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이비들의 소설 가야사
위에서 언급한 그들의 소설과 날조 이외에도 강단 사이비들은 가야사 거의 전체를 날조와 소설로 도배하고 있어, 따로 그들의 소설 가야사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의 소설 「야마토가야」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①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북부를 거의 다 장악하였다. ② BCE 24세기의 70여 삼한 소국들이 CE 3세기로 시간이동 되었으며, 그 영토는 방4천리에서 방1천리로 축소되었다. ③ 辰韓은 요서와 하북성에서 경상도 북쪽으로, 弁韓은 중국 동해안에서 경상도 남쪽으로, 馬韓은 韓에서 전라도로 옮겨진 상태이다. ④ 나라에 있는 가공의 야마토왜 왕조가 남한을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낙랑군 평양설은 최소한 중국의 왕조라는 실체는 있다. 한반도 남부와 열도의 역사 날조는 자기부정을 넘어 가공의 타인(야마토왜)을 창조하는 경지까지 나아간다.
(1) 무슨 이유에선가 가야=임나
「일본서기」의 임나는 557년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가 될 수 없음에도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야라고 우긴다. 「일본서기」를 보면 누구나 임나≠가야를 알 수 있으므로 임나=가야의 이유를 누구도 제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가’를 근거로 제시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제조한 모든 글이 다 그렇지만, 강단 유사사학이 가야에 관해 제조한 글들은 특히 더 해독하기 어렵다. 음상사를 통한 무의미한 위치 비정과 내용의 앞뒤 불일치가 필수요건이다. 그들의 글은 오로지 「일본서기」를 한반도의 역사로 만들어 일제 유사사학에 충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이해 불가능한 횡설수설이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와 횡설수설을 남발해도, 가야가 임나여야 그들의 임나 지명의 한반도 남부 비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가야가 임나라는 근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일본서기」를 한반도에 적용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김태식의 용감무쌍
김태식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교적 신빙성이 인정되는 다수 용례를 중심으로 볼 때, 임나는 6세기 한반도 남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신라나 백제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소국들의 총칭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가야 소국들이 신라나 백제와 구분되는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의 반영이며, 그 임나를 왜측에서 친근하게 여긴 것은 이들과의 빈번한 교역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요컨대 대가야를 중심으로 파악되는 5~6세기의 가야연맹을, 왜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임나는 가야가 망한 후에도 100년 동안 「일본서기」에 다수 등장한다. 따라서 6세기 후반 이후 나타나는 「일본서기」 임나의 다수 용례를 중심으로 볼 때, 임나를 경상남도의 가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김태식도 임나=가야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한 바가 없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무슨 이유에선가’이다.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562년에 망했다가 591년에 다시 살아나서 신라와 싸우기도 하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고 일본이 임나에 사신을 보내기도 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라 한다면, 6세기 후반 이후 「일본서기」에 임나가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그들은 해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면서, 소설에 부합하지 않는 「일본서기」 부분은 단호히 부정한다.
「일본서기」는 열도 소국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하고,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도 삽입하거나 덧붙여 가공의 일본천황과 연결시킨 문학서이다. 「일본서기」는 『삼국사』 『삼국유사』 등 신뢰성 있는 사서에 배치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료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있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그것을 거꾸로 판단하고,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하면서 일제 유사사학을 떠받들고 있다. 그렇게 「일본서기」를 떠받들면서도 조선총독부의 소설과 배치되는 부분은 단호히 부정하는 그들의 과감한 결단력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조가 장애를 만날 때, 강단 유사사학의 상투적 수단
그들의 비학문성과 교시 추종성은 그들의 고문 해석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일본서기」는 임나의 북쪽이 바다라고 하여, 임나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서기」를 고의로 오역하거나 근거 없이 오류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충성한다.
「일본서기」 BCE 33년: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동북아역사재단: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任那는 筑紫國에서 2,000여 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것은 『日本書紀』 찬자의 잘못인 듯하다.)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올바른 해석은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가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이 문언이 묘사한 임나는, 축자국을 구주 북쪽으로 보면 대마도는 이천리라 하기에 가까우므로 조희승이 논증한 오카야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인의 이동에 따라 대마도, 오카야마 등 임나가 복수일 수 있으므로 임나가 사용된 문맥에 따라 임나의 위치를 비정해야 한다. 「일본서기」는 가공의 일본국 중심지 즉 백제 관료인 왜왕의 소재지인 나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므로 「일본서기」의 임나는 대부분 오카야마로 생각된다. 어떻든 ‘북쪽이 바다에 막혀 있다’는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은 불가능함에도 동북아역사재단은 임나를 한반도에 위치시키기 위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로 오역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유사사학의 소설에 부합하지 않으면 항상 그러하듯이 사료의 문언을 근거 없이 오류라고 한다.
