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17

역사회복 2026. 4. 12. 09:13

https://youtu.be/0c378UMxT94

 

(3) 낙랑군은 원래의 漢나라 영토 내에 설치되었다

 

왕검성 주민들은 원래의 漢나라 영토로 이주되었다

낙랑군은 왕검성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원래의 한나라 영토에 설치되었다. 재야와 강단의 유사사학들은 한결같이 왕검성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왕검성에는 요동군이 설치되었다.

漢은 요동고새 너머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예맥조선과의 경계로 하였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 예맥조선으로 들어갔다. 섭하도 비왕장을 죽이고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즉 요동고새 너머 패수가 있고 패수 건너에 왕검성이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에는 요동고새가 있다.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도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다고 한다. 『상서』에 의하면, 갈석산은 황하 어귀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사기』도 황하 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며 연 지역이 발해와 갈석 사이라 한다. 『기주협우갈석도』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한다. BCE 시기에는 발해가 태행산맥 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황하도 보정시쪽을 지나 발해로 빠져나갔다. 즉 BCE 시기에는 보정시에 황하에서부터 태행산맥까지의 짧은 거리만 요새를 쌓으면 북방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 요새가 요동고새이고, 그 북쪽 영정하가 패수였다. 조선인들은 거주지를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다. 따라서 패수 동쪽의 예맥조선 영토 내에 있는 왕검성과 요동고새가 있는 낙랑군이 같은 위치일 수는 없다.

요동고새와 패수 사이는 어양과 우북평이다. 즉 어양과 우북평이 漢 동북방의 국경도시이다. 이는 『사기』 「흉노열전」의 “그해 겨울, 흉노는 자주 변경으로 들어와 약탈했는데 어양군의 피해가 심하였다. 그래서 漢은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는 기사, “漢은 박망후와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우북평에서 나가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하게 했다”는 기사, “그 다음 해, 흉노가 수만 기병으로 우북평과 정양을 침범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유철이 보낸 누선장군 양복이 왕검성을 치기 위해 열구에 도달하였는데 열구는 『기주협우갈석도』 어양군 옹노현 옆에 그려진 넓게 퍼진 물줄기(사구)의 하구이다. 패수도 열구 약간 북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로 들어가면 예맥조선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요동고새는 어양과 우북평 남쪽이므로 낙랑군도 어양과 우북평의 남쪽이다. 왕검성은 우북평의 북쪽이므로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는 다르다. 왕검성에 갈석산이나 요동고새가 있을 수 없다. 漢은 왕검성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요동고새 남쪽 즉 원래부터 漢의 영역인 곳으로 이주시켜 낙랑군을 만들었다. 秦도 회수와 사수의 조선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러한 이주정책은 토착세력을 약화시켜 점령지를 실효지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낙랑군에도 패수가 있는데 이는 예맥조선의 패수와는 다른 강이다. 조선인들은 거주지 주변에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으므로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낙랑군으로 이주된 사람들이 낙랑군으로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을 것이다.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 비교]

 

 

유주가 평주보다 멀어야 한다

한나라의 유주는 서진이 유주와 평주로 분할하였다. 유주(幽州)의 幽는 가장 멀고 구석진 곳이라는 의미이다. 즉 유주는 서진의 중심에서 가장 먼 구석진 곳의 주라는 말이다. 평주는 평야 지대의 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중제·강단 유사사학은 서진의 평주였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창려군 현도군을 유주보다 더 먼 곳에 비정한다. 그들은 북경 부근은 유주라 하고,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평주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평주라 하는 곳은 평야 지대도 아니고 서진의 중심부에서 가장 먼 지역이다. 결코 그들이 말하는 지역이 평주가 될 수 없다. 유주의 의미만 알아도 그들의 주장이 소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강단에 반대한다는 재야의 난하설도 유주와 평주의 의미를 모르고 그 위치를 잘못 비정하고 있다. 난하설은 난하 동쪽이 낙랑군이라 하며 북경 부근이 유주라고 한다. 그들이 평주를 구체적으로 어디로 비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낙랑군을 유주보다 먼 곳으로 비정한다는 점에서 강단 유사사학과 동일하게 낙랑군의 위치를 잘못 비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이다

