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53

역사회복 2026. 4. 14. 10:38

https://youtu.be/y1eagWk4xss

 

(7) 안라회의와 사비회의 날조

 

안라회의: 강단 사이비의 코미디 소설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5293월 이야기를 근거로 5293월 함안의 안라국에서 남가라(김해), 탁기탄(영산), 탁순(창원)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연맹체의 한 나라인 함안의 안라국이 회의를 주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에 의하면 함안이 아나가야 또는 아시량국이므로 함안이 안라국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안라가 아나나 아시량과 음상사라는 가짜음상사로 함안이 안라국이었다고 우긴다. 강단 유사사학은 안라가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외교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함안 마을이 백제와 신라를 불러들여 회의를 한다는 것부터 코미디이고 더 가관은 백제대표는 회의장인 고당에 앉지도 못하고 땅에 앉아서 회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백제대표가 땅에서 회의에 참석한 것은, 안라가 백제가 기문과 대사를 취할 때는 백제 편이었다가, 안라회의 시에는 백제를 견제하기 때문이라 한다.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임나=가야가 연맹체인데, 백제가 가야를 침략하여 기문과 대사를 빼앗을 때에도 안라가 백제 편이라면, 안라가 왜 임나=가야의 연맹체 소속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신라에 뺏긴 가야 소국을 가야연맹체로 복귀 시키는 목적의 회의이므로, 신라 대표는 홀대할 수 있어도 백제 대표는 홀대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달에 겨우 두 세번 회의가 있었던 것도 우습지만, 백미는 백제 대표가 당 아래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가 함안 마을이 개최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상식적으로 함안이 도륙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백제 대표를 땅바닥에 놓아 둘 수 없고, 만약 그랬다면 백제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지, 거기에 남아서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의 역사

일본서기의 이 기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면, 임나에 있는 백제 관료가 왜왕의 지시로, 안라마을 백제마을 신라마을 대표를 안라마을에 모이도록 하여 신라마을이 점유하고 있는 남가라 탁기탄의 처리 문제를 토의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회의 시 백제대표를 당 아래 두었다는 것은 안라마을이, 문제되는 남가라 등이 백제마을에 속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였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 열도 마을들 간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이야기를 난데없이 한반도의 백제 신라와 연결시키는 강단 유사사학의 탁월함에 숨이 멈춰질 뿐이다. 그들은 안라를 한반도에 정착시키기 위해 철면피도 마다 않고 일제 소설에 충성하는 투혼을 보인다.

 

사비회의: 강단 사이비의 경이로운 소설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5414월 기사와 54411월 기사를 근거로 성왕이 남가라(김해), 탁순(창원), 탁기탄(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고 주장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안라가 임나의 주도국으로 신라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백제는 임나 부흥보다는 고구려와의 대결을 위해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여 성과가 없었다거나, 안라가 친신라 경향이 있었고 백제는 이러한 정황을 반전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고 분석하기도 하면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한반도의 사실로 주장한다.

 