「일본서기」의 문언에 맞추기 위해 옛날에는 김해 북쪽의 낙동강까지 바다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등장한다. 김해 북쪽이 바다가 되려면 부산과 양산도 물에 잠겨야 할 것인다. 일제 참모본부의 날조 역사를 수호하기 위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지리학까지 날조하는 그들의 렬렬한 충성심에 기가 막혀올 뿐이다.
(2) 임나=가야 영역의 근거 없는 확장
음상사 서번트 증후군
강단 유사사학과 비슷한 재야 유사사학이 있다. 재야 유사사학의 특징은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지명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건의 고려와 이성계의 조선이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 심지어는 양자강 이남까지 차지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도 재야 유사사학처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오직 지명의 동일성만을 따진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일한 실증은 지명의 음상사이다. 그들은 신라7국, 임나10국, 임나4현 등 「일본서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지역을 한반도의 지명과 유사하다고 하여 한반도에 비정한다. 이들은 임나의 지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역이 열도에 수십 개씩 발견되며, 한반도의 지명은 정확하게 임나의 지명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여 고도의 음상사 기법으로 음상사 아닌 것을 음상사화 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음상사에 꽂힌 서번트 증후군 환자가 있다면 강단 유사사학과 비슷한 행태를 보일 것이다. 재야 유사사학은 지명이 동일한 경우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고도의 음상사 기법으로 동일화시킨다는 점에서 재야 유사사학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유사성을 실현한다. 그들은 진정한 천재 유사역사학자들이다.
가짜 음상사 기법에 의한 임나=가야 영역의 무한 확장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 관련 지명을 음상사를 주된 근거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 배치하여 임나의 서부국경을 도출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열도의 신라마을과 임나마을의 명칭으로는 부족하여, 『양직공도』에 백제의 속국으로 기재된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사문, 하침라 중 상당수를 임나=가야의 지명으로 보며, 우륵의 12곡명까지 임나=가야의 지명으로 본다. 임나 영역의 크기는 일제 유사사학에 대한 충성도에 비례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일제 유사사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가 임나의 영역을 충청도까지라 하였는데, 그들이 전라도 동부까지로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임나=가야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음상사이다. 그들은 다른 근거가 없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으므로, 「일본서기」 지명 비정에서 음상사가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음상사를 지명 비정의 근거로 사용하더라도, 지명의 음이 전혀 다르게 변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음상사에 의한 지명 비정은 지명 변천에 대한 입증이 필요하다. 특히 백제 영역은 한반도, 요동반도, 중국 동부는 물론 열도가 포함되므로, 백제의 지명이라 하더라도 그 지명을 열도가 아닌 남한에 비정하려면, 신라가 점령한 지역으로 확인되어야 하며, 신라가 지명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도 입증되어야 하고, 그 이후로도 지명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음상사에 의한 지명 비정의 선결조건을 모두 무시한다.
나아가 그들은 음상사가 아니어도 음상사라고 우긴다. 즉 그들은 음소 하나라도 비슷하면 음상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음상사에 근거한다고 주장할 뿐이지, 그들의 소설에 의해 마음대로 지명 비정을 하고 있다. 그들이 사기 치는 증거는 열도에 더 정확한 음상사 지명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정한 음상사 지명은 무시하고 음상사가 아닌 지명을 음상사라고 우기면서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서기」는 열도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문학서이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한반도 남부에 관한 이야기로 날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륵의 12곡명까지 임나=가야의 지명이라 주장
그들은 음상사 기법을 더욱 발전시켜 우륵 12곡의 곡명에서 10곡의 곡명도 임나=가야의 지명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근거는 전혀 없다. 왜 보기와 사자기는 지명이 아니고 다른 곡명만 지명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조선총독부 소설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 부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활용한다. 그러나 객관적 사료에 의하면 우륵 12곡명은 지명과는 무관하다.