혹시 사이비들이 「군국지」를 근거로 억지를 부릴 수도 있을 것 같아 「군국지」에 대해 기술한다. 『후한서』 志 30권은 범엽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 6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양나라 사람인 류소가 서진 사람인 사마표가 쓴 『後漢書』 8편을 기반으로 보결한 것이다. 물론 사마표나 류소가 쓴 「군국지」는 위서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현존하는 「군국지」는 漢이 설치한 낙랑군을 고구려 평양(요양)이라 주장하기 위해 변조된 것이어서 위서이다. 중국인들은 407년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하여 낙랑군이 고구려의 영토가 된 후, 낙랑군이 고구려 평양(요양)이라 사기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서진이 평주로 소속시키는 요동군은 3600리, 현도군은 4000리, 낙랑군은 5000리이고, 서진이 유주로 소속시키는 어양군은 2000리, 대군은 3200리, 우북평군은 2300리이다. 즉 현재의 유사사학처럼 평주가 되는 곳을 유주가 되는 곳보다 멀다고 하므로 이들 평주가 되는 곳의 거리는 모두 변조된 것이다.

현존하는 「군국지」는 낙양에서 낙랑군이 5천리라 하는데, 이는 『후한서』 「동이열전」이 낙랑 변경에서 구야한국까지가 7천여리라 하는 것과 모순된다. 사마표가 3세기 말에 활동했던 사람이어서 낙랑군의 위치를 모를 수 없으므로 현재 전하는 「군국지」는 날조된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146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서안평 습격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데, 7세기에 활동하였으며 가장 뛰어난 『후한서』의 주석자로 평가받는 이현은 「군국지」를 근거로 서안평과 대방이 요동군에 속한다고 주석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군국지」는 서안평은 요동군에서, 대방은 낙랑군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현이 본 변조되지 않은 「군국지」와 현재의 「군국지」가 다름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군국지」에 의하면, 요동군의 호수는 6만인데 인구수는 8만이라고 하며, 현도군도 호수는 1,594인데 인구는 43,163이라 한다. 이는 변조 과정에서 실수가 삽입된 것을 의미한다.

「군국지」에는 광양군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광양군만 거리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 자체로 위서임을 의미한다. 한관(漢官)에는 광양군이 2천리라 되어 있는데, 「군국지」는 상곡군이 3200리라 하고, 광양군 조에서 광양군과 상곡군이 세조 시에는 병합되었다고 한다. 2000리 떨어진 광양과 3200리 떨어진 상곡이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 변조자는 상곡군의 거리를 변조했는데, 광양군과 상곡군의 병합 사실을 지울 수 없어 광양군의 거리를 지웠다고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군국지」는 현도군이 고구려 서개마 상은태 고현 후성 요양의 6현이 있다 한다. 전한은 현도군과 진번군의 서개마와 상은태는 실효지배하지 못해서, BCE 82년 진번군을 폐지하고 진번군 고구려현에만 현도군을 설치하였는데, 고구려현은 14년 고구려가 점령한다. 따라서 후한 현도군의 현에 고구려 서개마 상은태가 있을 수 없다. 또한 118년 고구려가 현도군 화려성을 공격하였으나, 「군국지」엔 화려현이 없다.

덕흥리고분 태수래조도에 유주부가 2300리로 씌어 있으므로(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里) 후한과 고구려 유주의 군들은 ±2300리로 보아야 타당하다. 이는 한관(漢官)에 광양군이 2천리라고 한 사실과 부합한다. 낙랑군이 낙양에서 2300리 정도라는 것과 『후한서』 「동이열전」 낙랑군 변경에서 구야한국까지 7천리라는 것을 고려하면, 낙랑군과 대방군이 보정시 부근에 있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군국지」의 유주 각 군의 거리 중, 탁군 1800리, 어양 2000리, 우북평 2300리는 변조되지 않았을 수 있지만, 대군 2500리, 상곡군 3200리, 요동속국 3260리, 요서군 3300리, 요동군 3600리, 현도군 4000리는 낙랑군 5000리를 만들기 위해 모두 변조된 것이다. 6세기 초 활동한 위(북위)의 역도원(466년경-527년)이 요양이 낙랑군이었다고 생각하고 수경의 패수 설명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을 고려하면 역도원 활동 시보다 이른 시기에 낙랑군이 요양이라는 날조가 행해져 일부 지식인 관료들이 이러한 날조를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도 사료비판 없이 날조된 「군국지」를 수용하여 졸본을 설명하면서 요동군이 낙양으로부터 36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4) 진수가 살아 있을 때의 낙랑군