강단 사이비 소설의 초SF

541년 현재 가야는 대가야 즉 합천과 고령만 남고 모두 신라에 점령된 상태인데, 소위 사비회의에는 임나10국 중 8국이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단 유사사학은 안라가 가야의 실질적 리더로서 회의에 참석한다고 하거나 백제가 안라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려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하여 안라를 회의의 중요한 국가로 보고 있는데, 함안은 법흥왕 시에 이미 신라에 점령당하여 아무리 늦어도 540년엔 신라의 영토이다. 그리고 함안은 대가야의 지방이었던 곳으로 가야의 리더가 될 수도 없다. 또 신라가 가야를 잠식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여도 가야의 구성국인 안라가, 친신라경향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불일치하여 SF소설에서도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열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이야기로 날조하기 위해 가야를 근거 없이 여러 갈래로 찢어놓고 있다. 물론 그들은 삼국사법흥왕의 함안 점령 기록도 날조라 주장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기존의 견해들에서도 지리지의 기록은 신라의 安羅 통합에 관련된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한편, 安羅의 신라에로의 통합을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라고 한다. 객관적 사료를 부정하는 그들의 상투적 표현은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이다. 전승을 말할 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음과 그들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안라는 한반도의 가야와는 전혀 무관한 나라이므로, 소위 사비회의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열도의 일이다. 성왕이 등장하는 것은 열도의 백제마을을 본국백제로, 열도백제의 관료인 왜왕을 일본 천황으로 변개하기 위한 날조에 불과하다. 대가야 이외에 안라가야가 있다는 것도, 함안이 신라의 가야 잠식 과정에서 친신라적이었다는 것도, 백제가 함안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사비회의를 도모하였다는 것도 모두 코미디이다. 가야 전체가 557년에 망해서 562년에는 신라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함안의 안라가 560년까지 존속했다는 그들의 주장도 코미디이다. 더구나 안라가 함안이 아님은 일본서기에 의해서도 명백히 입증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안라가 등장하는 이야기들

일본서기249년 기사는 369(249+120)년에 일본이 신라를 공격하여 안라를 점령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함안은 가야이지 신라가 아니다. 일본서기의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안라를 한반도의 나라로 왈가왈부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일본서기5525월 기사에서 552년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와 임나를 공격한다고 백제·가라·안라가 말하는데, 550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지친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취하였고, 551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고, 553년에는 백제의 한강 이북을 점령하여 신주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백제 땅도 차지하여 한반도에선 고구려는 신라와만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에 도살성과 10군을 빼앗겼고 신라가 이를 돌려주지도 않았으므로 신라와 통모할 이유가 없다. 553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에선 백제를 공격할 수조차 없다. 554년 백제 웅천성 공격은 (황하 동쪽 제수 북쪽)에서의 공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공모하여 백제와 가야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서기55412월 기사에서 사라와 박이 바다 북쪽의 미이거를 공격하려 한다고 백제·안라·임나가 말하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박국이 고구려라 하며, 미이거는 백제와 임나를 말한다고 한다. 고구려는 백제와 가야를 북에서 남으로 공격할 것이므로, 고구려가 (남쪽에서) 바다 북쪽의 미이거(백제와 임나)를 공격하는 것은 한반도와는 무관하다. 설사 미이거가 한반도의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는 강단 사이비의 견해에 따른다 하더라도,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신라와 고구려가 화친하여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은 한반도에선 불가능한 상황이다. 사라, , 백제, 임나 등은 열도의 마을을 의미함에도 그들은 이를 한반도의 국가들이라 억지를 쓴다.

따라서 소위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보는 근거는 일본서기에 의해 명백하게 부정된다. 강단 유사사학이 이러한 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일제 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는 없다. 삼국사는 절대로 믿지 않고, 열도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일본서기는 어떻게라도 변개하고 날조해서 한반도의 이야기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굳은 다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실제의 역사

6세기 중반 신라의 급부상으로 백제는 열도에서도 병력을 동원하였다. 백제 조정은 547년 진모선문을 보내서, 553년 과야차주를 보내서 왜왕에게 병력 동원을 명령하자, 왜왕은 6월 말과 선박 무기류와 병력을 보냈다. 5541월 다시 병력 동원을 명하자 왜왕은 병력 1, 1백 필, 40 척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정이 5542월 하부 간솔 삼귀를 보내 병력 동원을 재촉하자 5545월 열도에서 병력이 출발하였다. 55412월 조정은 병력의 추가징발을 명하자, 왜왕이었던 혜왕자는 5561월 무기, , 병력을 조정으로 보냈다. 548년에는 성을 쌓기 위해 열도에서도 인력을 동원하였다.

