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

역사회복 2026. 4. 11. 09:51

https://www.youtube.com/watch?v=PRKHQaAsLgs

 

Ⅱ. 환국 신시국 청구국

 

1. 환국과 신시국의 건국

 

한국인 = 동이족의 기원지는 한반도

한반도는 마지막 빙하기에 동토지대에 접한 북방한계선 지역이었고, 동아시아 최대의 석회암동굴 밀집지역이어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한반도에서는 12,000년 전에 농업혁명이 시작되어 한강유역에서는 BCE 6,000년에서 BCE 5,000년 사이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벼를 재배하였다.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의 마티너 로비츠 등은 요서지역의 BCE 7,000년에서 BCE 5,000년전 사이의 기장 농업인으로부터 한국어가 속한 트랜스유라시어어가 발원되었고, 황하 중상류의 유전자나 언어가 요서지역 문명의 유전자나 언어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이들 한반도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파악하지 못하였다. 한반도에서 북쪽으로의 초기 이주자는 수가 적고, 요서지역이 다시 추워지면서 신시국의 요서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의 수가 더 많아, 초기 이주를 파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오류이다. 그들이 말하는 기장 농업인은 한반도 농업혁명 이후 한반도에서 요서로의 이주민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기원지에 관한 소설

강단 유사사학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東夷족은 중국의 서북부에서 수렵생활을 하다가 동으로 이동하여 산동반도로 이동한 민족이고, 이들 중 다시 동으로 나와 만주·한반도 일대에 분포한 이들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 주장하여 우리 민족의 기원지가 한반도임을 부정하는 소설을 창작한다. 그들은 동이의 기원에 대해 막연히 중국 서북부의 원시인을 상정하는데, 근거는 전혀 없다.

이들이 우리 민족의 이동에 관해 실제와 정반대의 소설을 작성하는 이유는 홍산문화나 하가점문화 등 요하문명의 역사와 중국 동부의 청구국, 번한, 번조선의 역사를 우리 민족과 구별되는 동이족의 것으로 만들어 중국에 귀속시키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일제 조선총독부의 지령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요하문명이 황하문명보다 시기가 빠르며, 황하문명도 양사영의 삼첩층이론에 따르면 동이 즉 우리 민족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우리 민족이 이동하여 원주민을 지배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음은 고고학이 증명하고 있다. 중국 내 독자적인 원주민의 문화는 없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면 조선총독부에 대한 불충이 되므로 강단 유사사학은 기를 쓰고 동이가 우리 민족이 아니고 요하문명도 우리 민족과 무관하다고 억지를 쓴다.

 

환국의 건국

한반도에서 농업혁명이 발생한 후 기온이 오르면서, 북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평야가 넓은 소남산 지역[흑룡강성 쌍압산시(雙鴨山市) 요하현(饒河縣) 소재]에서 환국을 건국하였다. 소남산문화 2기(BCE 7200-6600) 유적에서 최초로 옥기가 대규모로 발견되었다. 옥기의 제작을 위해선 계급의 분화가 필수적이므로, 옥기는 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증명한다. 소남산문화의 시기는 신시국 이전, 역년이 3301년인 환국이 있었다는 『조대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삼국유사』의 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환국은 실재하였다. 『삼국유사』엔 昔有桓國이 기재되어 있다. 일제 유사사학은 囯을 因으로 날조하였는데, 누가 봐도 날조되었음을 알 수 있음에도, 강단 사이비들은 昔有桓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파른본에 囯이 아니라 ‘□안 士’로 적혀 있고, 이 글자가 중국 불경에서 因의 이체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거란문자에서 ‘□안 士’은 囯이었다. 팔만대장경 판각 시 송본, 국본(초조대장경), 거란본을 참고하였다. 따라서 파른본 외에는 囯이 사용되었다면 ‘□안 士’은 囯을 의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삼국유사』 「이계복본」은 파른본의 國자와 ‘□안 士’자를 모두 囯으로 표시하고 있다.

