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갈석산, 연나라, 요수의 위치 비정
삼조선기를 서술하기에 앞서 갈석산, 연나라, 요수의 위치를 비정해야 한다. 역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인간의 행위를 기술하는 것인데, 강단 유사사학이 위치를 왜곡하여 한국사를 날조하였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에 대항하는 실증적 연구자들도 1차 사료에 근거한 엄밀한 위치 고증에 소홀하여 올바른 역사를 기술하는 데 실패하였다.
(1) 갈석산의 위치
갈석산의 위치에 관한 1차 사료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ㄱ) 『상서(尙書)』 「하서(夏書) 우공」
- 도이는 가죽옷을,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가져온다.
- 물을 견산(岍山)에서 인도하여 기산(岐山)을 거쳐 형산(荊山)에 이르게 하고, 황하를 건너선, 호구산(壺口山)과 뇌수산(雷首山)의 물은 태악(太岳)에 이르게 하고, 지주산(底柱山)과 석성산(析城山)의 물은 왕옥산(王屋山)에 이르게 하고, 태행산(太行山)과 항산(恒山)의 물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게 하여 바다에 들어가게 했다.
(ㄴ) 『회남자』
- 「시칙훈」,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곳에 이른다. 그곳은 부목의 땅이고, 푸른 땅 수목의 벌판이고, 태호 구망이 다스리는 땅이고, 12,000리이다.
- 「인간훈」, 진시황이 『녹도錄圖』를 들고 거기 적혀 있는 글을 보니, 진나라를 망칠 자는 호胡라 적혀 있었다. 그로 인하여 군졸 50만 명을 동원하여 몽공과 양옹자로 하여금 장성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서쪽은 사막과 이어지고 북쪽은 요수와 부딪히며 동쪽은 조선에서 끝난다.
(ㄷ) 『사기』
- 「효무본기(孝武本紀)」, (태산에서 봉선 후) 주상이 이에 마침내 떠났다. 황하를 따라 북쪽으로 갈석산에 이르렀다. 요서부터 순수해서 북쪽의 변방을 지나 구원에 이르렀다.
- 「화식열전(貨殖列傳)」, 대체로 연 역시 발해와 갈석산 사이의 도회지이다.
- 「몽염열전」,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을 거느리고 북으로 융적을 내쫓고, 하남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을 활용하고, 만들어진 험한 요새를 이용하였다.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 리였다.
- 「몽염열전」 장성의 위치(요동)에 대한 『사기정의』의 주: 요동군은 요수의 동쪽에 있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고, 서남쪽으로 해변에 이르렀다.
(ㄹ) 『한서』 「지리지」
계(薊)는 남쪽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와 통하며, 발해와 갈석산 사이의 한 도회지이다. [안사고는 “계현(薊縣)은 연나라가 도읍한 곳이다. 勃은 발해이다. 碣은 갈석산이다”라고 말한다]
(ㅁ)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ㅂ) 『수경주』 「하수」에 대한 주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장성을 쌓게 하여, 임조에서 갈석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그 성이다
(ㅅ) 『무경총요』 「邊防, 定州路」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으로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이다. 秦나라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 하였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으로 20리에 안숙군이 있고, 서쪽으로 10리에 장성이 있다. 남쪽으로 15리에 안숙군이 있고, 서남쪽으로 약 90리에 북평군이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에 북역주가 있다.
(ㅇ) 『기주협우갈석도』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바치려면, 고수 역수 탁수 요수로부터 바다로 간 후, 서쪽으로 대하를 올라가서 멀리 기주의 도읍지에 도달한다. 이 때 구하(황하)가 바다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어, 갈석을 의지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황하 수류 변동과 발해만 해안선 변화]
[황하 수류 변동과 발해만 해안선 변화]
『상서』 인용 부분 첫 번째는 도이가 가죽옷을 팔러 올 때 황하를 통해 배로 가져오는데, 황하로 들어올 때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갈석산은 황하 입구에 있어야 한다. 이는 『기주협우갈석도』에 의해 재차 입증된다. 난하니, 요하니, 대동강이니의 어귀엔 갈석산이 없다. 난하나 요하나 대동강으로 올라가서 중국인들에게 가죽옷을 어떻게 팔고 기주에서는 공물을 어떻게 바칠 것인가? BCE 시기에는 발해가 태행산맥 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황하도 보정시쪽을 지나 발해로 빠져나갔다.
