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맥조선과 한사군
(1) 예맥조선
『사기』의 예맥조선은 예맥과 조선이 아니고, 열국의 하나인 예맥조선
『사기』 전체에서 예맥조선은 「흉노열전」에 두 번, 「화식열전」에 한 번 나온다. 뒤에 조선이 없는 예맥만 나오는 경우는 없다. 『사기』의 예맥조선을 예맥과 조선이라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위만이 찬탈한 국가가 예맥조선임은 『사기』에 나오는 다음 내용에 의해 알 수 있다.
『사기』 「흉노열전」은 전한과 흉노 사이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BCE 200년 경의 흉노 상황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모든 좌방의 왕과 장수는 동쪽에 위치하여 상곡을 지난 동쪽을 맡아 예맥조선에 접했다”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 『사기』 「조선열전」은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그 부근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진번 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방 수천리였다”라고 한다. 「흉노열전」은 흉노가 예맥조선과 접하고 있다고 하는데, 「조선열전」에선 위만에 복속한 소국에 예맥이나 조선은 없다. 예맥과 조선이 다르다면 흉노와 접한 예맥이, 수천리를 확보했다는 위만에게 복속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위만에게 복속한 예맥은 없다. 위만이 찬탈한 조선이 즉 위만조선 자신이 예맥조선이기 때문이다.
「흉노열전」은 BCE 107년의 상황을 말하면서 “이 때 한은 동쪽으로는 예맥조선을 공격하여 군으로 삼았다”라고 하는데, 漢이 이 즈음에 예맥조선 이외에 예맥을 공격하거나 군으로 삼은 기록은 없으므로 예맥조선을 공격하여 군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사기』 「화식열전」은 연 지역을 경제적 측면에서 말하면서 “북으로 오환과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맥조선과 진번의 이익을 통괄한다”라고 한다. 오환과 부여가 북쪽에 있다고 하므로 漢이 예맥조선을 멸하고 요동외요까지 진출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동으로 예맥조선이 있다는 것은 예맥조선의 잔여 세력이 나라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맥조선과 漢 간 전쟁의 원인
위만은 漢과 불가침 협정을 맺고 그 부근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예맥조선은 漢과 맞닿아 있어 漢 동북방의 유일한 무역창구가 되었다. 당시 ‘흉노’와 漢은 적대적이었으므로 무역을 위한 물리적 통로가 예맥조선밖에 없었다. 황하로 가기 위해서도 당시 연안으로 항해해야 하는 항해기술상 예맥조선의 해변을 통과해야만 했다. 漢은 안정기에 접어든 후 상업이 발달하였고 예맥조선에 대한 무역금지조치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맥조선은 북부여와 漢의 사이에서 막대한 무역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북부여가 불만을 표출하여 漢도 漢과 북부여가 나눠가져야 할 무역의 이익을 예맥조선이 중간에서 가로채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조한전쟁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예맥조선은 漢나라 북동쪽에 있었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예맥조선 왕검성과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그들 유사사학은 대동강(청천강설과 압록강설도 있음)이 조한전쟁 시의 패수이고 漢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아버지 쓰다는 「패수고」를 “浿水라는 이름은 史記 朝鮮傳에 漢初 古朝鮮의 北境으로 기록되고”라 하며 시작한다. 그런데 『사기』 「조선열전」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古朝鮮’에 관한 기술은 없으며, 고조선의 ‘북경’ 즉 예맥조선의 북쪽 경계가 패수라는 말도 없다.
「조선열전」의 조선은 예맥조선(소위 위만조선)이다. 쓰다는 예맥조선 이전의 역사는 없으며, 예맥조선은 한반도에 있어서 중국과의 경계는 북쪽이라는 전제를 설정하고 시작한다. 이러한 전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쓰다는 『사기』에 전혀 없는 말을 『사기』에 있다고 사기친다.
