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51

역사회복 2026. 4. 14. 09:22

https://youtu.be/gnLXwAFv8b8

 

(3) 일본서기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

 

일본서기는 남한이 아닌 열도에 관한 이야기

일본서기는 열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일본서기의 기술은 일제·강단 유사사학의 한반도 남부 역사 날조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문언도 날조하여 그들의 소설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일본서기249(신공49)에 나오는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고 날조하면서 가야사 날조를 시작한다. 관련 부분과 동북아역사재단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49년 봄 3월에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녹아별(鹿我別카가와케)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백개로(沙白蓋盧)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 사사노궤(沙沙奴跪) [이 두 사람의 성()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그리하여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四邑)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 목라근자 등은 함께 의류촌(意流村)에 모였다[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고 한다]. 서로 보며 기뻐하며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다만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벽지산(辟支山)에 올라 맹약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서 함께 반석(磐石) 위에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만일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한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 두렵다. 따라서 반석에 앉아서 맹약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지금부터는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며 해마다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천웅장언을 데리고 백제의 도읍에 이르러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강단 유사사학은 위 이야기가 249년의 일이 아니라 120을 더한 369년의 일이며, 공격의 주체는 일본(그들의 소설에선 야마토왜)이 아니라 백제이며, 공격 대상은 신라가 아니라 임나=가야라고 주장한다. 시기는 일본서기가 원래 그러니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의 당사자를 바꾸어야 된다면 더 신빙성이 있는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가 당시 열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백제의 담로를 가공의 왕인 일본왕으로 바꿀 수는 있었겠지만, 공격 대상을 바꿀 이유는 없다.

일본서기의 이 이야기는 백제가 3세기 말 열도에 진출한 후 4세기 중반 신라계 이주민의 마을국가를 약화시키고, 백제계 마을국가의 세력을 강화시켜 열도의 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7, 고해진, 침미다례,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의류촌, 고사산 모두 열도의 지명이나 마을명이다.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하는 이유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이들 7국은 남한에 있는 임나=가야의 영역인데, 이들이 주장하는 7국의 영역이 모두 신라에 속했던 시기는 없다. 특히 강단 유사사학은 남가라를 김해라고 주장하는데, 김해가 신라의 영역이었던 시기는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신라7국은 열도 신라에 속했던 7개 마을을 일본왕으로 표현된 백제 담로가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어떻든 일본서기7국을 문자 그대로 신라7국으로 해석하면 일본서기의 임나와 신라를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일본서기의 모든 이야기들도 열도에 관한 이야기가 되며 임나는 가야와 같은 말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강변하였고, 강단 유사사학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 이를 추종하고 있다.

일본서기562년 부분에서 임나10국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이라 기재되어 있는데, 그들은 가라 안라 다라의 셋이 임나10국에 속하므로 신라7국을 임나라 거짓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369년에 가라 안라 다라가 신라였다가 562년 이전에 임나가 될 수 있으므로 타당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가라 안라 다라가 신라였다가 임나로 되었다는 것은 위 이야기가 열도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이야기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한반도 신라는 가라 안라 다라라는 지역이 영토가 아니었고, 따라서 이들 지역을 임나라는 나라에게 빼앗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신라7국이나 임나10국은 우리 민족이 이주한 열도 내 마을 이름이라 보아야 한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신라7국이 그들 소설의 기초를 무너뜨리므로 기를 쓰고 미친 척 신라를 임나라고 주장한다.

 

지 맘대로 지명 비정

강단 유사사학은 그들의 소설이 일본서기에 근거를 둔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서기어디에도 그들 주장의 근거는 없다. 그들은 그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떠받들어 진정한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일본서기에 무슨 근거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서기249년 이야기를 완전히 변개하여 그들의 소설을 창작한다.

그들은 순전히 음상사에 의하여 249년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명을 한반도 남부에 비정한다. 그들은 깡패 아유카이의 주장을 이어받은 쓰에마쓰의 위치 비정에 복종한다. 그들은 비자발을 창녕이라 하는데, 창녕은 낙동강 동쪽으로 당시 낙동강이 실개천이 아닌 한 가야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창녕이 가야였다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적도 없다. 전가의 보도 음상사검(音相似劍)을 엉뚱한 곳에 휘두른 결과일 뿐이다. 가야의 비사벌은 합천이고 이는 삼국사에 의해 명백하다. 그들은 합천을 다라라고 하는데 음상사 같지 않은 음상사 외에 근거는 전혀 없다. 함안은 아라이고 안라가 아니다. 안라는 열도의 소국이다. 그들은 탁순이 달구벌의 달구와 유사하다고 하여 대구라 하는데, 대구는 낙동강 동쪽이며, 김알지가 정착한 곳으로 김알지와 탈해왕이 65년 합병한 이래 신라의 중심지이므로 가야가 될 수 없다. 대구와 경주 사이가 경산이므로 경산이 탁국으로 가야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침미다례도 음상사에 의해 강진이나 해남 일대로 보는데, 근거는 전혀 없다.