환국으로 보는 경우 주석 ‘謂帝釋也’가 문제된다. 그런데 남구만의 『약천집』과 이종휘의 『수산집』은, 그들이 본 『삼국유사』에는 ‘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이라고 적혀있었다고 기술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삼국유사』 원문은 昔有桓‘□안 士’帝釋庶子桓雄이었는데, ‘□안 士’을 因으로 이해한 사람이 帝釋을 주석으로 보고 謂帝釋也로 변경 기록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신시국의 건국

신시국의 건국은 조선의 역사설화에 기술되어 있다. 환인이 지배하는 환국에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집단이 환국을 떠나, 들이 넓은 요서지역의 곰집단을 정복하고, 신시국(배달국)을 건국하였다. 이들은 발달된 농업기술(풍백 우사 운사)을 가지고 왔다. 범집단(예=왜)은 신시국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은 주로 어로활동에 가장 유리한 지역인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어귀 부근의 바닷가에서 어업을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내륙의 신시국에 복종할 필요가 없었고, 신시국도 농경지가 적은 바닷가의 왜집단을 정복할 이득이 크지 않았다.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

조선의 역사설화에 나오는 천부인 세 개는 환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은, 환국을 승계한 요동과 한반도의 정치체가 아니라, 신시국으로 이전되어 조선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포함된 것이다.

조선은 방사천리의 대국이었으므로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중앙에서 임명한 제후(모한과 번한)와 제후가 관할하는 70여 소국 수장들에게 천부인(다뉴조문경, 동검, 옥)을 수여하였다. 소국의 수장은 이를 받음으로써 중앙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와 중앙의 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지방민들은 천부인을 받은 수장 뒤에는 중앙정부가 있으므로 수장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된다. 소국의 수장이 중앙의 천부인 수여를 거부한다면 중앙은 전쟁을 통해 수장을 교체했을 것이다. 당시의 최고 기술로 만들어진 천부인은 지방민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기능도 했을 것이다. 어떻든 조선 조정의 지방 통제 방식이 천부인이었으므로 조선인들은 역사설화에 천부인 이야기를 삽입하였을 것이다.

 

소위 단군신화는 구술된 역사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조선의 역사설화를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로서 그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다고, 근거없이 주장한다. 문자가 없던 시대 문학은 집단의식의 산물로서 특정 학자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으로서 여러 세대에 되풀이해서 입으로 전달되는 특성이 있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틀을 취한다. 민중의 동의 특히 나이 들어 경험을 축적한 기성세대의 동의가 없는 이야기는 후세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야기가 기억하기 쉽게 단순화되거나 변형되더라도 이야기의 내용이 변하지는 않는다. 조선의 역사설화는 민중이 동의하고 인정한, 조선 민중 스스로 구술로 기술한 조선의 역사이다. 설화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적 사실성이 인정되는 것도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역사설화가 객관적 증거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 설화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된다.

 

조선 건국설화의 사실성

환국, 신시국, 조선에 관한 역사설화는 소남산문화,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로 증명된다. 요하 동쪽과 한반도의 신석기 매장 양식은 적석묘, 지석묘(고인돌)로 발전한다. 소남산문화 2기(BCE 7200-6600)에서 다단적석묘가 발견된다.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같은 유형의 다단적석묘는 BCE 3,500년∼BCE 3,000년의 것이다. 옥기도 홍산문화 후기(BCE 3500∼BCE 3000)에 이르러 겨우 환국문화권인 길림성·흑룡강 지구(BCE 5500년∼BCE 3500년)와 비슷한 형태의 옥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여 점차 숫자가 많아졌으며 편박인변 기법도 나온다.

홍산문화 지역에서 곰 조각상과 환국의 토템인 새 조각상이 동시에 출토되는데, 이는 신시국이 환집단과 곰집단의 연합체라는 조선의 역사설화를 실증한다.

『삼성기전』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 「신시본기」는 신시국(배달국)이 BCE 3,897년 건국하여 1,565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대는 홍산문화 시기인 BCE 4,500 ~ BCE 3,000과 대체적으로 부합한다.

정경희는 백두산 서편의 천평문화를 신시국의 문화로 보나 천평문화는 환국문화이다. 요하 서쪽 홍산문화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요하를 경계로 환국문화와 홍산문화(환집단과 곰집단 연합체)가 병립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백두산이 홍산문화의 영역이었다면 고인돌이 나타나지 않아야 하지만 요하 동쪽에는 많은 고인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시국은 처음부터 요하를 건너가서 성립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 건국설화에 청구국이 나오지 않는 이유

정경희는 홍산문화를 청구국의 문화로 본다. 그러나 청구국은 BCE 3,000년경 기후변화로 홍산문화 지역이 추워져서 신시국인들이 중국 동부로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다. 청구국이 홍산 지역에 있었다면 치우는 황제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고, 치우총 등 치우의 유적이 산동성에 있을 수도 없다.

조선을 세운 단군은 신시국 영역인 요서에서 일어나 환국과 청구국을 통일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신시국의 정통성이 바로 조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 청구국은 조선에 정복당한 나라였을 뿐이다.

