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낙랑군의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
신뢰성 있는 사료의 내용
강단 유사사학은 낙랑군 패수가 서쪽으로 흐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한다. 그러나 예맥조선과 漢의 국경이었던 패수도, 낙랑군의 패수도 모두 태행산맥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낙랑군의 패수 관련 1차사료는 다음과 같다
『설문해자(說文解字)』 「水部」 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从水貝聲。一曰出浿水縣。
[패: 강이다.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수(水) 부수를 따르고 패 소리이다. 혹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한다.]
『수경(水經)』 浿水,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뢰성 있는 사료에 의하면 낙랑군 패수는 동쪽으로 흐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이비들이 주장하는 근거의 무의미성
사이비들은 역도원의 『수경주』와 『한서』 「지리지」를 낙랑군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역도원의 주장과 『한서』 「지리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도원 『수경주』 浿水, 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故 『地理志』 曰 浿水 西至增地縣 入海.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이유가 없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국도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을 방문하여 물으니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하였다. 패수는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군치였던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 후 서북으로 흐른다. 그래서 『한서』 「지리지」는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한서』 「지리지」 樂浪郡,--- 浿水,水西至增地入海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역도원은 현재의 사이비들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하며 패수의 방향을 말하고 있다. 패수가 동쪽으로 흐르는가 서쪽으로 흐르는가와 패수를 건널 필요와의 관련성은 역도원 머리 속에서만 있는 듯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시의 고구려 수도인 평양은 요양이고(태자하는 요양을 서쪽으로 지난 후 서북으로 흐른다), 요양은 예맥조선 왕검성(유철이 설치한 북경 부근의 요동군)이나 낙랑군(유철이 설치한 보정시의 낙랑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서』 「지리지」도 『후한서』 「군국지」처럼 변조되었다. 「지리지」의 총괄 부분에서 군국이 102개, 현읍이 1,314개, 도가 32개, 후국이 241개, 호는 12,233,062호, 인구는 59,594,978명이라 하는데, 이는 각 군국 소개에 기록된 숫자의 합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개별 군국에서 변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양을 낙랑군으로 만들기 위해, 「군국지」가 거리를 날조한 것처럼, 「지리지」도 낙랑군 강의 흐름을 동에서 서로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407년 후연을 정복하면서 서진의 유주와 평주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비로소 낙랑군 등은 교치되었다. 원래의 낙랑군이 고구려 땅이 되자, 중국인들 입장에선 원래의 낙랑군이 어디였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예맥조선을 정복하고 왕검성 주민들을 이주시켜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말에서 ‘왕검성 주민들을 이주시켜’를 생략하고 ‘예맥조선을 정복하고 낙랑군을 설치했다’라고들 말했는데, 낙랑군이 중국 왕조의 영토였을 때에는 중국인들도 왕검성과 낙랑군이 다른 지역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낙랑군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왕검성터=낙랑군’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중국 왕조는 고구려가 원래 한나라가 정복한 땅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오해에 ‘고구려 평양=왕검성터’라는 새로운 거짓을 추가하여,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민중들을 세뇌시켰다. 이러한 세뇌를 위해 『한서』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는 변조되었을 것이다. 역도원은 변조된 사서들을 보고 『수경』의 패수 기술이 오류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변조된 「지리지」의 낙랑군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고 인정하고, 평양을 낙랑군으로 본다면, 신찬의 ‘왕검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요동군 검독현에 있었다’는 말에 의하여 평양 동쪽에 요동군이 있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래서 사이비들은 신찬의 말을 ‘왕검성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으니, 이는 자연히 검독이 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해석한다. 그들의 행위는 역사 연구가 아니라, 역사 날조이다.
증지현, 역사지리학의 결정적 증거
사이비들은 조작된 사료를 근거로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지리학이 제시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
하북성 중부 지역은 삼각주로서 퇴적물이 쌓이며 육지가 늘어나고, 홍수 시 강줄기가 변하고, 해수면이 계속 내려가는 중이었다. 낙랑군 증지현은 없다가 새로 생겼던 해안가의 땅이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로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는다. 강단 유사사학이 낙랑군 패수로 주장하는, 서쪽으로 흐르는 북한의 강 하구에는 증지현이라는 새로운 육지가 생길 수 없었다. 최근의 황하 수류 변동과 발해만의 해안선 변화에 대한 연구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기주협우갈석도』의 진실성도 입증한다. 『기주협우갈석도』의 어양과 우북평의 위치와 갈석산을 21세기의 과학적 연구가 재확인한다. 갈석산은 낭아산이고, 낙랑군은 보정시임을 역사지리학이 입증하고 있다.