『상서』 인용 부분 두 번째는 우가 치수를 하는데 황하 상류에서부터 시작하여 갈석산이 있는 황하 어귀까지 물을 잘 통하게 했다는 것이다. 역시 물이 갈석산에서 바다에 들어간다. 우가 치수를 하면 우가 다스리는 지역을 흐르는 황하를 치수하는 것이 당연하고, 난하나 요하나 대동강을 치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상서』에 의해 갈석산은 당시의 황하 어귀에서 보이는 보정시의 낭아산으로 추측할 수 있고, 『회남자』에 의해 조선과 연의 경계도 황하의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사기』 「효무본기」에 의하면, 예맥조선 정복 전인 BCE 110년, 유철은 영토를 순행하며 갈석산을 지나갔는데, 황하를 따라 북쪽으로 갈석에 이르렀다. 갈석산은 당시 요수였던 중역수 상류 부근에 있었다. 당시 요서군은 중역수 상류에 있었다. 갈석산이 당시 한나라의 동북방 변경이었으므로 유철은 갈석산에서 즉 요서군에서부터 서쪽으로 북쪽 변경을 따라 구원으로 갔다. 강단 유사사학은 갈석산이 평안도에 있다고 하는데, 유철이 황하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북부에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석산 난하설의 무근거성
그런데 황하 갈석산이 조선과 중국의 경계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사기』 「몽염열전」에서 요동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하여, 진장성의 끝인 요동의 갈석산이 조선과 중국의 경계인데, 이 경계는 난하 부근이라 주장한다.
요는 연나라 서쪽의 산서성에 있는 움푹 파인 지형의 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중국인의 수도에서 먼 변방의 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산동성과 하북성 지역이 자주 요동으로 지칭되었으므로, 황하의 갈석산이 요동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장성 끝이 요동이라는 말도 요수 동쪽에 장성 끝이 있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송나라 때 만든 『우적도』에도 ‘요(遼)’가 산서성에 표기되어 있어, 하북성은 모두 요동이 된다.
[『우적도』가 표시하는 요]
또한 북경에서 산해관까지의 장성은 진장성이 아니라 명장성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난하의 갈석산이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은 고구려가 망한 이후이다. 당산 지역이 당산이 된 것이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이다. 어떻게 영토도 아닌 곳에 지명을 붙일 수 있겠는가? 요하니 대동강이니의 갈석산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한서』 「지리지」와 『사기』 「화식열전」에 의하면 연나라의 수도였던 계(薊)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인데, 난하 갈석산과 바다 사이에는 도회지가 있을 공간이 없다. 중제 유사사학과 난하설을 비롯한 재야 유사사학은 계(薊)를 북경이나 천진으로 보는데, 북경이나 천진은 부근에 갈석산이 없어 절대로 『한서』 「지리지」가 말하는 계(薊)가 될 수 없다.
난하설은 「기주협우갈석도」의 신빙성을 의심하는데, 황하의 수류 변경과 발해만 해안선의 변화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이 「기주협우갈석도」의 신뢰성을 입증한다. 즉 「기주협우갈석도」에는 사구(笥溝)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최근의 과학적 연구에서 가장 육지가 많이 늘어난 지역과 일치한다. 따라서 「기주협우갈석도」에 표시된 어양과 우북평의 위치가 타당하고, 난하설이 주장하는 당산 지역의 어양과 우북평은 그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한나라의 유주는 서진이 유주와 평주로 분할하였다. 유주(幽州)의 幽는 가장 멀고 구석진 곳이라는 의미이다. 즉 유주는 서진의 중심에서 가장 먼 구석진 곳의 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중제·강단·재야 유사사학은 유주보다 더 먼 평주를 가정하고 서진의 평주였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창려군 현도군이 유주보다 더 서진의 중심에서 멀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유주의 의미만 알아도 그들의 주장은 소설임이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난하 갈석산설은 강단 유사사학의 ‘삼한퐁당’이라는 한마디 공격에 와해되며, 『삼국사』와 모순되어 결과적으로 『삼국사』를 불신하게 된다. 난하 갈석산설은 강단 유사사학에 대항해 오며 강단 유사사학의 날조를 드러낸 공로는 있으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울 수는 없는 견해이므로 한시바삐 폐기해야 한다.