 

 

 

 

 

 

 

 

[요서지역 문화의 연대]

1. 신석기시대 소하서문화 (小河西文化: BCE 7000 ~ BCE 6500)
2. 신석기시대 흥륭와문화(興隆注文化: BCE 6200 ~ BCE 5200)
3. 신석기시대 부하문화(富河文化: BCE 5200 ~ BCE 5000)
4. 신석기시대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BCE 5000 ~ BCE 4400)
5. 홍산문화(紅山文化: BCE 4500 ~ BCE 3000)
- 전기(BCE 4500 ~ BCE 3500) - 신석기시대, 초기 국가단계
- 후기(BCE 3500 ~ BCE 3000) - 동석병용시대, 초급 문명사회
6. 동석병용시대 소하연문화 (小河治文化: BCE 3000 ~ BCE 2000)
= 후홍산문화
7. 청동기시대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E 2300 ~ BCE 1600): 고급 문명사회
8. 청동기시대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BCE 1200 ~ BCE 500): 비파형동검 출현

 

[요서지역 문화의 지역적 범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환국, 신시국, 청구국]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는 BCE를 의미함.

 

 

2. 청구국의 건국

 

한국인이 중국 원주민을 지배하면서 중국 문명이 시작됨

환국과 신시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문명상태에 있었으므로, 계속하여 주변 지역으로 과잉인구가 이주하였다. 과잉인구는 풍년이 계속되다 흉년이 드는 경우 발생한다. 환국과 신시국 과잉인구의 주류는 중국으로 이주하였지만, 일부는 수메르로 이동하여 수메르문명을 남겼고, 일부는 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문명을 이루었다. 중제 유사사학은 동이족과 대적할 만한 가공의 중국족 인물이나 문화를 만들어내려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천 년 이상 앞선 요동 요서 한반도의 문명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석기문화는 모두 요동 요서 한반도로부터의 이주민이 만든 문화이다. 소위 삼황오제도 환국과 신시국에서 중국으로의 이주집단이다. 낙빈기도 청동기 금문의 해석을 통해 중국 고대전설의 오제는 모두 동이족이라고 하였다. 중국과 가까운 신시국인들의 남하와 환국인들의 요동반도를 통한 이주가 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주민들은 그들만의 국가를 만들기도, 원주민들에게 농업기술을 전수하며 지배하는 국가를 만들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마천은 동이족이 중국사의 시작임을 알고는, 중국주의자로서 진실을 쓸 수가 없었다. 『사기』에서 삼황의 첫째인 복희와 오제의 시작인 소호가 동이족인 것이 명백하므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삼황과 소호를 제거하고, 오제의 시작을 동이족이라 널리 알려진 치우와 싸운 황제로 날조하였다.

 

중국 왕조의 지배층은 거의 한국인

중국의 지배층은 유사 이래 거의 전부 동이족이었다. 중국이 문화적으로 우월해진 전국시대 이후에도 그러하였는데, 그 이전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나라 유방이나 명나라 주원장처럼 한미한 출신의 왕은 그 출신을 밝히기 어려워 중국족으로 추정될 뿐이다. 중국이 동이의 나라가 되지 않은 것은 수가 많다는 이유 단 하나이다. 과거에는 대중매체가 없어 말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인 동이족이 피지배자인 중국족의 언어에 동화되었을 뿐이다.

 

치우의 청구국 건국

홍산문화는 BCE 3천년에 갑자기 소멸되는데, 이는 기후가 급변하여 농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주하지 않았던 홍산문화인은 홍산문화를 계승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퇴락한 면모의 소하연문화를 남겼고, 요남으로 이주한 이들은 소주산 상층문화(BCE 2,900∼BCE 2,000)를 남겼는데, 다단 적석총이 크게 퇴조된 모습이었다. 일부는 중국 북쪽과 서쪽으로 이주하여 목축과 수렵을 하게 되며 이들이 견융이나 흉노의 선조가 된다. 신시국의 주류는 산동성 쪽으로 남하하였다. 이들이 치우로 대표되는 집단이다. 이들은 먼저 이동하여 정착하고 있었던 동이족인 삼황집단과 한정된 농경지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고, 새 이주민들이 정착할 정도로 승리하여 청구국을 만들었다. 청구국은 후기 대문구문화로 입증된다.

