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5

역사회복 2026. 4. 13. 19:48

https://youtu.be/KiXYDwTozMo

 

(3) 가야의 건국

 

김수로는 김일제의 후손이고 허황옥은 보주의 타밀인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을 건국하였다가 이 무너지자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김수로는 빠르면 20년대 중반 늦어도 30년대 초반에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42년에 가야를 건국하였다. 김수로왕은 487월 허황옥과 혼인하였다.

허씨집단은 타밀인(인도 남부로 이주한 조선인)으로 남중국과 남인도 사이의 무역에 종사했다. 당시 남인도 타밀인들의 남중국과의 무역경로는 타밀지역과 광동(廣東)및 천주(泉州)의 항구들을 통한 해양루트와 타밀-아쌈-차마고도-중국 남서지역으로 이어지는 깜루쁘(Kamrup)루트가 있었다. 고대의 아쌈은 해로를 통하여 타밀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타밀 상인들이 미얀마를 거쳐서 중국으로 가는 주요 거점이었고 기원 전후 시기 벵갈-델타(Bengal-delta)는 바다였으며, 아쌈은 바다와 직접 닿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주의 위치상 허씨집단은 깜루쁘루트의 육상부분 즉 아쌈-차마고도-보주를 담당한 무역집단으로 보인다. 47년 후한에 대항한 이들을 후한이 양자강변 무한으로 축출하자, 황해를 중심으로 양자강, 황하, 동남아까지 무역을 했던 백제와 접촉하게 되었고, 백제의 중매로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혼인하게 되었다. 김수로왕은 토착세력을 경계하여 토착세력과 혼인하려 하지 않았고, 허씨집단도 근거지에서 쫓겨난 상황이므로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두 집단 모두 후한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연합은 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허황옥은 붉은 색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이 있는 배로 왔는데, 이는 타밀의 배였을 것이고, 백제 사람이 길안내를 하였을 것이다.

 

김알지의 계림국과 김수로의 가야

김수로 김알지의 한반도 이주도 해양상업세력이었던 백제의 정보제공이나 알선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망이 CE 12년 유리왕을 죽였으므로 왕망세력이었던 이들이 고구려를 통하여 한반도로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 신라는 김수로 김알지의 건국 사실을 듣고 한반도 이주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탈해왕은 처음에 가야로 갔다가, 수로왕에게 쫓긴 뒤 바로 계림의 경계로 가는데, 이는 한반도로의 이동 전 가야국과 계림국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김수로보다 김알지가 대구에 먼저 건국하여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 하였다. 가락국기중국은 여러 대를 지났지만, 동국(東國)은 도읍을 나누어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김수로와 김알지가 공동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 동해안 남부에 상륙하여 같이 움직여 김알지의 계림국을 세우고, 김수로 집단은 계림국을 근거지로 하여 낙동강 서편의 소국들을 하나씩 정복하여 가야를 만들어 자립하였을 것이다.

 

김수로는 평화적으로 토착세력을 복속시켰다

수로왕은 직위의 명칭이 농부의 칭호라 하면서 계림의 직제를 취하여 관제를 정비하였다. 수로왕이 관제를 모방한 계림은 신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로와 김알지는 나라를 처음 만들었으나, 신라는 BCE 57년에 건국된 지역의 나라가 이동하였으므로, 관제와 같은 형식적인 면은 가야와 계림국보다 더 정비된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야의 관제 정비는 신라가 국호를 계림으로 변경한 65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수로왕이 관제를 개편하기 전에는 토착세력의 관제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김수로 세력과 토착세력은 전쟁보다는 평화적 교섭을 통해 가야를 건국했을 가능성이 크다. 건국과정에서 전쟁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면 처음부터 김수로 세력이 관제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알 여섯 개가 한 끈으로 내려왔고, 여섯은 때와 행적이 동일하여 형제와 같으며, 가야가 북쪽에서 시작하여 나라의 영토를 넓혔으므로 다섯은 이미 가야의 영토였던 지방으로 돌아가서(), 왕이 아닌 관료인 가 되고 김수로왕은 김해를 수도로 하여 대왕이 되었다. 즉 알에서 나온 다섯은 김수로왕과 권력을 분점하는 관계가 아니라, 김수로왕의 수하 관료이며, 지방관도 토착세력이 아닌 김수로왕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김수로왕과 함께 내려온 것은 수도 지방 구분없이 김수로왕이 직접 다스리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가야의 강역도 6가야가 한꺼번에 기술되고 각 개별 가야의 영역은 표시되지 않는다. 도성도 농번기를 피하여 2년에 걸쳐 건설되었는데 가야민 모두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즉 가야는 건국 당시부터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립하였다. 수로왕이 토착세력의 혼인요구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수로왕의 권력이 그만큼 공고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토착세력이 권력의 분점대상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다만 고녕가야는 다른 가야지역과 분리되어 독립성이 컸으리라 추측된다.