『사기』 「흉노열전」은 BCE 200년 경의 흉노상황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모든 좌방의 왕과 장수는 동쪽에 위치하여 상곡을 지난 동쪽을 맡아 예맥조선에 접했다”라고 한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도주하였으며, 진·한 교체기에 예맥조선에 중국으로부터 망명자들이 모여들자 준왕은 이들을 서부에 살게 하였으며, 위만도 서쪽에 거주하게 해주면 서쪽을 지키는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예맥조선이 한반도 내라면 서쪽을 지킨다는 것은 바다를 지킨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상곡은 지금의 래원현(涞源縣)으로 흉노가 상곡을 지난 동쪽에서 예맥조선과 접했다는 말은 래원현 동쪽의 태행산맥을 경계로 흉노와 예맥조선이 접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맥조선과 한은 패수(영정하)를 경계로 한의 동북쪽에 예맥조선이 있었다. 흉노의 동쪽에서 예맥조선이 접하고, 漢은 흉노의 남쪽이므로, 구체적 위치를 어떻게 보든 漢이 예맥조선의 북쪽과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漢의 동북쪽에 예맥조선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이 사료와 완전히 상반되게, 漢이 예맥조선 북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예맥조선 왕검성이 한반도 평양이었다고 사기치기 위해서이다.
(2) 예맥조선 왕검성에는 요동군이 설치되었다
왕검성에는 낙랑군이 아니라 요동군이 설치되었음이 사료에 의해 명백하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억지를 쓴다. 이러한 억지가 통하여 강단에 반대한다고 하는 재야까지도 대부분이 왕검성=낙랑군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사료를 토대로 사실을 따져보자.
『한서』 「지리지」 요동군 險瀆에 대한 주석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응소는, “조선왕 만(滿)의 도읍이다. 물이 험하게 흐르므로 험독(險瀆)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은 (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냥 원래 검독이다.”라고 하였다. 나 안사고(『한서』의 주석 집대성자)는, “신찬의 설이 맞다. 패(浿)는 음이 보(普)와 대(大)의 반절이다.”라 말한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검독현에 대해, 후한말 사람인 응소는 조선왕 만의 도읍이었으며, 물이 급하게 흘러서 지명이 험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서진 사람인 신찬은 검독현이라는 명칭이 강이 흐르는 양태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7세기에 『한서』의 주석을 집대성한 안사고는 신찬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셋 모두 요동군 검독현이 왕검성 자리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강단 유사사학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만조선」 해설은, 신찬이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료 날조하기에 불과하다. 신찬은 요동군에 있는 왕검성의 위치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라 말한 것이지, 왕검성의 위치가 낙랑군이라 말한 것은 아니다. 신찬과 안사고가 응소에 반대한 것은 검독현의 지명 유래에 대한 것이다.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은 (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냥 원래 검독이다.”라고 말했다. 신찬의 말은 모두 검독현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었다’는 낙랑군에 대한 말이고, ‘이곳은 (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냥 원래 검독이다’는 검독현에 대한 말이 될 수 있는가? 만약 신찬의 생각이 왕검성의 위치가 낙랑군이라는 것이었다면, 신찬의 말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의 낙랑군에 있었다. 이곳은 (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냥 원래 검독이다.”가 되는데, ‘이곳’이 분명하게 검독현을 지칭하고 있으므로 앞에 낙랑군이 나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신찬의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었다’는 말은, 검독현의 왕검성터는 낙랑군 패수 동쪽 지역이라는 말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요동군 검독현 주석에서 낙랑군 패수 동쪽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 즉 낙랑군 패수 동쪽의 요동군 검독현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며 왕검성 자리가 요동군 검독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응소 신찬 안사고 모두 왕검성에 요동군을 설치하였다고 말한 점에서 차이는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속이기 위해 고의로 오역하여 대중을 속이려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는 신찬의 견해를 “왕검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으니, 이는 자연히 검독이 된다.”라고 번역한다. 전혀 말이 되지 않게 번역을 하며 원문을 무시한다. 패수 동쪽에 있으니 검독이 된다는 그들의 심오한 사고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으며 원문 어디에 이런 말이 있는가? 원문대로 해석하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왕검성이 낙랑군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으므로 원문을 날조하여 앞 문장을 원인으로 뒷 문장을 결과라고 말하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고 말 자체가 성립하지도 않는다. 오역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대중에게 진실을 은폐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王險城은 浿水 以東 秦故空地 以南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漢書』 「地理志」의 樂浪郡 朝鮮縣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사기색은』에서 王險城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 『史記集解』에서 徐廣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遼東의 險瀆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분명하다’가 근거이고 반대되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가 근거이다. 그들의 실질적 근거는 조선총독부의 교시이므로 그들에게 사료와 논리적 근거는 무의미하다. 그들의 행태는 조선총독부 교시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충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 都王險에 대한 주석