일본서기는 열도의 사라마을, 박마을, 임나마을의 갈등 관계에 백제 본국이 열도의 왜왕에게 병력과 군수물자의 징발을 명령하는 상황을 결합하여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

 

(8) 합천을 다라로, 창녕을 임나의 비사벌로 날조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다라가 합천이고 창녕이 가야의 비사벌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라7국 중에 다라가 있어 다라는 한반도의 지명이 될 수 없다. 낙동강 서쪽의 합천이 신라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창녕은 낙동강 동쪽으로서 가야의 영토가 될 수 없다. 합천과 창녕은 삼국사에 가야의 비사벌, 신라의 비사벌로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관련 기사 해석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 「잡지-지리화왕군

화왕군은 본래 비자화군 (비사벌이라고도 한다) 인데 진흥왕 16(555)에 주를 두고 하주로 이름하였다. 진흥왕 26(565) 주를 폐했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창녕군이다. 영현은 하나이다. [火王郡, 本比自火郡 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 名下州. 二十六年州廢. 景徳王攺名. 今昌寧郡. 領縣一.]

삼국사』 「신라본기진흥왕 16

16(555) 봄 정월에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삼국사』 「신라본기진흥왕 26

26(565) 9월에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26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삼국사』 「잡지-지리강양군

강양군은 본래 대량주군 (大耶로도 쓴다) 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합주이다. [江陽郡, 夲大良(一作耶)州郡, 景徳王攺名. 今陜州.]

 

삼국사인용부분에 의하면 [가야 비사벌=완산주(555)=대야주(565)=강양군(경덕왕)=합주(고려)=합천, 신라 비사벌=하주(555)=주 폐지(565)=화왕군(경덕왕)=창녕(고려)]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가야와 신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도처에 옥녀봉 까치고개 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사벌이라는 지명을 가야 신라 모두 사용하였으므로 가야의 비사벌은 합천이고 신라의 비사벌은 창녕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신라는 108년 비지국(比只國)을 병합하였는데, 비지국의 비지와 비사벌의 비사는 표기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므로, 신라가 창녕을 108년에 편입한 것으로 보인다. 천관우도 비지국을 창녕으로 비정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창녕이 일본서기신라7국의 하나인 비자발(比自㶱)이며 삼국유사5가야 중 비화라 한다. 그러나 창녕은 낙동강 동쪽이어서 가야의 영토가 될 수 없다. 강단 유사사학의 글에서도 고대 정치체의 중심 묘역인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는 경주의 신라나 낙동강 동안의 여러 지역집단과 유사한 물질자료가 확인된다. 다른 가야의 중심세력과 달리 화려한 금공품이 다수 부장되고, 토기양식론과 더불어 신라와의 관계가 강하게 인식되어 왔다라고 하며,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창녕 영산의 계성 고분군의 유물은 모두 신라 양식 권역에 해당하며, 특히 영산에서는 창녕 양식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대가야 양식 토기는 한두 점 정도만 출토된 것이 전부라고 한다. 강이 가로막고 있고, 유물의 성격도 신라와 비슷하며, 문헌사료에 전혀 근거가 없음에도,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지명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신라 땅을 가야 땅으로 만들어버린다.

태백일사는 열도의 비자발을 변진 비사벌 사람들의 마을이라 한다. 변진은 신라를 의미하므로 변진의 비사벌은 창녕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비자발은 한반도 신라의 비사벌 사람들이 열도로 건너가서 만든 마을 이름이므로, 한반도와 무관한 열도의 지명에 불과하다.

결국 일본서기의 다라나 비자발은 한반도가 아닌 열도의 마을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낙동강을 실개천으로 만들면서 낙동강의 국경선 역할을 무시하는 참된 유사사학의 진수를 보이며, 창녕에서 발굴되는 신라적 유물의 의미와, 삼국사의 명료한 기록을, 조선총독부 소설에 반한다고 과감하게 던져버리는 강단의 뛰어난 기개와 호연지기는 사이비 사학의 영원한 모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9) 창녕비 날조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임나의 멸망에 대해선 갑자기 일본서기를 무시하고 뜬금없이 삼국사삼국유사를 근거로 제시한다. 일본서기에선 임나가 646년까지 등장하여 조선총독부 소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멋쩍어서 다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사이비들은 갑자기 561년 건립된 창녕비를 들고 나와 가야 멸망의 보조적 근거로 제시한다.

