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경자년조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 ▨▨▨▨▨▨▨▨▨背 急追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斯)羅城▨城, 倭▨▨潰, 城▨▨▨▨▨▨▨▨▨▨▨▨▨▨▨▨▨▨▨ 盡▨▨▨ 安羅人戍兵. 滿▨▨▨▨▨▨▨▨▨▨▨▨▨▨▨▨▨▨▨▨▨▨▨▨▨▨▨▨▨▨▨▨▨▨▨▨▨▨▨▨▨▨▨▨▨▨▨▨▨▨▨▨▨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句▨▨▨▨朝貢.
영락 10년 경자년, 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셨다. 남거성부터 신라성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병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 배후 ---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공격하자,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신라군 수비병을 두었다.
사라성과 ▨성을 공격하였다. 왜병이 --- 무너졌다. 성이 --- 모두 --- 신라군 수비병을 두었다. ---- 신라군 수비병을 두었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보고한 적이 없었으나,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 매금이 --- 조공하였다.
글자 삭제
비문 2면 8행∼10행과 3면 1행∼7행은 다음과 같다.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兵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斯羅城□城倭□□潰城□
□□□□□□□□□□□□□□□□□□盡□□□安羅人戍兵滿□□□□□□□□□□□□□
□□□□□□□□□□□□□□□□□□□□□□□□□□□□□□□□□□□□□□□□潰
□□□□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句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平穰
□□□□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合戰斬殺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
□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城國駭□□□□□□□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비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렇게 많은 글자가 지워진 곳은 없다. 2면 9행 상단은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너 열도로 가는 장면이므로 지웠다. 2면 10행과 3면 1행은 열도 내 고구려의 연승을 기록하는 장면인데, 安羅人戍兵만 남기고 모두 지웠다. 3면 4행과 5행 하단은 정미년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정복하였음을 숨기기 위해 지웠다. 3면 2행과 3행 하단은 지울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중간만 글자가 온전하면 삭제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므로 지웠다. 3면 3~5행 상단도 3면 1행과 2행이 자연적으로 지워졌다고 주장하기 위해 지웠다. 경자년조 글자 203자 중 103자가 지워져 있다. 경자년조는 신라에서의 전투라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분과 安羅人戍兵 이외에는 모두 삭제되었다. 이는 자연적 현상이라 보기 어렵다.
중제 유사사학의 조선총독부 지원
1963년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학자와 중국학자가 광개토대왕릉비를 공동으로 현지조사하였다. 현지조사 후 김석형과 박시형은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며, 각 행은 41자이고, 제1면 제6행만 아래 두 자가 없는 39자로서, 전부 1802자라 하였으며, 매 행간에 종선, 맨 위와 맨 아래에 횡선을 그어 괘선을 삼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1981년 비를 조사한 왕건군은 비문이 1775자라고 한다. 글자를 쓸 수 없는 곳은 天格(옆금)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2면 제9행 윗부분 7자와 제10행 윗부분 16자, 제4면 제1행 윗부분 4자에 해당하는 부분이 천격으로 구분되어 이 영역에는 원래 글자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경자년조의 삭제 글자 수를 23자 줄여서 일제의 비문 날조 혐의를 완화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63년 북한과 중국의 공동조사에서 발견된 횡선은 같은 높이에 있었는데, 그가 조사한 시점에서 횡선이 하향 이동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는 18년이나 지난 후에 조사했으며, 조사 시 특별히 더 과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63년에 있던 횡선은 사라지고, 63년에 없던 횡선이 중간에 나타난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처음 본 일제 참모본부가 1802자로 보았다는 것은 원래의 글자 수가 1802자임을 의미한다. 1802자는 1963년 북한과 중국의 공동연구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왕건군의 1775설은 거짓말이고 강단 사이비들은 일제의 날조설을 완화하기 위해 1775자설을 추종하고 있다.