(7)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
중제·일제·강단 유사사학이 사기쳐야만 하는 이유
강단 유사사학은 4세기 전반기에, 평양에 있던 낙랑군과 황해도에 있던 대방군을 고구려가 차지하였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반도에서 요서 지역 등 그들 소설상의 어딘가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 낙랑군과 대방군의 교치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한국인이라면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 할 것이다. ‘낙랑군 교치’라는 말은 중국 역사학자가 하는 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그들의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낙랑군 교치’라는 어려운 중국말을 한다. 그들도 그들의 말이 거짓인 줄 알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고 본질을 말하면 그들의 거짓말이 들통 날까 두려워하고 있다. 소위 낙랑군 교치설은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한, 더욱 치졸한 거짓말이다.
조선총독부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경우 뒤의 역사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없애야 했다. 그래서 찾다찾다 찾은 근거가 『삼국사』 313년 10월 미천왕의 낙랑군 공격 기사, 314년 9월의 대방군 공격 기사, 313년 4월 이전 어느 시점이라 기술된 『자치통감』의, 장통의 모용외로의 귀부 기사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한 사료는 전혀 낙랑군의 이동을 입증하지 못한다.
장통의 모용외로의 귀부
고구려의 313년 10월 낙랑군 침략 기사와 314년 9월 대방군 침략 기사는 말 그대로 침략 기사이지 영토 획득 기사가 아니다.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스럽자 고구려가 요동고새 부근의 낙랑 대방군을 침략하였지만 영토화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영토화한 시기는 후연을 멸한 407년이다. 고구려가 407년에 하북성 중부에 있었던 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영토화하여 초대 유주자사로 진을 파견하였음이 덕흥리고분 묵서명과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조에 의해 입증된다.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는데, 요해는 요하(중역수) 주변의 땅인 요하 북쪽의 유주와 남쪽의 평주를 의미하므로, 이는 위가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자치통감』에서 장통이 모용외에 귀부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늦어도 313년 4월 이전이다. 『자치통감』의 본기사는 왕준(王浚)과 단질육권 모용외에 관한 기사이다. 初 이하는 본기사와 관련된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313년 4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데, 고구려의 낙랑군 공격은 313년 10월이다. 장통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도망갔다면 고구려는 낙랑군을 점령하면 되는데, 포로를 잡아 귀환했다. 이는 모용외의 세력이 강하여 낙랑군을 영토로 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개연성이 있다. 또 『삼국사』에 319년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 단씨, 우문씨와 연합하여 모용외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연합을 와해시키고 최비를 몰아내어 요동을 장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모용외가 320년에 동진으로부터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를, 321년에는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를 제수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모용외가 낙랑군 대방군의 점유자가 됨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은 고구려와 장통은 계속 싸웠으나 어느 한 쪽이 결정적 승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정적 패배를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근거지를 내준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장통이 고구려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까봐 모용외에게 의탁하여 모용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또한 사람이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취급되어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약취하는 것이 관례인 당시 상황에서, 장통이 1천여 가를 이끌고 대동강 남쪽에서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를 지나 요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사람은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끌고 오는 것이 주요 전과인데, 고구려가 1천여 호라는 국가자원이 없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는 것은 강단 유사사학과 같은 유사사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러한 반박이 두려웠는지, 낙랑이 해상으로 요동 산동지역과 왕래하였다는 허위사실을 제시하며 해상을 통한 도주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유사사학이 항상 하는 근거 없는 억지의 반복에 불과하다.
『자치통감』의 기사를 올바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장통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거한 독립적 세력이었는데, 고구려가 장통의 세력이 미약함을 알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합병하려고 장통을 공격하였다. 장통도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여러 해 지속되니 인구가 감소하여 당시 1천여호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자 장통이 독자 세력이어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한 낙랑 주민 왕준(王遵)이, 이러다가는 고구려에 망할 것 같으니, 당시 평판이 좋았던 모용외 밑으로 들어가자고 장통을 설득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이 모용외의 것이 되고, 장통은 독자세력에서 모용외의 지방관리 즉 낙랑태수로 신분이 변동되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강단 사이비들은 장통이 평양에서 사람을 끌고 그들 소설상의 어딘가로 이동하였다고 창작을 한다. 창작 자체도 말이 안 된다. 장통은 313년 4월 이전에 도망갔는데, 고구려는 313년 10월 이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지 않고 포로를 잡아 돌아오기 때문이다.
또 이 기사 자체가 낙랑군 평양설을 부정하고 있다. ‘요동의 장통’이라 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중역수 하류)에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위 『자치통감』의 기사를 ‘요동 출신의 장통’이라 날조하여 해석한다. 사서의 기록을 근거없이 마음대로 편집 왜곡하는 것은 유사학자들이 하는 바로 그 행태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를 탈취할 수 없는 당시 상황
4세기 전반은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영토를 탈취하여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다. 미천왕이 313년부터 315년까지 낙랑 대방 현도군을 공격하였지만, 319년에는 모용외가 공격하자 고구려가 화해를 청하였고, 320년에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331년 이후 고국원왕 시에는 일방적으로 전연에게 당하고 있다. 339년 모용황이 신성을 침공하자 화해를 요청하였고, 342년에는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미천왕의 위패를 탈취 당했으며 왕비 및 왕모 주씨, 그 외 5만여 명이 인질로 잡혀갔고, 343년 왕의 동생을 보내 사죄하고 미천왕의 위패를 돌려 받았다. 343년에는 전연이 두려워 수도를 옮겼다. 345년에는 남소성을 뺏기고, 349년에는 고구려로 망명한 송황을 전연이 무서워 전연으로 다시 보냈고, 결국 355년 전연에 굴복하며 조공관계를 맺고 왕비와 왕모를 귀국시켰다.