 

강단 유사사학의 근거 없는 사료 부인

강단 유사사학은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 건국 기사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가야를 연맹체로 규정하고, 3-4세기에나 가야 연맹체의 주도 세력이 등장한다고 주장하면서, 고대국가로서의 가야가 CE 42년에 건국되었다는 가락국기의 서술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백승충은 김수로왕의 성씨인 '()'씨가 실질적으로는 진흥왕대 이후에 나타난다고 하면서, 김수로가 실제로 김씨였다는 사실에 회의적 시각을 제시하고, 건국 기사에 등장하는 구지봉에 대해서도, 이를 실제 산이 아니라 거북이 상징하는 바닷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의 건국 기사 날조 해석

그들은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 건국 기사 중 핵심 부분인 구지가(龜旨歌)와 그 전후 서술을 오역하여, 건국 기사를 마치 전설이나 설화에 불과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치부하면서 42년 가야 건국을 부정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禊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강단 유사사학의 해석에선 구지가의 내용이 본문 전체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구지가를 일반적으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로 해석하며, 여기서 머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 곧 수로왕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해석에 따르면, 거북을 향해 강압적 요구(협박)를 하는 내용이 되며, 이는 곧 왕권의 신성성이나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 왕을 내려주는존재에게 위협을 가하는 구조는 시가(詩歌)의 논리적 정합성과 상징성 측면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거북에게 요구하면서도, 거북이 말을 듣지 않으면 구워 먹을 수 있는 상황에선, 거북이 보내 준 왕의 권위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고, 왜 거북에게 왕을 내려 달라고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도대체 구워 먹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 대상이 어떻게 왕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는가? 만약 거북이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협박하는 사람들에게 왜 좋은 왕을 주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말이 안 되는 해석을 한 후, 구지가를 집단적 제의의 맥락에서 사용된 주술적 노래라고 주장하면서, 가야 건국 기사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또한 구지가에 이어지는 以之蹈舞 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咸忻而歌舞에서 以之則是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전혀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이다. 그들은 以之를 전혀 해석하지 않았거나 그리고의 의미로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以之그리고의 의미가 될 수 없다. 그들은 則是그러면으로 해석하는데, ‘則是그러면의 뜻이 담길 수는 없다.

 

가락국기가야 건국 기사의 올바른 해석

위 건국 기사 부분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마침,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에서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 이삼백 명이 구지에 모여 있었는데 사람 소리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며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구간 등이 저희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라고 묻자, “구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새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돼라.’고 하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를 파서 번시의 자리를 만들고 점괘가 무엇이든 점괘가 무엇이든. 그것이 나타나도 따르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아도 따르겠습니다. 복골하고 받들겠습니다.’라고 노래를 불러라. 그리고 점괘를 이유로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것은 대왕을 맞이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춤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 구지가의 해석

龜何龜何 점괘가 무엇이든 점괘가 무엇이든.

首其現也 그것이 나타나도 따르고

若不現也 그것이 나타나지 않아도 따르겠습니다.

燔灼而喫 복골하고 받들겠습니다.

 

구지가의 형식

구지가는 44구의 한시(漢詩)이다. 燔灼而喫也는 없어야 의미가 자연스럽다. 는 어조사(語助辭)로서 ‘~이다, ~느냐?, ~도다, ~구나의 뜻이어서 충성 맹세의 어미로는 부적당하다. 일연도 구지가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를 삽입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마지막 를 없애고 해석한다.