急追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강단 유사사학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자 성이 즉시 항복하였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拔은 성을 공격하다는 의미이므로 從拔城이 어떤 성의 이름으로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從이 접속사로 쓰인 것으로 보아, “성을 공격하자마자 성이 바로 항복하였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拔(斯)羅城▨城
일제는 斯羅城을 新羅城으로 변개하였다. 앞에 新羅城이 나오므로 斯羅城을 신라의 성으로 우기기 어렵다. 斯羅는 「일본서기」에 두 번이나 나온다. 일제 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斯羅가 한반도의 신라라 우기고 있었는데, 신라와는 구분되는 사라가 나오면 사라가 열도의 지명이나 국명이 되어 일제 유사사학의 날조가 위험하게 되므로 斯羅가 아닌 新羅라고 한다.
拔新羅城은 문맥상 불가능하다. 남거성에서 신라성까지 있던 왜군은 고구려군이 오자마자 도주하였기 때문에 다시 신라성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斯羅城 전투는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바다 건너의 임나가라의 성을 취하고 신라군 수비병을 둔 다음, 다시 전진한 후의 전투이다.
安羅人戍兵
일제는 安羅人戍兵을 안라를 경상도로 조작하기 위해 남겨두었지만, 安羅人戍兵의 의미는 점령지에 ‘신라인을 수비병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安羅를 명사로 보면 安羅人戍兵 모두 명사로 되어 문장이 되지 않는다. 열도 정벌의 주력군은 고구려군이었지만 신라군도 참여하였다. 경자년조 기사에서 중요 전투 기사 마지막 부분마다 ‘安羅人戍兵’이 나타난다. 이는 신라군이 열도 정벌 시 보급이나 점령지의 수비를 맡았음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安은 ‘배정하다, 두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安羅人戍兵 외에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와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에서도 安이 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
근초고왕은 371년 고구려를 한반도에서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계속하여 전쟁을 하는데, 고구려는 신라를 위성국화하고 신라에 고구려군을 주둔시켜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백제는 391년부터 열도인들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한반도에서는 한수 이북의 여러 성을 뺏겼고 요동반도에서는 관미성을 뺏겼고, 급기야 396년에는 백제 경제의 핵심 지역인 韓 북부를 뺏겼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반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요동반도에서 393년 관미성 회복에 실패하였고 394년 수곡성 부근 싸움에서도 졌다. 한반도에서는 395년 패수 전투에서 졌다. 백제는 거듭된 패전으로 본토의 동원역량이 소진되어 열도주민으로부터의 징발을 강화하였고,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397년에는 왜왕이라는 관료를 신설하고, 초대 왜왕으로 태자 전지를 파견하였다.
기해년(399년)에,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명하자 전투의지 없이 신라로 보내진 전라도 왜인들은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가 왜인들의 항복을 고구려에까지 보고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전라도왜의 대규모 동원을 본 고구려와 신라는 백제가 열도주민을 동원하여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미리 열도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동해안 항구에 군선을 새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백제가 400년 열도 주민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왜군을 격퇴하고 바로 열도로 상륙하였다. 고구려가 396년 수군으로 韓의 북부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정도이므로 韓 지역보다 전력이 훨씬 낮았을 열도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구려는 구주 남부를 제외한 열도 전부를 정복하였다. 후에 열도의 백제인(일본인)들이 대진(소위 발해)을 두려워하였던 것은 광개토대왕 때의 경험으로 인하여서일 것이다. 『태백일사』에는 이 시기 열도에서의 사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과 부합할 것이다.
한 번 바다를 건너서부터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했는데, 왜인은 백제와 한통속이었다. 앞서 백제는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연달아 침범하게 했다. 열제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다.
광개토대왕이 열도를 정복한 사실은 유물·유적으로도 확인된다. 오사카에는 고구려 계통의 장식고분으로 추정되는 많은 고분과 고려사적(高麗寺跡) 등이 발견되며 이즈모 지역에도 고구려계 벽화고분, 가미요도 폐사에서 발견된 벽화의 파편, 가모스 신사 등이 발견되었고, 이즈모와 인접한 오카야마에서 고구려 문양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광개토성릉비문결자징실」에 의한 경자년 기사 재구성
계연수는 1898년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을 떠서 138자를 보결하였는데, 그가 보결한 경자년조는 다음과 같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 (官兵 躡跡而越 夾攻來)背 急追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斯)羅城▨城 倭▨▨潰 城六(被我攻 盪滅無遺 倭遂擧國 降 死者十之八)九 盡(臣率來) 安羅人戍兵. 滿(假)▨▨ (倭欲敢戰 與啄己呑 卓淳諸賊 謀)▨▨ (官兵 制先直取卓淳 而左軍 由淡路島 到但馬 右軍 經難波 至武藏 王直到竺斯 諸賊悉自)潰 (遂分爲郡)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句▨▨▨▨朝貢.