『삼국사』에 의하면, 가실왕은 당의 악기를 보고 12달의 음률을 본 떠서 가야금을 만든 후, 나라마다 말이 다르므로 음악도 달라야 한다고 말하며 우륵에게 12곡의 작곡을 명하였다. 12는 달력·간지 체계 속에서 자연·시간·우주의 한 순환이 완결되는 단위, 즉 ‘질서 있는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가실왕은 12곡을 통해 가야도 소국이지만, 국가로서 모든 조건을 갖춘, 주변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표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2곡은 곡의 형식이나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국가음악의 완결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2곡명이 지명이 아님은 우륵의 곡을 전수 받은 신라인들이 12곡을 5곡으로 요약한 이유에서 명백해진다. 신라인 세 명은 우륵의 허락도 없이 12곡이 번다하고 음란해서 우아하고 바르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5곡으로 요약하였고, 우륵(于勒)은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그 다섯 곡의 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한 후 곡이 좋다고 하면서 왕 앞에서의 연주를 허락하였다. 신라인들이 12곡을 허락 없이 5곡으로 줄였다는 것은 가야가 망했으므로 가야의 음악은 12곡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고, 우륵을 망명인으로 대우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처음에 우륵이 화를 낸 이유이다. 우륵은 다섯 곡의 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한 이유는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완성한 작품이 손상되었고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서이고, 왕 앞에서 연주하라고 한 것은 포기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대로, 12곡명 중 10개가 가야의 지명이었다면, 우륵은 12곡이 5곡으로 축약되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야가 망한 마당에 과거의 가야 지명으로 된 곡체계는 당연히 변화되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륵의 12곡을 수정한 5곡이 신라의 대악으로 되었다는 것은 우륵 12곡이 어떤 국가에서도 사용가능한 보편적인 국가음악 형식을 갖춘 음악이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12곡명이 지명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음상사 서번트 증후군이 의심되는 일제 유사사학을 이어받은 강단 유사사학에겐 모든 것이 지명과 음상사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륵 12곡명은 지명과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곡명까지 지명으로 바꾸려는 것은 그들 주장의 무근거성을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감추고 싶은, 강단 유사사학 종사자들의 다급함의 발로일 것이다.
가야의 서부 확장은 소설 야마토가야의 하일라이트
강단 유사사학은 사료의 글자 날조와 횡설수설과 고도의 가짜 음상사 기법을 통해 가야가 전라도로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확장은 없었다. 가야는 백제와 싸울 수 없다. 신라와 싸우기도 벅찼다. 백제는 김수로 집단의 한반도 이주에 도움을 주었던 나라이나, 신라는 탈해왕이 59년이나 60년 가야를 정복하려 한 나라이다. 처음 신라와 가야는 비슷한 소국이었고, 백제는 대국이었다. 가야가 대국인 백제를 적으로 하면 뒤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존치시켜 신라를 견제하게 한 후 고구려에 대비할 수 있었으므로 가야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었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4세기 말부터 백제가 약해졌고, 신라는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기에도 역시 가야가 백제를 공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6세기 이후 백제는 韓을 상실하여 약해지고, 신라는 더 강해지면서 가야와 백제를 동시에 공격하게 되므로, 가야와 백제가 적대적으로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소설에서 광개토대왕 때 망했던 연맹체의 가야가 아무런 계기 없이 부활하여 무려 고구려를 몰아내고, 전라도의 마한 또는 백제를 정벌하여 전라도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은 일제·강단 유사사학의 판타지소설이다.
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의 충돌’은 소설 「야마토가야」의 하일라이트이다. 대가야의 서진정책이 불가능함은 이미 살펴 보았다. 백제는 가야 멸망 시까지 한반도에서 남방정책을 펼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백제인데 뭘 한단 말인가? 강단 유사사학은 좀비 마한을 상정한 후, 백제의 마한 점령 과정, 임나의 서진, 백제와 임나의 충돌, 백제의 임나 영토 침식, 백제에 대한 임나의 방어, 임나를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경쟁, 그 과정에서 힘센 야마토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고 야마토왜와의 무역권을 획득하기 위해, 때로는 야마토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한반도의 백제 신라 임나, 이들 소국을 조정하며 지휘하는 대국 야마토왜의 한반도 출장소 임나일본부를 멋지게 묘사하여 일제 유사사학에 충성하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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