 

일본서기를 완전히 무시하는 소설 창작

그들은 전쟁의 당사자도 근거 없이 백제와 가야로 바꾼 후 다음과 같은 소설을 창작한다.

 

그러나 이 때의가야정벌은 군사적인 무력침공이라기보다는 백제를 정점으로 比自㶱 7국이 동맹을 맺거나 통교하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 백제가 가야지역에 진출한 이유는 왜와의 교역로를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 백제와 신라. 양국은 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 --- 가야에 대한 작전은 백제와 왜 사이의 원활한 교통로의 확보, 신라에 의한 교역 방해의 방지 등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이듬해 多沙城(河東)을 확보하여 왜와의 교역에서 확고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忱彌多禮比利 등에 대한 정벌은 교역로의 확보와 마한 잔여세력의 통합이라는 측면이 결부되었을 것이다. 침미다례는 마한 잔여세력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었다. 그것은 침미다례가 3세기 후반에 나타났던 新彌國과 동일한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근초고왕 24년의 전역에서 남만이라는 수식어가 별도로 붙어 있다는 점, 침미다례를 무찌르자 비리 등의 소국들이 자연히 항복해 왔다는 점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침미다례는 강진이나 해남지역으로 비정되며 비리 등도 대개 오늘날의 전남 해안지방에 비정된다. 반면에 백제국의 영내로 표현된 벽지산은 金堤 부근, 고사산은 古阜 부근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근초고왕 24년 이전 백제의 영토는 이미 노령산맥 이북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통합은 내부의 지배세력들을 온존시키면서 이들을 통한 공납적 지배의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이는 이 지역에서 5세기에 접어들어 대형의 옹관묘가 조영되고, 그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칼 등의 화려한 물건들을 부장한 지배세력이 의연히 존재했던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근초고왕대의 마한통합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일원적인 지방제도의 정비와 지방관의 파견으로까지 진전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때부터 백제는 전체 마한세력을 대표하게 되었다. “晋代 이후 諸國을 병탄하여 마한의 옛땅에 자리잡았다라는 표현은 이러한 양상을 반영한다.

 

전쟁 당사자를 바꾼 것만으로는 임나선생님을 영접할 수 없다. 당시에 백제와 가야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단 유사사학은 원문의 내용도 변조한다. 원문이 군사를 이끌고 가며, 군사 수가 적을 것을 걱정하여 더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가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전쟁이 없었다고 하면서, 여기의 전쟁은 동맹이나 통교라는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주장한다. 전쟁을 동맹으로 변조시키는 그들의 연금술사적 능력에 우리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원문은 사라지고,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만 남은 셈이다. 이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초탈문헌주의에 기반한 가공할 실증성이다.

 

저질적 상상력으로 사서와 유물을 부정

그들의 문학은 계속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전쟁을 동맹으로 바꾼 후, 백제가 가야와 사이좋게 지내려 한 이유는 백제가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 순수문학을 한다. 그러나 가야는 열도와 백제의 교역로가 아니며, 가야가 백제의 항해를 방해할 정도의 힘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주장은 공상 사이비 역사소설도 되지 않는다. 왜와의 교역에서 신라보다 우세를 확보하였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당시 열도는 백제의 담로가 열도소국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는데 신라와 무슨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강단 유사사학은 침미다례를 전라도 남해안으로 비정한 후 침미다례와 항복한 4읍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한으로 변조한 후 그때야 비로소 백제가 전라도 해안을 영향권으로 만들었지만, 마한은 독자적 세력권으로 계속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국사에 의하면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마한은 CE 9년에 백제의 영토가 된다. 한반도 남서부도 1세기 초에 백제가 된다. 그래서 가야와 신라는 경상도에 겨우 건국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옹관묘를 마한의 것이라 하는데, 대형 옹관묘는 왜계의 것이고, 전라도의 옹관묘는 백제의 주민이었던 전라도왜의 유물로서 마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금동관 등을 부장한 묘가 등장하는 것은 백제의 향촌 세력에 대한 위세품의 변동이지 향촌 세력의 독자성이 커진 것은 아니다. 백제의 위세품이 등장하는 지역은 백제의 지배력이 확고한 지역임을 의미함에도 강단 사이비들은 독자적 세력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들에 의하면 부여에도 금동관 등을 부장한 묘가 나타나므로 부여도 백제로부터 독자적인 세력이 지배하는 지역이 된다. 통전, 진대에 백제가 마한 고지에 자리잡았다는 말은, 황하 이동으로 황하 서쪽의 마한 땅 즉 대방고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가 서진이 약화되면서 대방고지를 탈환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한반도와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그들은 오직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무한한 충성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4) 임나4현 날조