 

세 번의 맹세

龜何龜何는 첫 번째 맹세이다. 는 복골의 점괘이다. 무엇을 의미한다. 따라서 1행은 점괘가 무엇이든, 점괘가 무엇이든, 복종하겠습니다에서 복종하겠습니다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首其現也 若不現也는 두 번째 맹세이다. 은 모두 복종하다의 의미이다. 또한, 역시의 의미이다. 그것인데 문맥상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점괘이다. 따라서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점괘()가 나타나도() 역시() 복종하고() 그 점괘가 나타나지 않아도(不現) 역시() 따르겠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燔灼而喫은 세 번째 맹세이다. 은 희생을 굽는 번시(燔柴)’의 의미이며, 은 구갑(龜甲)에 조짐(兆朕)을 보기 위해 뜨거운 불로 구소(灸燒)’하는 것이다. 燔灼은 복골 의식을 의미한다. 은 수()와 호환되는 글자로 받아들이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燔灼而喫은 형식적으로 복골 의식을 거치고 (점괘의 내용과 상관 없이) 수로왕을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로왕은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맹세하게 하고 있다. 수로왕에게 정통성은 매우 중요하였고, 이삼백 명의 토착 세력 지배층이 함께 모인 것을 기회로 혹시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므로, 수로왕은 이들에게 세 번이나 충성의 맹세를 반복시켰다.

구지가를 위와 같이 해석하는 경우 구지가 전후 부분과 구지가의 문맥이 자연스럽게 통한다. 본고의 해석은 글자의 뜻에 충실하며, 가락국기의 구지가 전후 부분과 문맥이 통하며, 해석 결과에 난해한 내용이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 ‘以之則是의 해석

以之점괘를 이유로로 해석해야 하고, ‘則是즉 이것은으로 以之蹈舞를 부연설명하기 위한 단어이다. 따라서 구지가에 이어지는 以之蹈舞 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咸忻而歌舞[“(그리고) 점괘를 이유로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것은 대왕을 맞이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춤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 가락국기가야 건국 기사의 역사적 사실성

건국 기사를 올바로 해석하면 가야의 건국 과정이 영화처럼 나타난다. 수로왕 세력은 이미 토착 세력의 지배집단은 굴복시켰다. 그러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까지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민중들에게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정통성 있는 지배자임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수로왕은 토착인들의 복골 의식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토착 세력의 지배층은 3월 계욕일에 목욕재계하고 구지에서 복골 의식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 구지(龜旨)복골의 뜻을 의미하므로 복골의 점괘를 보는 곳이다. 복골도 하늘의 뜻을 묻는 의식이므로 구지는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이었을 것이다.

수로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복골 의식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이를 따르도록 했다. 먼저 수로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구지가의 내용이 충성 맹세이다. 충성 맹세를 한 후, 복골 의식을 진행하고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면서 큰 동작으로 춤을 추라고 하였다. 큰 동작으로 춤을 추는 것은 산 아래의 민중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복골의 점괘가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것으로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복골 의식에 모인 이삼백 명의 토착 세력 지배층은 수로왕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수로왕의 건국은,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 단순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중으로부터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과정까지도 기록되어 있다. 시간과 장소와 방법과 등장 인물과 그들이 해야 할 역할까지가 영화처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42년 김수로왕에 의한 가야 건국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야 건국 기사의 역사성을 뒷받침하는 증거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건국 기사 및 허황옥 관련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은 김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출토된 왕망통화(王莽通貨), 즉 신전(新錢)으로 입증된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왕망이 제정한 新錢은 짧은 기간(20년 미만) 통용된 화폐로, 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김해, 남해안, 제주도, 대마도, 일본 규슈 지역 등에서 일정량 확인되는데, 이는 단순한 무역 경로로 설명하기에는 이례적인 분포 양상이다. 오수전은 유철(한 무제) 때 제작되어 이연(당 고조) 시기까지 무려 700년이 넘도록 사용된 최장수 화폐로서, 가장 성공한 화폐로 평가되고 있는데도, 한반도 남부에서는 그 통용 기간 및 발행량에 비해 극히 적은 양이 확인되어 유통기능을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新錢20년도 존속하지 못했고, 건국 이후에도 잇달아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가 정세가 매우 혼란했음에도 거문도 난파선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오수전을 제외하면 오히려 오수전보다 많은 양이 확인된다. 이는 신전의 유통 기간과 정치적 배경을 고려할 때 왕망 정권에 참여했던 김씨 집단의 집단적 이주를 통해 반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문무대왕릉비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문무대왕릉비문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투후 김일제가 가야와 신라 김씨의 조상이 아니며 김씨들이 사기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졸지에 800만 김해 김씨계 성씨들과 600만 경주 김씨계 성씨들은 날조된 조상을 갖게 된다. 생존을 위해,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하거나 저축해 놓은 新錢을 가지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한반도 동남부로 와 가야를 건국하거나 신라와 연합한 김씨 선조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만든 자기부정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들 주장에 근거는 전혀 없다. 단지 초기 가야와 초기 신라를 부정하여 임나 선생님을 영접하고 일제·중제 유사사학에 충성하여 호의호식하려는 강한 열망만이 나타날 뿐이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즉 김수로왕과 김알지(신라 김씨)는 성이 같다. 따라서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을 건국하였다가 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가 한반도로 도피하였다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어려운 때를 피해 멀리까지 갔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사실들을 고려하면 신() 왕조 말기 김일제의 후손들이 많은 양의 新錢을 가지고 한반도 남부로 도피하여, 김수로는 가야를, 김알지는 계림국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불안정한 정권에서 20년도 통용되지 않은 新錢700년 넘게 유통된 오수전보다 한반도 남부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고고학적 자료, 금석문, 문헌이 일치하여 김수로왕의 실존을 뒷받침하고 있으므로 삼국유사건국 기사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강단 유사사학의 상상력