사마천은 황제가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날조한다. 이러한 날조는 중국인들에게도 통하지 않아 중국인들은 치우를 군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군신으로 추앙되었다는 것은 치우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겼다는 것이다. 신시국 이주민은 삼황집단을 이기고 보정에서 양자강 북쪽까지 동부를 다 차지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도 치우는 10년 동안 헌원과 73회 싸워 이겼으며 예주, 탁록과 회대 지역까지 확보하여 3백 년 간 전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치우가 이겨서 양자강 북쪽까지 중국 동부를 차지하였다고 보아야 치우를 군신으로 추앙했던 것이 가능하다. 또 치우가 확보한 지역이 조선의 번한이 되는데,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삼한이 방사천리이며 남쪽이 왜와 접한다고 기술하는 것과도 일치한다.

 

3. 범집단(=예=왜)의 이주

 

왜는 우리 민족

한민족은 한맥예로 구성되었다. 한은 한반도에서 기원한 집단이고, 맥예도 한반도에서 이주한 집단이므로 종족적 차이는 없다. 조선의 역사설화에 의하면 새집단(한)과 곰집단(맥)은 함께 신시국을 만드는데, 범집단(예=왜)은 신시국에 참여하지 않는다. 왜는 주로 어로활동에 가장 유리한 지역인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어귀 부근의 바닷가에서 어업을 위주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내륙의 신시국에 복종할 필요가 없었고, 신시국도 농경지가 적은 바닷가의 왜집단을 정복할 이득이 크지 않았다.

왜집단은 신시국의 남부 해안가인 당산지역의 바닷가(조백하에서 난하까지 여러 강들의 어귀), 요동반도 바닷가(대능하에서 復州강까지 여러 강들이 요동만으로 흐른다), 황하 어귀, 양자강 어귀에 살고 있었고, 후에는 영산강과 열도로까지 이주하였다. 열도의 지역명이 왜가 된 것은 어업을 한 왜집단이 가장 먼저 구주 북부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예가 북만주, 두만강, 연해주 등지로 이동한 것으로 보는데 이곳은 강어귀의 해안가가 아니어서 왜가 정착할 수 없다.

양자강 어귀의 왜는 『사기』 「오태백 세가」와 「월왕구천 세가」에서 오와 월의 주민이라 기술되는데 문신을 하고 단발을 하였다. 『삼국지』는 회계의 왜가 바다 짐승을 피하기 위해 문신을 하였고, 나중에는 장식 삼아 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韓의 남쪽이 倭와 접경하며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고 한다. 이는 단군조선(삼한조선) 시 번한이 양자강 왜와 접하였다는 말이다. 즉 양자강 왜는 단군조선에 속하지 않았고 그 외의 왜집단은 단군조선의 주민이 되었다. 이는 새(한집단)가 곰(맥집단)과 호랑이(예=왜집단)를 아우르는 많은 유물에 의해 확인된다. 삼조선 시기 양자강 왜는, 일부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주민으로 되고, 일부는 번조선의 주민으로서 해양무역에 종사하였다가 백제의 주민으로 된다.

대부여 시 당산 지역의 왜는 예맥조선의 주민이었고, 韓(황하 동쪽 제수 북족)의 왜는 진번조선의 주민이었다. 석탈해의 昔은 뜻이 예(옛)이다. 즉 석탈해는 예의 탈해란 의미다. 『삼국사』에 탈해는 다파나국 출신인데 다파나국은 왜국 동북 천리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은 황하 어귀의 왜이고,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의 왜이다. 황하 어귀의 왜는 BCE 128년에 漢에 투항한 예군 남려의 왜이다.

전라도왜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전한 후 육지에서 신라를 침공하는 왜이다. 이들은 3세기 초 신라·가야와 싸웠던 포상팔국이기도 하다. 포상(浦上)은 강어귀의 마을이란 뜻이므로 포상팔국의 포상은 영산강과 섬진강을 의미한다. 전라도왜는 399년 신라에 항복한 후 403년 이후 열도의 나라(奈良)로 보내져 고구려 위성국의 주민이 된다. 일제 유사사학은 오사카와 나라에 3세기부터 가공의 야마토왜(大倭) 왕조가 있었다고 날조한다.

 

왜=예

지금까지 예와 왜를 다르다고 보았다. 그러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에 漢 말에 공손씨가 낙랑군을 차지하고 韓濊를 공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韓과 濊를 공격하여 倭와 韓이 대방에 속하였다고 한다. 즉 예와 왜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1527년 간행된 『훈몽자회』도 倭자를 설명하며 뜻은 ‘예’이고 음은 와라고 설명한다. 1617년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는 倭를 ‘예’로 해석하고 있다. 즉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倭의 음은 왜가 아닌 와였고 뜻은 ‘예’집단 즉 지금 우리가 말하는 왜집단이다. 양주동도 혜성가 해독에서 倭를 ‘예’나 ‘녜’로 읽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이 예의 위치를 한반도 동해안이라고 소설을 쓰며, 왜와 예는 전혀 별개인 것처럼 말하지만 예와 왜는 같은 말이다.