【集解】 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 【索隱】 韋昭云「古邑名」。徐廣曰「昌黎有險瀆縣」。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集解】 서광은, “창려에 있는 검독현이다.”라고 하였다. 【索隱】 위소는, “옛 읍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서광은, “창려에 있는 검독현이다.”라고 하였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검독현이고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고 하였다.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서광(352-425)은 왕검성이 창려군이 되었다고 한다. 『사기색은』 응소의 주석은 『한서』 「지리지」 응소의 주석과 동일하며, 신찬의 말도 『한서』 「지리지」 신찬의 주석과 동일하다. 여기에서도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증거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사기』 「조선열전」 朝鮮에 대한 주석
【正義】 潮仙二音。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本漢樂浪郡王險城,又古云朝鮮地也。」
[【正義】 潮仙이라고도 발음한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의 왕검성이며, 또한 예부터 조선 땅이라고 하였다."]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주장의 유일한 근거이다. 그러나 『괄지지』는 7세기 중엽에 편찬된 책이므로 낙랑군이 요동에 설치되었다는 후한의 응소, 서진의 신찬, 동진과 유송의 서광의 견해와 비교하면 그 사료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 7세기 초반 안사고의 견해와 비교하여도 그 사료가치가 떨어진다.
유철은 ‘예맥조선을 정복하고 왕검성 주민들을 이주시켜 낙랑군을 설치했다’. 사람들은 간단히 말하기 위해 ‘왕검성 주민들을 이주시켜’를 생략하고 ‘예맥조선을 정복하고 낙랑군을 설치했다’라고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응소 신찬 서광 안사고 등은 왕검성에는 요동군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수와 당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구려가 원래 한나라가 정복한 땅이었다고 주장하며 거짓을 퍼뜨렸다. 즉 한나라가 왕검성을 정복하고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으며, 당시의 고구려 평양이 원래 한나라의 낙랑군이었으므로 수나 당이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민중들을 세뇌시켰다.
안사고와 같은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거짓임을 알았지만, 이세민의 넷째 아들로 위왕(魏王)에 책봉된 이태(李泰)가 주편한 『괄지지』는 수·당의 침략적 이데올로기를 고양하기 위해 거짓임을 알면서도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는 거짓과 그 낙랑군이 당시의 고구려 평양이라는 또 다른 거짓을 모두 수록하였을 것이다. 5세기에 편찬된 배인의 『사기집해』는 물론이고, 8세기에 편찬된 사마정의 『사기색은』도 개인적 역사 서술이어서 이런 거짓을 수록하지 않았지만, 당 정부와 밀접한 관련 하에 편찬된 『사기정의』는 당 정부가 날조한 거짓인 『괄지지』의 거짓 기사를 수록하였다. 따라서 『괄지지』나 『사기정의』를 근거로 한,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신찬의 생각
신찬은 왜 왕검성이 낙락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요동군 검독현에 있었다고 하였는가?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은 교치되었다. 중국 왕조는 가장 먼 강을 요하라 부르고 요하의 동쪽을 요동군, 서쪽을 요서군, 북쪽 지역을 현도군이라 하였다. 한나라가 예맥조선을 멸한 후 조백하를 요하라 하였다. 당시 요동 요서 현도군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예맥조선 침략 후 漢의 동북 국경]
고구려는 요동 오환으로서 한나라의 부용세력으로 건국하였다. 신나라 때 왕망이 유리왕을 죽이자, 고구려는 독립하였고, 요동고새까지 영토화하였다. 후한 초기인 CE 37년 대무신왕은 요동고새를 넘어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유수는 후한을 안정시킨 후인 CE 44년 낙랑군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고 살수 이남까지 차지하였다. 살수는 어양과 우북평 북쪽에 있는 예맥조선의 패수 즉 영정하로 추정된다.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군에서의 1승 1패 후 고구려와 후한의 국경은 과거 예맥조선과 漢의 국경으로 돌아갔다. 후한 시 요하는 중역수이다. 후한은 요서, 요동, 현도군을 교치하여 그들이 영토를 상실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들 군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후한의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의 위치]
왕검성은 조백하의 동쪽이었다. 조백하도 조선인들은 패수로 불렀다. 패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유철은 왕검성터를 요동군 검독현으로 만들었다. 신찬은 후한 때 요동군이 교치된 것을 모르고 후한의 요동군 검독현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착각하였다. 그래서 낙랑군 패수 동쪽의 검독현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서광도 비슷한 착각을 하고 있다. 서광은 창려군이 왕검성터였다고 한다. 서광은, 후한 때 검독현이라는 지명이 요동(중역수 하류)에서 요서(중역수 상류)로 이동하면서 요동속국에 소속되고, 요동속국이 서진 때 창려군으로 되자 서진의 창려군이 왕검성터였다고 착각하였다.