 

안타깝게 멸종된 전라도의 닭과 개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512년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여, 임나4현의 위치를 오로지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심에 의하여 비정한다. 그들은 음상사학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답게 서로 다른 위치를 주장하고 있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음상사를 통해 임나4현을 경남, 전북, 충남, 경북, 전남, 부산 등 다양한 위치에 비정하는데, 주로 섬진강 유역의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현을 현재의 군단위 이상으로 보아 4현을 4군 이상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원문은 임나4현을 아주 작은 마을로 보고 있다. 이들이 근거로 하는 일본서기원문과 동북아역사재단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51212

겨울 12,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裟陀), 모루(牟婁) 4현을 청하였다. 다리국수인 수적신압산이 아뢰기를, “4현은 백제에 근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백제에 주어 같은 나라로 합치게 한다면, 굳게 지키는 대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합쳐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몇 년도 제대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반금촌대련(大伴大連金村)도 이 말을 믿고 뜻을 같이하여 상주(上奏)하였다. --- 대련은 그 청에 따라서 사자를 바꾸어 칙을 알렸다. 하사품과 칙명의 뜻을 전하고, 상표에 따라 임나 4현을 주었다.

 

원문이 ‘(백제와 4현이)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므로, 백제나 임나4현이나 모두 아주 작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이 부분은 아침 저녁의 왕래와 닭과 개를 명시하여 열도 마을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 초탈문헌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임나4현을 한반도의 광대한 지역에 위치시킨다. 김태식은 임나4현을 순천, 광양, 여수로 비정한다.

 

결과적으로 백제가 임나 4현을 빼앗은 것이니, 원래는 그 곳이 임나, 즉 가야의 영역에 속하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이 임나 4현의 위치는 섬진강 유역의 전남 지역에 해당하여, ·하다리는 전남 여수시와 돌산읍, 사타는 전남 순천시, 모루는 전남 광양시 광양읍에 비정된다. 여기서 다리국수란 그 해 4월에 왜에서 이 지역으로 파견했던 사신을 가리킨다.

 

김태식은 개와 닭을 어느 나라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하므로 임나4현이 작은 지역이라고 말하면서도 광양, 순천, 여수 지역을 임나4현이라 주장한다. 당시에는 순천에서 닭이 지나가면, 그 닭이 광주 닭인지 여수 닭인지 순천 닭인지 하동 닭인지 몰랐다. 그렇게 활동범위가 컸던 우리의 닭과 개가 현재 전해지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닭과 개는 과장법이라고도 하는데, 과장법이 사용될 문맥이 아니며, 그렇다 쳐도 임나4현의 1현이 현재의 1군은 될 수 없으며, 일본서기가 일본 왕의 하사 지역을 일부러 작게 과장했다는 것도 일본서기의 성격상 있기 어려운 일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임나4현을 일제유사사학을 조금 더 추종하여 전남 전체라고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도가 김태식보다 약간 크기 때문이다. 다른 학술적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축지법을 사용했던 전라도 사람들

이 이야기는 백제 관료인 왜왕이 백제 출신 사람들의 마을에게 임나 마을의 일부를 주어 왜왕에 대항하는 세력의 부상을 막고 마을들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해 열도 통치의 편의를 도모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임나4현에선 그들의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도 포기된다. 일본서기원문에 의하면 작은 지역에서 네 유사한 지명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있을 리 없으므로 닭과 개의 활동범위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임나4현의 사람들을 축지법을 쓰는 도사들로 만들어버린다. 당시의 전남 사람들이 축지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앞뒤가 일치할 수 없는 그들의 대하소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임나4현이 광대한 지역이라면, 그러한 광대한 지역이, 그들의 소설에 의할 때, 마한 또는 백제에서 임나=가야의 영역으로 변하였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들의 소설에서 400년에 고구려에게 망한 임나=가야가 고대국가도 아닌 연맹체로서, 그들의 소설에서도 고대국가를 완성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고구려를 몰아내고 그들 소설상, 백제의 영토였거나 독립적이었던 마한을 언제 점령하였는지를 밝혀야 한다. 임나를 한반도 남부로 날조하기 위해 가야를 연맹체로 상정하고, 고구려의 침공으로 임나=가야가 멸망했다고 주장했는데, 연맹체로 다시 재건한 가야가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이기고 경상남도와 전라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역사적 맥락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하여 마음대로 지껄이다가,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도 포기한 채, 임나 4현이 전남이나 전남의 광대한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가 날조한 야마토가야설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충성심을 상정하여야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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