김수로의 실존과 중국에서 김해로의 이동을 부인하고,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강단 유사사학의 입장에서, 낙랑군인 평양보다 한반도 남부에서 新錢이 많이 발굴되는 것은 변명이 필요한 현상이다. 김지희는 나라 시기 낙랑군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이완되었는데, 고구려를 제어하고, 낙랑군을 보호하면서도 견제하기 위해, 이 한반도 남부의 어떤 정치체와 직접 교섭하면서 新錢을 위세품으로 수여하여, 한반도 남부에 新錢이 유입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평양은 낙랑군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김지희의 주장에는 논리가 전혀 없다. 이 자기나라 군현인 낙랑군도 통제하지 못하는데 낙랑군보다 먼 한반도 남부와 교섭한다는 것은 이상하며, 자기나라 군현인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해 외부 세력과 교섭한다는 것도 괴상하며, 자기나라 군현을 보호하면서 견제한다는 말도 모순이며, 그들의 소설에서 낙랑군 남쪽에 있는 낙랑군보다 미약한 세력인 한반도 남부의 정치체를 고구려 제어에 활용한다는 것도 지리적 역학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동전은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원숭이 사회에서나 동전이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낙랑군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新錢에 의해서도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것과 42년 가야 건국을 부정하는 것은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임이 밝혀진다.

 

강단의 덤앤더머 유사고고학

강단 유사사학은 김해 대성동 등 가야 고분군의 연대가 3세기 후반 이후라 하여, 삼국유사가야 관련 기사들의 역사성을 부정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고분을 통해 추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김수로 세력은 초기에 한반도 남부식이 아닌 그들의 원래 무덤 양식을 고수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고분이 쉽게 형태가 사라지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후세의 파괴로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그들이 말하는 최초의 가야 고분이 김수로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1세기 가락국기가야 건국 기사를 부정하는 학술적 근거로는 인정될 수 없다.

특히 3세기 후반, 고구려 탈영병들이 신라로 들어온 후 김씨로 입적되고 그 중 일부가 가야로 진출하여 김해와 부산에 금관국을 건국할 때 김수로 세력의 무덤이 이들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어떻든 가야 고분의 연대 판단만으로 가락국기가야 건국 기사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유사사학임을 광고함에 지나지 않는다.

 

가야는 수로왕이 건국했다

가야는 김일제의 후손인 김수로에 의해 건국되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발굴된 신나라 화폐, 여러 금석문, 삼국사등의 사료가 CE 42년 가야 건국을 입증한다. 가락국기의 김수로를 전설이나 주술적 인물로 만들어서 42년의 가야 건국을 부정하고, 가야와 무관한 변한이나 변진을 떠드는 강단 유사사학은 조선총독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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