였다. 날조된 사실이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순간 부역자로서의 정체성이 공개되므로 그들은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중국도 일제의 날조를 받아들이면서 동북공정을 통해 날조에 동참하였다.
日帝의 계승자들이 강단을 장악하여 日製·中製 날조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일제의 지배가 이어지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조선총독부 소설에 반하는 객관적 연구를 행하는 사람은 투명인간처럼 왕따시켰다. 최재석, 신용하, 김석형, 김성호, 김병기 등의 연구에 무시로 일관하였다. 학문이 아니라 교리가 되었다. 날조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날조를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받아들이는 생명체들을 학문 권력의 승계자로 육성하였다. 더 무식하게 더 극렬하게 날조를 옹호할수록 교수지위와 출세가 보장되었다.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을 식민사관이나 식민사학으로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의 날조는 관점의 차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역사를 날조한 日帝의 창작소설을 계승하였으므로 학문으로서의 격을 갖지 못한다. 최근 日帝 소설의 승계자들이 객관적 역사연구를 유사역사학이라 부르고 있으나, 본고를 통해 어느 쪽이 유사사학인지가 밝혀질 것이다.
일제의 광개토대왕릉비문 날조 공작
강단·일제·중제 유사사학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이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 날조가 우리 역사 날조에서 핵심적 사항이므로 이들은 억지를 쓰면서 사실을 감추고 있다. 2~3자 이상 연속으로 글자를 알 수 없는 경우는 일제가 삭제한 것이다.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은 일제가 글자를 변조한 것이다.
일제는 소위 명치유신 직후인 1870년부터 조선을 작전공간으로 보았다. 1871년 육군 참모국이 설치된 후, 1872년부터 조선과 만주에 간첩을 파견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 내 일본인 이동이 가능하자, 한국에 대한 첩보 활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는 당시 일본 내에 유행하던 유사역사학인 야마토가야설(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조선침략에 이용하려고 하였는데, 야마토가야설을 부정하는 금석문이 나타날까 두려워하였다. 당시에도 금나라 황제의 비라고 알려졌던 광개토대왕릉비는 일제의 우선적 조사대상이었다.
일제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자마자, 왜가 백제에 입공하였다는 병신년조 초입부의 ‘入貢于’ 등 왜 지역이 백제의 영토임을 입증하는 부분들과,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복을 기록한 경자년조 등 우리 역사의 실상을 전하는 부분들을 삭제한 후 비를 방치하였다. 삭제는 아무도 모르게 1870년대 초반에 행해졌다.
공식적으로 1880년에 비가 발견되어 탁본이 시작된다. 高明士가 초기의 원석탁본이라 주장하는 대만 부사년(傅斯年)도서관에서 발견된 162장으로 구성된 탁본에는 ‘渡海破’ 부분이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 徐建新이 2003년 하반기 북경의 한 고서적 경매장에서 구했다는 1881년의 탁본은 사코의 탁본과 같이 ‘渡海破’로 되어 있다. 이는 일제가 1881년 이전에 ‘入貢于’ 등 삭제한 부분에 ‘渡海破’ 등을 다시 새겨넣었음을 의미한다. 일제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한 후, 조선총독부 소설과 불부합하는 부분을 우선 지웠지만, 글자를 삭제한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날조 방법을 연구하다가 야마토가야설에 부합하도록, 삭제한 글자 일부에 다시 글자를 새겨넣었다. 경자년조는 글자 대부분을 삭제하였으므로 다시 새겨넣을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 삭제·변조와 관련하여 사코 카게노부(酒匂景信)의 탁본이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니,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니, 비에 석회가 칠해졌다느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문 변조 공작은 극비로서 실행자를 제외하고는, 참모국(1878년 이후 참모본부) 내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1883년 사코가 탁본을 입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것이 알려지도록 설계한 것은 일제 참모본부의 역정보 공작(disinformation operation)이다. 사코의 묵수곽전본은 일제는 1883년 이후에야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를 알았다고 주장하기 위한 공작의 수단에 불과하다. 사코와 사코의 탁본을 이용한 일제 군부의 연구자들도 비문 변조 공작은 알 수 없었다.
날조된 비문에 근거한 야마토가야설 선전
비문을 날조한 일제 참모본부는 안심하고, 1880년 편찬과에서 야마토가야설이 포함된 「황조병사」를 간행하였다. 1882년에는 야마토가야설을 집중적으로 날조하는 「임나고」를 간행하였다. 일제는 두 책을 사용하여 군인들을 교육하였다.
일제 참모본부는 사코가 가져간 탁본을 처음 본 것처럼, 해군성 어용괘(御用掛)로 근무하던 아오에 슈(靑江秀)에게 보내 연구하도록 했다. 아오에는 1884년 7월 「동부여영락대왕비명해」를 썼고, 참모본부 편집과의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는 1884년 12월에 「고구려고비고」를 썼다. 일제는 논문이 의도치 않게 진실을 드러낼까 두려워 내부적으로 오랫동안 검토한 후, 1889년 「고구려고비고」를 회여록에 실으면서 ‘渡海破’를 야마토가야설의 핵심 증거로 선전하였다.
이처럼 우리 역사 날조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을 침략 지배하기 위한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시작된 한국사 날조는 일제의 어용기관인 동경제국대,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를 통하여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고, 해방 후에는 강단 사이비들이 승계하여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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