그들은 창녕비에 순수관경이라는 문구는 없어도 창녕비를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巡狩管境)비로 볼 수 있어, 창녕이 당시 가야와 국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흥왕이 창녕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고,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녕비문 어디에도 순수관경이나 척경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 창녕비 어디에도 군세 시위를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제목[題記] 순수배경과 경과[紀事] 왕을 수행한 사람[隨駕人名列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창녕비는 이들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농토 산림 소금 하천 등 경제 관련 업무분장이 나오고 참여자가 기록되었다. 창령비는 경제 관련 업무분장에 관한 진흥왕의 교시이다. 진흥왕 시 영토의 급격한 확대로 경제 관련 업무분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550년 도살성과 금현성을 확보하였고, 551년 고구려 10군을 획득하였고, 553년 백제의 동북부를 탈취하였고, 555년 가야의 합천, 557년 가야의 고령을 점령하였다. 이후 553년 백제로부터의 점령지에 신주를, 555년 합천에 완산주를, 556년 비열홀주를, 557년에 국원소경 감문주 북한산주를 설치하는 등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 경제 관련 업무분장에 불명확한 부분이 생겨서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창녕에 비를 세웠다.

신라 초기부터 신라의 영토였던 곳에 무슨 척경비를 세우겠는가? 가야가 이미 망했는데 가야에 군세 시위를 할 이유도 없으며, 당시 신라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에 대해서도 공세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가야가 망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마을국가로 쪼그라든 가야에 군세 시위를 하였다는 것은 우습지도 않은 소설이다. 삼국사』 『삼국유사이외에도 가야 멸망을 시사하는 보조적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창녕비를 제시하면서, 창녕비를 문언과 달리 척경비로 날조하는 그들의 놀라운 일제 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과 날조력은 유사사학의 영원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10) 삼국사』 「강수전의 임나 날조

 

강수가 한 말의 의미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마을=국가의 뜻이고 일족 친족 혈족 동족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임나마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강수 아버지의 이름이 석체(昔諦)이고, 따라서 강수의 성이 씨라면 강수의 선조는 신라에서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의 석씨 집단이 나중에 다시 신라로 되돌아온 경우로 보인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열도로의 이동이 주가 되었지만, 진경대사와 강수의 사례로부터 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동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수를 반역자로 만드는 강단 사이비들

그런데 강단 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나 금관국이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고령이나 김해 사람들이 충주로 이주되었고,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이주 후 적어도 50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난 강수가 자신을 본래 고령이나 김해 사람이라고 할 리는 없다. 만약 강수가 말한 뜻이 강단 유사사학이 말한 뜻이라면 강수는 반역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 가야나 금관국이 망한 후 한참 후에 가야나 금관국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가 신라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신라 왕에게 자신을 망한 가야나 금관국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은 선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선조를 의미하고,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왕에게 가야나 금관국이 존재할 당시의 지명을 들먹이는 것은 신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강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령이나 김해의 신라지명으로 말해야 한다. 따라서 임나가 고령이나 김해를 의미할 수는 없다. 임나가 신라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나 금관국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수는 그 선조가 임나국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동어반복을 근거로 떠벌리는 강단 사이비들

강단 유사사학이 을 본래라고 사기 치는 이유는 을 선조라 하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에서 충주로 이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령이나 김해가 임나라는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주로 이주된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들의 선조의 고향이 모두 고령이나 김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도 임나가 고령이나 김해를 의미할 수는 없다. 그들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로부터 이주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나가량이 고령이나 김해이므로 임나가 가야라는 동어반복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임나가 가야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오역도 서슴치 않거나 동어반복을 무슨 대단한 증거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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