 

집단명과 지역명으로서의 왜를 구별해야 한다

왜는 집단명과 열도를 뜻하는 지역명으로 동시에 쓰여 왔다. 그러나 집단명인 왜와 지역명인 왜는 완전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한맥예의 일원인 왜(예)집단은 한과 맥처럼 우리 역사 강역에 고루 퍼져 있었다. 열도의 역사는 왜집단의 역사가 아니다. 열도의 역사는 한반도 이주민의 역사이며, 한맥왜 모두가 열도로 이주하였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야마토왜 왕국은 없었다. 백제 주민인 전라도왜가 전쟁포로로서 열도의 고구려 위성국에 보내졌고, 이들이 수가 많아 대왜라 불렸다. 이들은 피지배민이었다. 열도에서 왜집단은 소수에 불과하여 열도의 권력을 차지한 적이 없다. 열도가 왜로 불리게 된 것은 어업집단인 왜가 소규모이더라도 가장 먼저 구주 북부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열도를 왜집단만이 살았던 지역이고 왜와 예는 다르다고 하면서 왜집단과 열도를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하는 것이 낙랑군 평양설보다 더 큰 우리 역사에 대한 날조이다. 왜집단과 열도의 고대 역사는 모두 우리의 역사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혼동

『삼국지』와 『후한서』는 예를 왜와 나누어 서술한다. 황하 어귀의 왜와 당산 해안가 왜 등 왜인들도 농경을 하면서 주위의 농경민과 비슷하게 되어 진수와 범엽이 책에서 본 문신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왜와 다르게 보였기 때문에, 진수와 범엽은 이들을 예로 보고 왜와 다른 집단으로 오해하였다.

진수와 범엽은 집단명 왜와 지역명 왜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왜의 위치와 가야계 마을국가인 야마대국(야마일국)을 기술할 때는 왜 지역을 기술하고 문신 설명 등 왜집단의 특성을 기술할 때는 양자강의 왜집단을 기술하고 있다.

4. 고인돌 집단의 이주

과거 북한의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BCE 2,500년경부터 고인돌이 등장한다. 대동강문화론이 발표된 이후 북한은 고인돌 연대의 상한을 BCE 4천년기 후반으로 인식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이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BCE 24∼23세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북한의 최근 연구를 인정한다면 천평지역의 다단 적석묘가 BCE 4,000년∼BCE 3,500년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인돌과 다단 적석묘가 공존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고인돌 집단의 경우 이동경로를 쉽게 알 수 있다. 고인돌집단은 요동반도에서 산동반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요동반도, 산동성, 절강성, 복건성을 따라 고인돌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고인돌 집단은 동남아를 거쳐 인도남부에 이르러 타밀인이 된다. 산동성에서 북쪽으로 간 이들은 고인돌이 있는 나라인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고대 타밀인은 한국인

일각에서는 타밀족과 우리와의 유사성은 고대 인도에서 한국으로 사람이나 문물이 이동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이 추론은 성립할 수 없다. 인도에서 거석유적은 BCE 2000년까지 올라가지만 대부분의 것은 BCE 1500년부터 BCE 500년 사이의 것이다. 인도 남부 타밀라두 지역에서 대형 옹관묘가 고인돌이나 석곽묘와 함께 나타나는데, 옹관묘를 남긴 이들은 양자강왜 중 인도 남부로 진출한 왜집단이고, 고인돌이나 석관묘는 왜를 따라 간 韓과 맥이다. 타밀라두 주의 대형 옹관묘는 타밀 고전문학에서 묘사된 장례와 일치하며, 이들 유적의 주체는 쌀, 밀, 보리, 기장, 완두콩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한 인도 최초의 문명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선 BCE 6,000년에서 BCE 5,000년 사이에 벼를 재배하였고 고인돌이 시작되는 시기를 늦춰 잡아도 BCE 2,500년경이다. 따라서 한반도인이 인도의 타밀로 이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톨카피얌은 한국어로 쓰여 있다

무엇보다 톨카피얌 등 타밀인의 고대문학이 한국어 문법으로 읽어야 해독된다는 것이 한반도에서 타밀로의 이주의 결정적 증거이다. 타밀인들은 벌써 11세기에 톨카피얌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주변 인도유럽어족의 영향으로 고대어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다른 어족의 영향없이 고대문법을 유지하여 단어의 뜻만 알면 고대 타밀문학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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