영락 10년 경자년, 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셨다. 남거성부터 신라성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병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관병이 자취를 밟아 건너가서 (신라군과) 협공으로 배후를 치고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공격하자,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신라군 수비병을 두었다.
사라성과 ▨성을 공격하였다. 왜병이 --- 무너졌다. 성이 여섯 번이나 우리의 공격을 받고 소탕되었다. 왜가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죽은 자가 10명 중 8, 9명이고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여 왔다. 신라군 수비병을 두었다.
滿假▨▨ 왜가 감히 싸우고자 탁기탄과 탁순의 여러 도적과 ▨▨를 모의하였으나, 관병이 기선을 제압하여 곧장 탁순을 점령하였다. 좌군은 담로도를 거쳐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거쳐 무장에 이르렀다. 왕께서 곧장 축사에 도달하시니 모든 도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마침내 나누어 군으로 만들었다. 신라군 수비병을 두었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보고한 적이 없었으나,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의 덕을 입은 이후에는 매금이 --- 직접 조공하였다.
일제 유사사학의 자충수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절반이 지워진 400년 기사에서, 야마토임나설을 위해 일부러 남겨둔 임나와 안라를 근거로, 임나와 안라가 경상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홀본에서 온 협보가 열도에 세운 나라가 다파라국인데, 다파라국은 다라국이라고도 하였고 안라국과 이웃하여 같은 성씨를 썼다고 하므로, 안라와 다파라(다라)는 열도에 있던 고구려계 소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파라(다라)국과 안라국은 나중에 임나에 병합되었다고 하므로 임나도 열도에 있었다.
일제 유사사학이 임나를 지우지 않아서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 고구려의 열도 정벌이 명확히 입증된다. 그들은 야마토가야설을 위해서 임나를 남겨놓았지만 「일본서기」에 의해 임나가 열도의 마을임이 입증되므로, 남겨진 임나를 통해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이 입증된다.
(8) 갑진년조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平穰▨▨▨▨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 斬殺無數.
영락 14년 갑진년, 그럼에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의 경계로 침입하였다. --- 적과 만나 왕의 본대가 요처를 끊고 소탕하니 왜구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베어 죽인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글자 삭제
石城 앞 지워진 5글자는 고구려의 강역을 알려줄 가능성이 있어 지웠고, 나머지 지워진 글자는 경자년조와 정미년조의 삭제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지웠다.
(9) 정미년조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殺蕩盡 所穫鎧鉀 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城.
영락 17년 정미년, 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후연)을 치게 하셨다. --- 맞붙어 싸워 참살해 소탕하였다.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군수물자와 병기는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과 루성을 격파하였다. ---
글자 삭제
전반부 삭제된 글자들은 407년의 후연 정복을 숨기기 위해 삭제되었고, 후반부 삭제된 글자들은 韓 지역 백제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삭제되었다. 일제·중제·강단 유사사학은 후반부 백제 공격을 이유로 전반부 후연 정복을 부인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복
407년 이전 후연은 혼군의 전횡으로 망할 시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나라를 광개토대왕이 정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고구려와 400년 이래 계속하여 전쟁 중이었으므로,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 정미년 기사 전반부는 공격 대상이 지워졌지만 후연으로 추측할 수 있다. 407년 기사는 400년 기사 다음으로 많이 지워졌다. 영정하 남쪽 보정시부터 호타하까지의 지명이 나타나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은 407년 후연을 정벌하고 위와의 완충지역을 남겨두기 위해 위성국인 북연을 건국시키고 돌아왔다.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는데, 요해는 요하 즉 중역수 북쪽의 유주와 중역수 남쪽의 평주를 의미하므로, 이는 위가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후연 정벌의 명분이 기재되지 않고 간략히 전과만 언급된 것은 후연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벌하더라도 왕실은 살려 놓는 것이 천자의 도리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위성국 북연을 세워 스스로 천자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407년 전쟁의 주된 목적은 후연 정벌이고, 백제 공격은 고구려군이 귀환하면서 수행한 부수적인 것이었다.
