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야의 변화
금관국은 가야가 아니다
『북사』 「신라전」은 신라 북부까지 쫓긴 고구려병이 신라인이 되었다고 한다. 245년 동천왕은 관구검(무구검)에 쫓겨 동옥저의 남쪽까지 도망갔다. 동옥저의 남쪽은 신라와의 국경이다. 유유의 충성으로 추격군을 쫓아내는데, 당시 신라의 국경까지 도망왔던 일부 고구려 병사가 신라로 도망갔다. 이들 고구려 탈영병들은 245년 겨울 신라를 침공하였는데, 신라군의 총사령관격인 서불한 석우로는 이들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들 고구려 탈영병들을 조분왕의 동생인 첨해가 외가(김씨)에 입적시켜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석우로의 신라군이 이기지 못한 고구려 탈영병 세력을 등에 업고, 첨해는 12대 왕위를 쟁취한다.
한편 이들 고구려 탈영병들의 일부가 김해로 남하하여 김해를 차지하고 금관국을 건국한다. 이는 3세기 후반 이후, 김해 대성동에 대형 목곽묘가 나타나고 거기에 고구려 양식의 무기·마구·갑주, 동복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된다. 김해가 신라에 532년 정복당할 때 금관국이 항복하므로 3세기 후반에서 532년까지 금관국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신라에서 받은 김씨 성을 유지하여 김씨로서 항복한다. 『삼국사』와 『삼국유사』는 3세기 후반 이전의 김해를 금관국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532년 망할 때 금관국이 있었으므로 가야 건국 시에도 김해가 금관국이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결과이다. 금관국은 가야와 명백히 다른 나라이다.
신라는 고구려 탈영병들이 가야를 약화시키면 서쪽의 백제 방면과 북쪽의 고구려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어 이들이 김해를 공격하는 것을 용인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의도 대로 이후 가야는 분열되어 가야가 망할 때까지 신라에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내물왕 이후 신라도 이들 고구려 탈영병 집단이 정권을 장악하자 금관국과 신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고 가야는 금관국이 있어 신라를 위협할 수 없었을 것이다.
287년부터 294년까지 왜가 신라를 침략하는데, 이는 구주의 가야 분국이 신라에서 온 고구려 탈영병들이 김해를 침략하자, 신라가 침략한 것으로 보고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3세기 말 토착세력의 집권
김해가 금관국에 탈취당하자 고령 세력이 가야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령 세력의 집권을 알려주는 사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ㄱ) 『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경상도」 고령현 건치연혁
최치원의 『석이정전』을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인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고 되어 있으니, 즉,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 된다. --- 또한 『석순응전』에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곧 정견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이라고 하며, 신라에 결혼을 청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다고 되어 있으니 이뇌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다.
(ㄴ) 『삼국유사』 「기이」 5가야
아라가야 지금의 함안, 고녕가야 지금의 함녕, 대가야 지금의 고령, 성산가야 지금의 경산이니 [혹은] 벽진이라고도 한다, 소가야 지금의 고성이다.
또 본조의 ≪사략≫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 5년 경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김해부가 되었다)이요, 2는 고녕(가리현이 되었다)이요, 3은 비화(지금의 창녕이란 것은 아마도 고령의 잘못인 것 같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 (앞과 마찬가지로 성산은 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라고 하였다.
(ㄷ) 『삼국사』 「잡지」 髙靈郡(고령군)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 (한편 내진주지라고도 이른다.)에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하였다.
(ㄹ) 『삼국사』 「신라본기」 562년 09월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배반하였으므로 왕이 명하여 이사부에게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5,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달려 들어가 흰색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ㅁ)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형왕
김씨이다. 정광 2년(521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보정 2년 임오 9월(562년)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 탈지이질금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 졸지공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의 딸 계화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 각간, 둘째는 무도 각간, 셋째는 무득 각간이다. ≪개황록≫에 보면, “양나라 무제 중대통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논평하여 말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은 양의 무제 중대통 4년 임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의 건무 18년 임인(42년)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 보정 2년 임오(562년)이다. 그러면 30년을 더하여 도합 520년이다. 지금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해 둔다.
(ㅂ) 『삼국유사』 「왕력」
제10대 구충왕, 겸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 딸이다. 신축년에 즉위하여 12년간 다스렸다.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바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금관국 성립 후 가야는 고령이 중심이 되어 새 왕조가 성립한다. 대가야는 가야의 수도와 가야 전체를 의미한다. 5가야는 가야의 지방제도로 가야가 지방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했음을 의미한다. 건국 시에는 김해가 가야의 수도였으나, 김해가 점령당하면서 고령이 가야의 수도가 된다.
『석이정전』은 고령가야의 시조를 토착세력인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김수로 세력인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의 결합으로 태어난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고 기술하나, 『삼국사』는 시조가 이진아시(伊珍阿豉) 또는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 한다. 이진아시(伊珍阿豉)는 이비가지(夷毗訶之)와 같은 사람이고 김수로계로 볼 수 있으므로 고령가야도 초기에는 김해 세력에 의해 지배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뇌질주일(惱窒朱日)과 내진주지(內珍朱智)는 같은 사람이고 고령 세력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고령 세력이 후에 권력을 장악한 후, 시조를 양 세력의 결합이라 하거나(석이정전) 양자를 동시에 말했다고(삼국사) 볼 수 있다.