요수 동쪽의 장성은 요동외요
물론 『사기정의』와 『괄지지』가 기술하듯이 요수 동쪽에 이른 장성은 있다. 장새가 당시의 요수인 조백하를 약간 넘어가서 동쪽에 이르렀다. 이는 요동외요의 끝이다. 『사기정의』가 명확히 하는 바와 같이, 장성(요동외요)이 요수에 닿고, 서남쪽으로 가서 장성이 해변에 닿는다. 즉 요수에서는 장성이 바다에 이르지 않고, 서남쪽의 본 장성이 황하 갈석산(낭아산)에서 해변에 닿는다. 『회남자』 「인간훈」도 동일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요동외요와 본 장성이 있어, 혼동이 생길 수 있으나, 장성이 요수에 닿는다는 말, 갈석산에서 장성이 시작된다는 말, 장성의 끝이 요동이라는 말 모두 맞는 말이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장성이 시작되는 곳은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다. 『태강지리지』와 『무경총요』에 의해 낙랑군 수성현과 광신군 수성현이 같은 곳임이 증명되고, 『무경총요』가 기술하는 宋의 광신군 수성현은 금·원·명·청 시대에도 ‘수성’이라는 지명이 유지되다가 현대에 보정시 서수현(徐水縣)이 되었다. 보정시 서수현 수성 일대에 장성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보정시의 장성과 북경 위쪽의 요동외요 사이가 상하장이다. 위 아래로 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성의 끝 부분에 있고 바닷가에 있는 갈석산은 황하 갈석산 단 하나 뿐이다. 요동외요의 끝에 갈석산이 있다는 사료는 없으며, 요동외요는 바닷가와는 멀다.
기타 갈석산들
『전국책』과 『사기』 「소진열전」에서 소진이 연문후에게 말하는 갈석산은 상산군 구문현 갈석산으로 황하 어귀의 갈석산과는 다른 산이다. 진번조선은 연의 북쪽과 연의 동쪽에 있었는데, 구문현 갈석산은 연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서, 동쪽 진번조선과 경계이고 황하 어귀의 갈석산은 연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서, 북쪽의 진번조선과 경계이다. 요서 임유현 남쪽 물 속에 있다는 갈석산은 역시 황하가 이동하였음을 모르고 산이 바닷속에 가라앉았다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산동성 무체현 갈석산은 64m의 산인데 황하가 이동하였음에도 황하 어귀의 산이라는 이유로 갈석산이라 하나, 역시 우리 역사와는 무관하다.
좌갈석은 창작된 산
두우(杜佑)는 황하 옆의 갈석산과 장성이 시작되는 낙랑군의 갈석산을 분리하여 전자는 우갈석, 후자는 좌갈석이라 하였다. 황하의 수류가 보정시에서 무체현 쪽으로 변경되고 해수면이 낮아져 보정시가 황하와 바다에서 분리된 후 옛 사람들은 보정시의 낭아산이 갈석산인 줄 알 수 없었다. 두우는 당시의 황하 옆 갈석산인 무체현 갈석산에서 장성이 시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황하 옆 바닷가 갈석산과 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을 분리하여, 황하가 흐르고 있었던 무체현 갈석산을 우갈석으로 보고, 낙랑군을 고구려 요양으로 간주하는 당시의 잘못된 역사지리 인식에 따라 고구려 평양(요양) 부근의 어떤 산을 좌갈석으로 보았다. 즉 좌갈석은 날조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산으로 전혀 근거가 없고, 오해와 침략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연진장성]
A: 장성의 시작점인 수성현, 연나라 때 발해가 이 지점 부근까지 들어왔다.