고구려 초대 유주자사 진
고구려의 후연 정복은 유주자사 진의 묘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연군은 후연의 용성으로 추정되고 대군은 태행산맥 서쪽이다. 따라서 이 13군은 하북성에서는 북쪽은 영정하, 남쪽은 당하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산서성에서는 대까지를 영역으로 한다. 통역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한 407년에는 현지인을 태수로 임명하였고, 鎭이 첫 유주자사임을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鎭이 후연의 유주자사였다고 주장하나, 진이 국소대형이라는 고구려의 것이 분명한 관직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주장이다. 또한 후연의 유주자사가 이들 13군을 관할한다면, 후연 영토의 대부분 즉 호타하에서 당하까지를 제외한 후연의 모든 영토를 관할하는 것이 되므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鎭의 관직명 중 중국의 것이 많아서 고구려의 유주자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말대로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은 중국의 관작을 받았으므로 다 중국의 관료여야 한다. 고구려와 중국 왕조 사이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중국 왕조가 고구려의 왕과 고구려 왕이 추천한 관료에게 중국의 관작을 수여하는 것이 상례였고, 현지인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적당한 관작을 요구하여 받았을 것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태수래조도 묵서에서 유주부의 위치를 고구려의 국도가 아닌 洛陽에서 2300리라 기술하여 진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나, ‘州治廣薊 今治燕國 (유주부는 넓은 계 지역을 관할하였으나, 지금은 연국을 모두 관할한다)’라는 문구가 진이 고구려인임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문구는, 서진 이후 유주가 薊를 중심으로 중역수 북쪽만을 관할로 하였지만,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한 후에는 유주부가 서진의 유주는 물론 평주까지를 관할하였음을 의미한다. 낙양에서의 거리를 기록한 것은, 지금 영국이 정한 위도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전쟁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고구려의 지리정보를 비밀로 유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는 초기 영정하까지 회복한 후 그 남쪽으로는 크게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일시적으로라도 거의 정복했던 연을 무너뜨리고 새로 그 영토를 점령했으니 고구려인들은 크게 기뻐했을 것이고, 초대 유주자사가 된 진이나 그의 후손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덤에 진이 업무했던 상황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강단 유사사학은 鎭의 관작이 허구였고 내조도(來朝圖)도 鎭의 상상이나 희망사항이라 주장하기도 하나,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처럼 남들도 쉽게 날조를 일삼는 줄 안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가 나타나는 경우 그들의 상투적 반응은 그것이 날조라 억지쓰는 것이다.
덕흥리고분 묵서명은 “永樂十八年 太歲在무신(戊申)년, 12월 신유(辛酉)달, 25일 을유(乙酉)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옥구를 옮겼다”라 하는데 당시 晉의 역법에 의하면 12월 1일은 辛酉가 아니라 庚申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묘지명 기록자의 단순한 착오라 주장하나, 유력자 묘지명을 적으면서 달의 간지에 착오가 있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 해의 간지인 戊申, 12월의 간지(그 달 1일의 간지)인 辛酉, 날의 간지인 乙酉를 명시했다는 것은 간지를 고려하여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날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쪽 벽에 ‘太歲在己酉二月二日辛酉成關此墪戶大吉吏’(己酉年 2월 2일 辛酉日에 완성하여 이 무덤의 문을 닫았으니 크게 길하리라)라 하여 무덤을 닫은 날을 명시하면서도 간지를 부기하고 있는데 역시 간지를 고려하여 택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택일에 간지를 고려했다면 기록자의 착오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12월 1일의 간지가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 역법이 있었던 증거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인이 3년상을 치렀으므로 鎭이 407년의 유주자사가 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으나, 3년상은 사망 후 3년째 길일을 택하여 매장하는 것이므로 매장완료일인 409년 2월 2일로 사망일을 판단할 수는 없다. 409년에 매장을 하였다면 사망일은 407년의 어느 시점도 가능하다. 鎭은 고구려의 첫 유주자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노구에도 격무를 이어가다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매장일을 이유로 鎭의 유주자사 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태수래조도가 370년 전연이 망했을 때의 상황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로 인정되고 있으며 고구려가 전반적으로 백제에 밀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타당성이 없다.