뇌질청예는 김수로왕이 아니고 금관국을 세운 김씨(고구려 탈영병)이다. 후기 가야 건국설화가 뇌질청예의 금관국을 말하는 것은 김해와 부산도 원래 가야의 영토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금관국도 언젠가는 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역사적 당위적 영토임을 표명하기 위함이다.
가야의 수도였던 김해가 점령당하자, 고령의 토착세력은 가야의 수도임을 선포하고 금관국에 대항하였을 것이다. 두 나라는 싸우면서 서로 영향을 받았고, 영토나 세력의 우열이 변하였겠지만, 신라에 망할 때까지 병립하였다.
후기 가야도 연맹체가 아닌 고대국가
강단 사이비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야를 연맹체라고 한다. 그러나 사료는 왕(王)과 지방관인 주(主)를 구별하고 있어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 모두 고대국가임을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가 금관국왕의 항복이라 하지 않고 금관국주의 항복이라 한 것은 금관국이 가야의 한 영토라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는 우륵과 관련된 기사에서 가실왕이라 하며, 524년 기사에서도 가야국왕을 만났다고 하며, 522년 가야국과의 혼인 관련 기사에서도 가야국왕이라 한다. 『삼국유사』도 가야 건국기사에서와, 5가야 설명에서 김수로는 왕이라 하고 다섯은 주라 한다.
또 『삼국유사』는 가야 건국기사에서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하며, 『삼국사』는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라 한다. 따라서 대가야(대가락)는 가야의 수도와 가야국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가야의 수도가 김해에서 고령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김해가 수도인 전기 가야도 대가야이고, 고령이 수도인 후기 가야도 대가야이다.
일연의 오해
김부식과 일연은 금관국이 가야가 아닌 것을 몰랐다. 일연은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가야의 구충(형)왕이 12년 다스린 후인 532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하고, 「가락국기」에서는 가야의 구형왕이 42년 다스린 후인 562년 진흥왕에게 항복하였다고 기술한 후, 『삼국사』와 『개황록』은 532년 항복했다고 하므로 두 설을 모두 기록한다고 말한다. 『삼국사』는 금관국주 김구해가 532년 항복했다고 하고, 562년에는 가야의 반란을 토벌했다고 기술한다.
일연 즉 「가락국기」는 김구해가 김수로왕의 후손으로서 가야왕이라고 착각하여, 김구해의 항복으로 가야가 망한다 생각하고 있으나, 532년 망한 나라는 『삼국사』의 기술 대로 금관국이다. 가야는 557년 망하고 562년 반란을 일으킨다.
「가락국기」 가야왕은 김수로계의 전기 가야 왕들이다. 10대의 왕만이 존재하는 이유는 3세기 후반 중에 금관국이 김해와 부산을 점령하고, 고령 세력은 나머지 영역을 기반으로 새로 가야 왕조를 세우기 때문이다. 전기 가야 왕들이 532년이나 562년까지 통치했다고 되어 있는 것은 금관국의 건국과 왕권 교체를 모르고 10명의 왕에게 가야의 전 시기를 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형왕과 김구해는 다른 인물로 보아야 한다. 김구해와 관련된 사실을 전기 가야가 망할 때의 왕인 구형왕의 일로 기술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착오가 발생한 이유는, 가야가 가야와 금관국으로 나누어지자, 『화랑세기』에 나온 것처럼, 신라에선 가야를 북가야(북가라), 금관국을 남가야(남가라)로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요약하면, 전기 가야는 42년부터 3세기 후반까지 10명의 왕이 있었던 나라였고, 후기 가야는 3세기 말부터 557년(신라의 제후국으로선 562년)까지 15명(신라가 임명한 도설지왕까지 포함하면 16명)의 왕이 있었던 나라였다.
강단 유사사학의 가야연맹체 소설
강단 사이비들은 가야가 10여개 마을의 연맹체라고 한다. 가야가 마을 간 연맹체였다면 바로 신라나 백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가공의 연맹체를 만들어 가야=임나라 주장하고, 가공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남한에 끌어들인다.
강단 유사사학은 『삼국사』,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술된 3세기 후반 중의 가야의 변화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런데 그들도 소설 창작을 통해 가야의 전기와 후기를 구별한다. 사이비들은 전기 가야연맹이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해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증거는 전혀 없다. 고구려는 400년 열도를 공격했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공격한 적이 없다. 오히려 금관국은 당시 친신라적이었고, 고구려계의 국가였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가 거의 완벽히 인위적으로 지워졌다는 것이 열도가 정복당했다는 것을 암시함에도 그들은 모른 척 한다. 그들은 가야가 망한 후 어떻게 후기 가야가 성립했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의 소설에선 후기 가야도 연맹체인데, 고구려를 어떤 정치체가 어떤 방식으로 물리치고 후기 가야를 성립시킨 후, 백제나 마한의 영토를 탈취하였는지 말하지 않는다. 왕도 없는 마을들이 어떤 구조 하에서 이러한 놀라운 결과를 이루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들 소설에선 나라가 갑자기 망했다가 갑자기 다시 만들어진다. 사이비들은 오직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부합하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그것이 가야의 역사라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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