진개5군: B: 상곡군, C: 요동군, E: 요서군, F: 어양군, G: 우북평군
A∼B: 요동고새
B∼C: 요동외요, C 지점에서 당시의 요수(조백하)와 만난다. C 부근에는 높은 산이 있을 수가 없고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漢은 요동외요와 조백하 남쪽을 포기하고 요동고새 앞 패수(영정하)로 후퇴하여 어양과 우북평만 유지한다. 상곡군의 조양(沮陽)에서 요동군 양평까지 연이 쌓으려 한 장성이고, 몽염이 연의 장성을 보완해서 요동외요를 완성한다.
가: 낭아산, 나: 백석산
A∼B∼D∼: 진장성
동북공정의 공작 결과인 난하설
난하 갈석산설은 동북공정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난하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난하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고유가 말하는 요수는 중역수이다. 무엇보다도 갈석산에 대해 주장하려면, 요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 윤내현은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지 않는다. 담기양의 공작 명령에 의해 고홍장(高洪章)과 동보서(董寶瑞)가 제작한 글을 인용하고 책 뒤에 번역본을 첨부하기만 한다. 고홍장과 동보서는, 담기양이 1976년에 제작 발표한 「碣石考」에서 ‘碣石溣海說’을 부정하고 옛 갈석산을 창려현 갈석산으로 본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갈석논해설은 갈석산이 물에 잠겼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진짜 갈석산은 일부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담기양은 황하 갈석산 즉 보정시 낭아산이 갈석산이 되는 경우 북경이 명대를 제외하고 유사 이래 동이의 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난하 갈석산설을 날조했다. 고홍장과 동보서가 담기양을 지원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碣石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尙書』 「禹貢」의 기록은 상당히 정확하다. “견산과 기산을 지나 형산에 이르고 --- 太行山脈과 恒山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禹貢」 <도산>에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산맥의 형세로 보아 갈석은 당연히 태행·항산 양대 산맥과 연결되고 그 형세가 이 산맥들과 상응하는 높은 산봉우리였을 것이다. 항산은 상산이라고도 부르는데(西漢 때 文帝 劉恒의 諱를 피하여 常山이라 고쳤다.) 태행산맥의 북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燕山山脈과 連接되어 있다. 그리고 갈석산은 연산의 주봉이 발해 연안으로 뻗어나가 돌출한 支脈이다. 따라서 “太行山脈과 恒山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중국 북부의 이 지역 일대에 있는 전체 산세의 방형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이 「禹貢」의 기록은 『新唐書』 「地理志」 <嬀州> 懷川郡 懷戎縣조에 “동남쪽 50리에 거용새가 있고 동쪽으로는 노룡·갈석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은 태행산맥·상산에 속하여 있으니 실로 天下의 險地이다.”라는 기록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거용새는 바로 거용관인데 그곳은 서쪽으로는 太行山脈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연산의 여러 봉우리(여기서 말하는 盧龍은 당연히 盧龍塞인데 바로 燕山山脈의 능선이다.)와 연결된다. 이로써 일찍이 2000여 년 이전의 갈석산은 바로 渤海 北岸에 있었던 하나의 유명한 큰 산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홍장과 동보서는 「우공」 원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연산산맥을 첨부한다. 태행산맥이 산세가 연산산맥과 연결되어 있으니 연산산맥 끝인 창려 갈석산이 「우공」에서 말한 갈석산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불쌍할 뿐이다. 먹고 살려고 사기를 치고 있다.