(10) 경술년조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城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예로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으나,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왕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 토벌하셨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성과 온 나라가 놀라 --- 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이에 군사를 돌려 돌아오셨다. 또 그들 중 왕의 교화에 감복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들은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무릇 공파한 성이 64개요, 촌이 1,400개였다.
글자 삭제
정미년조 후반부 삭제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3면 6행 하단 7자와 7행 하단 3자를 삭제하였다. 3면 6행 하단 7자는 당시 부여의 위치가 몽골 지역임을 표시하여 삭제하였을 수도 있다.
(11) 수묘인
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亐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訾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卌三, ▨谷二家爲看烟, ▨城二家爲看烟, 安夫連廿二家爲看烟, ▨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句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 古須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二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瑑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彡穰城廿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句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
수묘인 연호는 다음과 같다. 매구여 민은 국연 2, 간연 3. 동해고 민은 국연 3, 간연 5. 돈성 민은 4가 모두 간연, 우성 1가 간연, 비리성 2가 국연, 평양성 민은 국연 1, 간연 10. 자련 2가 간연. 배루 민은 국연 1, 간연 43. ▨곡 2가 간연. ▨성 2가 간연. 안부련 22가 간연. ▨곡 3가 간연. 신성 3가 간연. 남소성 1가 국연. 새로 들어온 韓과 穢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 국연 1, 간연 1. 모루성 2가 간연. 두비압잠의 韓 5가 간연. 구모객두 2가 간연. 구저의 韓 1가 간연. 사추성의 한·예 국연 3, 간연 21. 고수야라성 1가 간연. 경고성 국연 1, 간연 3. 객현의 韓 1가 간연. 아단성과 잡진성은 합해서 10가 간연. 파노성의 韓 9가 간연. 구모로성 4가 간연. 각모로성 2가 간연. 모수성 3가 간연. 간▨리성 국연 1, 간연 3. 미추성 국연 1, 간연 7. 야리성 3가 간연. 두노성 국연 1, 간연 2. 오리성 국연 2, 간연 8. 수추성 국연 2, 간연 5. 백잔 남쪽에 거주하는 韓 국연 1, 간연 5. 태산한성 6가 간연. 농매성 국연 1, 간연 7. 윤노성 국연 2, 간연 22. 고모루성 국연 2, 간연 8. 전성 국연 1, 간연 8. 미성 6가 간연. 취자성 5가 간연 삼양성 24가 간연. 산나성 1가 국연. 나단성: 1가 간연. 구모성 1가 간연. 어리성 8가 간연. 비리성 3가 간연. 세성 3가 간연.
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洒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廿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卅看烟三百, 都合三百卅家.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살아계실 때 “祖王과 선왕들께서는 단지 멀고 가까운 곳의 구민들만 데려다가 묘를 지키고 청소하게 하셨으나, 나는 구민들이 점차 피폐해질까 염려된다. 내가 죽은 후에는, 내가 몸소 순행하며 데려온 韓穢만을 수묘자로 정하여 청소에 대비하게 하라.”라고 교시하셨다. 교시가 이러하므로, 그 교령 대로 한·예 220가구를 뽑았다. 그러나 이들이 수묘의 법도를 모를까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구를 뽑았다. 신·구 수묘호를 합치니, 국연이 30, 간연이 300, 도합 330가이다.
위로 祖王과 선왕 이래로 묘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에 착오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모든 祖王과 선왕들의 묘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하셨다. 또한 제도를 만드시기를, “수묘인을 지금 이후로는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고 비록 부유한 자가 있더라도 또한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라.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파는 자는 형벌에 처하고, 사는 자는 수묘하도록 강제하라” 하셨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학 기초 낭독 5 (0) | 2026.04.11 |
|---|---|
| 한국학 기초 낭독 4 (0) | 2026.04.11 |
| 한국사 기초 낭독 2 (1) | 2026.04.11 |
| 한국학 기초 낭독 1 (0) | 2026.04.10 |
| 도이장가 해독 (0) | 2026.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