어떻든 왕검성터와 낙랑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전한 즉 『한서』 「지리지」 요동군 검독현이 진정한 왕검성터이다. 그 뒤 학자들은 요동군이 교치되고 지명이 이동된 것을 모르고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검독현이라는 지명에 왕검성이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여 왕검성터를 비정하고 있다.
서영수의 더 뛰어난 소설
서영수는 『한서』 주석의, 응소가 滿都라 말한 것은 舊都가 변조된 것이라 주장하며, 『사기색은』 주석의, 응소가 조선왕의 옛 도읍(舊都)이라 한 것이 옳다고 하면서, 요동군 검독현은 예맥조선의 구도로서 요동에 있었고, 예맥조선 멸망 시의 왕검성엔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서영수는 왕검성터가 요동군임이 사서에 의해 명백하므로 일반적인 소설로는 속이기 어렵다고 보아 이동설이라는 새로운 소설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는 말과 ‘조선왕 만의 도읍’이라는 말은 동일한 표현이다. 이것을 다르다고 보면서 소설을 작성하는 것은 최후의 발악에 불과하다. 가공할 억지로 무장된 주장에도 답변하지 않으면 사이비들은 자신들이 맞다고 우길 것이다. 그래서 다음을 첨부한다.
『한서』 주석이 변조된 증거는 없다. 『사기색은』의 저자인 사마정보다 『한서』의 주석을 집대성한 안사고가 100년이나 이른 시기의 사람이며, 안사고도 당대의 대학자이다. 강단 유사사학 종사자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조선총독부 소설에 위협이 되는 사서는 위서이고 변조된 것이고 오자이다. 이런 억지가 학문이면 개똥은 불로약이고 고양이똥은 불사약이다.
모든 사서는 예맥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서쪽에 거주하게 했고, 위만도 예맥조선의 서쪽을 지키는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한다. 즉 예맥조선의 고도와 위만의 왕검성의 위치를 비교하면 예맥조선의 고도는 위만의 왕검성에 비해 동쪽에 있어야 한다. 즉 위만의 왕검성이 예맥조선의 고도(요동)에 비해 더 동쪽(평양)에 있는 서영수의 소설은 성립할 수 없다.
서영수는 강단 유사사학이 속일 때 항상 하는 표현인 ‘전승’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요동군의 險讀이 조선의 옛 도읍이라는 전승이 남아 있어서’ 응소가 검독을 예맥조선의 구도라 하였다고 한다. 예맥조선의 아주 오래된 전승이 중국인 학자의 귀에 들어갈 리도 만무하며, 그의 주장을 증명하는 실질적 증거는 전무하다. 강단 유사사학이 ‘전승’이라 떠벌리면 속이는 중이라고 파악하면 100% 정확하다. 그들이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을 때 하는 최후의 발악이 ‘전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써도 낙랑군이 원래의 漢나라 영토인 요동고새 남쪽에 설치되었으므로 궤변은 어떤 효과도 발휘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을 입증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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