뒤의 문장은 독자를 더 우울하게 한다. 거용새는 상곡이다. 즉 거용새는 보정시 서북쪽에 있었다. 현재의 거용관은 북경시 서북쪽에 있다. 그들은 거용새의 위치를 속이면서 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주장은 현재의 거용관이 연산산맥에 위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창려 갈석산이 『신당서』 회융현조의 갈석산이라는 것이다. 『신당서』도 연산산맥을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신당서』는 회융현이 동쪽으로 갈석산에 연결되고 동남쪽 50리에 거용새가 있고, 서쪽으로 태행산맥과 접한다고 한다. 그들의 위치 비정을 따를 때, 그들의 주장은 『신당서』의 저자는 직선거리로 300km 넘는 곳에 위치한 창려 갈석산을 회융현 주변 설명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강단 유사학의 뺨을 여러 번 칠 정도의 독창성을 발휘한다. 회융현과 300km가 넘게 떨어진 갈석산이 운명적으로 연결되었던 사실을 그들이 발견했다. 『신당서』 회융현의 설명은 갈석산과 거용새가 가까운 곳에 있음을 말하므로 갈석산은 낭아산이고 거용새는 본고에서 비정한 상곡에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공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우공」 ‘島夷皮服夾右碣石入于河’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碣石에 관한 「禹貢」의 또 다른 기록인 “碣石을 오른쪽으로 끼고 河로 들어간다.”(『史記』 「夏本紀」에서는 “海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禹貢」의 이 구절 앞에는 “冀州, ……島夷皮服”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동일한 구절이 몇 군데 더 보인다. '島夷'는 『史記』 「夏本紀」에 따르면 ‘鳥夷’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鳥夷皮服’은 새를 토템으로 하는 민족이 獸皮를 貢物로 삼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내용을 “碣石을 오른쪽으로 끼고 河로 들어 간다.”는 문구와 연결시켜 볼 때, 冀州에 있었고 獸皮를 貢物로 하였던 鳥夷는 碣石山을 지나 서쪽으로 河口로 들어가서 그들의 都城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지금의 碣石山은 바로 옛 黃河의 河口(대략 지금의 天津市 부근에 있었다.) 동북쪽에 있으므로 “碣石을 오른쪽에 끼고”라는 표현과 부합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陸路나 水路, 특히 광대한 海上을 항해하여 貢物을 바치러 갈 때면 반드시 큰 산을 標準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碣石山은 크고 작은 100여 개의 산봉우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둘레는 사방 수십 리에 달하며 昌黎·盧龍·撫寧 3縣을 포괄하는데 그 主峰인 仙臺頂(속칭 娘娘頂)은 해발 695m로서 渤海 연안의 海陸 교통상 요충지에 해당하는 큰 산이다.
고홍장과 동보서는 조이가 기주에 있는 그들의 도성으로 들어갈 때 천진 부근에 있었던 황하 하구로 들어가며, 창려현의 갈석산은 천진에서 동북쪽이므로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라는 표현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천진과 창려 갈석산은 직선 거리로 250km이다. 250km 떨어진 갈석산을 보고 황하하구로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고대 황하는 천진 방향으로 흘렀을 뿐이고, 발해가 서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보정시 즉 낭아산 부근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갈석산과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들어온 발해의 남쪽에 있었고, 천진은 당시 들어온 발해의 바닷속이나 바다의 북쪽이므로 그들의 주장은 완전한 날조이다. 그들은 거짓말해야 하는 자신들의 불안한 심리를 달래기 위해 ‘더욱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라 말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난하 갈석산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근거도 없고 동북공정 총책에 의해 주장되고 있음에도 재야 유사사학은 난하 갈석산설을 신봉한다. 그들은 학설을 바꾸면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상처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도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난하설의 폐해
난하설에 의하면 강단 유사사학의 말처럼 소위 후삼한이 바닷속에 있게 된다. 즉 난하설은 강단 유사사학처럼 학설이 될 수 없다. 난하설에 따르면 韓을 발견할 수 없다. 韓을 발견하지 못하면 중국 동해안이 통째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신라와 백제의 뿌리가 없어진다. 난하설에 의하면 우리 역사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동북공정 총책이 난하설을 주장하여 북경을 사수하고 있다. 갈석산이 난하에 있으면 중국 동해안의 우리 역사는 사라지고 그 이전의 역사도 연계가 없어져서 사라진다. 『산해경』은 “조선은 열양 즉 대야택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한다. 『산해경』이 기록한 韓을 말살시키는 난하설은 결과적으로는 동북공정이나 야마토가야설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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