4세기 전반 이전까지,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산간에 있는 소국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전연에 핍박 당하는 4세기 전반에 갑자기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 평야지대를 중국으로부터 탈취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진말 혼란기를 틈타 그렇게 하였더라도 전연이 자기들 땅이었다고 바로 뺏어갔을 상황이다. 중국의 혼란기에도 중국 왕조가 유지하고, 서진이 유지한 낙랑군이었다면, 전연은 漢 조위 서진보다 낙랑군과 훨씬 가까운 위치에 세워진 나라였으므로 낙랑군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없다. 서진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겨우 고구려가 정복한 땅이라면, 고구려를 거의 속국화한 전연이 바로 되찾아가는 것이 국제정치의 법칙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400여년간 중국의 영토인 땅을 고구려가 가장 약한 시점에서 중국으로부터 탈취한다는 주장에는 개나 돼지도 속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는 생존 자체를 위해 전연에 굴복해야 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 영토 확장과 확장된 영토의 유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시기 고구려의 한반도 평안도 황해도 탈취설은 당시의 국제정치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국제정치나 외교의 상황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주장하여 현재의 모든 국제정치학 이론을 뒤집어버리는 그들의 가공할 소설 창작력과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은 정말로 끝이 없다.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은 낙랑군 평양설이라는 거짓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더 심각한 거짓일 뿐이다. 낙랑군은 유철이 설치한 이래로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정복한 407년까지 계속 보정시에 있었다.
진정한, 낙랑군 교치의 시기
『진서(晉書)』 「지리지」는 낙랑 대방 현토 요동 창려를 평주라 하며 후한말 공손도 이래 평주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진이 316년에 망하고 동진이 418년까지 존속하였으므로 낙랑군이 이동하였다면 당연히 『진서』에 기록되어야 하나, 낙랑군이나 대방군의 이동은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낙랑군의 교치는 407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407년 후연을 멸한 후, 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을 고구려 유주로 영토화하고, 당하부터 호타하 사이에는 위성국인 북연을 세워 북위와의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고구려의 점령으로 기득권을 상실한 후연 지배층과 그들의 가솔들이 북연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요동 낙랑 대방 현도로 명명하였고 고구려도 이들이 북연의 세력 강화에 일조하여 완충국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주를 묵인하였을 것이다. 즉 북연 영주의 요동 낙랑 대방 현도는 고구려가 점령한 서진 평주의 그것들과는 다른 군이다. 탁발도는 고구려가 후연의 북부를 차지했으므로 후연의 남부는 위가 차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432년 북연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와의 관계상 점령하지는 못하고, 북연을 약화시키기 위해 북연의 영주 주민들을 魏의 유주로 이동시켰다.
魏는 북연을 차지한다고 하여 고구려가 반발하지 않을 거라 확인한 후 436년 북연을 차지하였다. 북연과 魏의 영주 소속 요동·낙랑·대방·현도군은 고구려 유주의 요동·낙랑·대방·현도군 즉 서진의 평주였던 군들과는 다르다. 중국의 사서들이 고구려 영토인 요동·낙랑·대방·현도군과 북연과 魏의 영주 소속의 동명 군들을 혼동하여 기술하는 경우가 많아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고구려는 서진의 평주를 영토화하고 백제의 점령기를 제외하고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으며 당하 남쪽의 영주는 魏 등 북조 국가가 차지하다가 수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는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된 후 고구려가 수를 공격하자 영주총관이 대응한 데서 확인된다.
중국 왕조는 영토를 상실한 경우, 뺏긴 영토가 없는 것처럼 위장한다. 후한은 고구려에 요서 요동 현도를 뺏긴 후 세 군을 영토 내에 다시 설치하고 요수도 변경했다. 후연이 망한 후에도 중국인들은 고구려에 뺏긴 요동·낙랑·대방·현도군의 지명을 유지하고 요수도 중역수에서 보정시 남쪽에서 동서로 흘러 발해로 들어갔던 당하(唐河)로 변경시켰다. 고구려가 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고구려의 유주로 영토화하자 魏는 유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탁발도(세조태무제)가 432년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의 6군 사람 3만가를 유주로 이동시켜 진휼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북연 영주의 사람들을 魏 유주로 이동시켰다는 말로서, 고구려 유주나 유주 소속의 군과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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