 

진수(233년-297년) 생존 시 야마대국까지 조위의 관료들이 두 차례나 왕래하였다. 그래서 『삼국지』는 대방군에서 야마대국까지의 거리와 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진수가 기록한 대방군과 韓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진수는 낙랑군이 보정시이고, 韓이 황하 동쪽이고 제수 북쪽의 지역임을 명시하고 있다.

진수는 대방군에서 왜의 북쪽 대안이라고 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표시하고 있고, 그 경로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는데,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北岸]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7천여리이다)

 

歷韓國은 韓國을 지나 간다는 말이다. 7천여리의 처음에서 韓國을 지나치므로 한반도 남부가 韓이라는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이 한 문장만으로도 소설이 된다. 한국을 지나 산동성 봉래에서 섬을 따라 요동반도 대련으로 가서 한반도 해안을 따라 구야한국(김해)에 이르는 길을 진수는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김해까지 7천여리라면 대방군은 황해도가 될 수 없다. 이 때 강단 유사사학의 억지 쓰는 특기가 발동된다.

 

里: 『春秋穀梁傳』을 위시한 고대 중국의 典籍 등에 따르면, 거의 모두 1里는 300步라고 기재되어 있다. 魏의 1尺은 24.5cm로 복원되고 있으므로 1里의 실제 거리는 435m 정도이다. 『三國志』의 道程이나 日程에 관한 전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이 거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하루 평균 육로로 40里, 수로로도 40里를 여행하였다(山尾幸久, 1972:62~70). 한편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000里라고 한 것은 실제 거리가 아니라 郡에서 구야한국까지 여행하는 데 걸린 날짜에 40里를 곱해서 얻은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韓傳〉에서 “方四千里”라고 한 기록과 함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거나 과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황해도에서 김해까지가 7천여리가 될 수 없으므로 여행하는 데 걸린 날짜에 40리를 곱해서 얻은 수치일 가능성이 있다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무한 충성을 다짐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유사사학의 거짓말을 입증하는 사료에 대해선 그들은 항상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이미 논의가 끝난 사안이라느니, 학계의 정설로 되었다느니 한다. 학술적인 논의로 취급 받기 위해선 그러한 방식의 거리 계산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이 경우도 그러한 계산 방식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여야 하는데, 그들은 증거가 없으니 충성맹세만을 한다. 거짓말 자체도 말이 안 된다. 하루에 40리 가면 7천리는 175일 걸리는데, 황해도에서 김해까지 175일 걸린다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

범엽도 “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낙랑군의 변경에서, 그 나라(야마대국)까지는 만이천리이고, 그 서북 이웃인 구야한국까지는 7천여리이다)라고 기술한다. 낙랑군 변경을 대방군이라 한다면 범엽도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천여리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부분을 “낙랑군의 변경에서 그 나라는 만 2천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구야한국에서는 7천여리 떨어져 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의 거리가 7천리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한다. 아주 쉬운 문장이므로 이 번역은 고의적 날조이다. 여기에서 억지가 안 통하는 경우 오역으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실증적’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물론 억지를 써도 효과는 없다. 그들의 놀라운 오역을 그대로 인정해도 대방군에서 김해까지는 5천리가 되므로 여전히 대방군은 황해도일 수 없다. 2천리라도 줄여서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는 그들의 갸륵한 마음에 그 누가 감동하지 않을 것인지?

김해에서 야마대국까지 5천리는 모호하고 부정확하다. 진수와 범엽 모두 김해의 동남방에 야마대국이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야마대국은 삼각연신수경에 의해 기내임이 입증된다. 둘 모두 왜 지역이 양자강왜의 거주지였던 회계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에 의해 실제 사료를 변조하여 야마대국의 위치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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