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잃어버린 우리 역사: 왜(예) 집단
왜(예)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의 왜(예) 날조로 우리는 모두 우리 상고사를 오해하고 있다. 재야의 역사 연구자들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는 집단명으로서의 왜와 열도를 의미하는 지역명으로서의 왜로 사용되었는데, 두 의미의 왜 모두 우리 역사이다. 한맥예의 일원인 왜(예)집단은 한과 맥처럼 우리 역사 강역에 고루 퍼져 있었다. 열도를 의미하는 지역명인 왜의 역사는 왜집단의 역사가 아니다. 한맥왜 모두가 열도로 이주하였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야마토왜 왕국은 없었다.
신시국 성립 시 해안가의 왜(예)집단은 신시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단군조선(삼한조선) 시 번한이 양자강 왜와 접한다고 하므로, 양자강 왜는 단군조선에 속하지 않았고, 그 외의 왜집단은 단군조선의 주민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조선 시기 양자강 왜는, 일부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주민으로 되고, 일부는 번조선의 주민으로서 해양무역에 종사하였다가 백제의 주민으로 된다. 대부여 시 당산 지역의 왜는 예맥조선의 주민이었고, 韓(황하 동쪽 제수 북족)의 왜는 진번조선의 주민이었다.
진번조선이 연과 흉노에 의해 망하고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 지역은 예맥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에서 임둔이 위만에 복속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임둔은 韓 지역을 漢이 부른 명칭이다. BCE 128년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 漢에 귀부하였다. 즉 왜(예)집단의 우두머리였던 남려는 韓 지역을 예맥조선으로부터 이탈시켜 漢에 귀속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漢은 공사비가 과다하게 소요되어 韓을 창해군으로 만들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였다. 반란 실패로 남려 등은 축출되었을 것이고 다시 친 예맥조선계가 韓의 정권을 장악하였을 것이다.
(1) 신라의 왜집단
신라 초기 왜집단의 합류
신라는 예맥조선 왕검성의 주민이 漢의 영토였던 낙랑군(현재 보정시 지역)으로 강제이주될 때 낙랑군과 황하를 사이에 둔 낙랑군 동남쪽의 韓 지역으로 망명했던 사람들이 BCE 57년 세운 나라다. 『태백일사』는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진한의 나을촌으로 가 그 아들이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고두막국이 BCE 58년 동부여 금와에 의해 멸망당하므로 그 일족이 韓으로 도망와서 BCE 57년 辰韓 6부의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辰韓 6부는 여섯 마을에 불과하여, 강하지 않은 세력으로도 이들의 왕이 될 수 있었으며, 辰韓 6부는 마한으로부터 망명자들이라 무시당하고 있었으므로, 일시적으로라도 辰國의 지배자였던 고두막의 혈족을 구심점으로 삼아 나라를 만들어 마한과 맞서보려는 욕구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한이 이들 왕검성의 망명인들에게 북동쪽 해안가의 땅을 주었다. 韓 지역의 원 거주자인 변한이 BCE 39년 辰韓의 유민이라 자처했던 신라와 통합하여 신라는 변진으로도 불리었다.
韓 지역은 황하 하류여서 어업세력인 왜(예)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왜(예)집단의 일부가 신라에 참여하였다. BCE 20년 마한에 사신으로 간 호공은 왜인이다. 따라서 BCE 20년 이전에 신라 부근의 왜가 신라에 합류하였다고 추정된다. 『삼국사』에서 호공은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넌다고 하는데, 당시 왜인들이 호(박)를 허리에 차고 강이나 바다에서 헤엄치며 어업을 하였기 때문에 왜계의 지도자를 호공이라 하였을 것이다.
『삼국사』는 석탈해가 BCE 19년 진한의 아진포구에 도착하였다고 하며, 석탈해는 왜국 동북 천리에 있는 다파나국 출신이라 한다. 여기서 왜국은 신라와 인접한, 신라에 참여하지 않은 황하 어귀의 왜이고, 다파나국은 황하 하류에서 동북쪽에 있는 요동반도의 왜이다. 석탈해의 昔은 뜻이 예(옛)이다. 즉 석탈해는 예(왜)의 탈해란 의미다.
『삼국사』에 석탈해가 호공의 집을 취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탈해 세력이, 호공 세력이 신라에서 가진 권력을 빼앗았다는 의미다. 『삼국사』 신라 초기 기사에 나오는 호공과 탈해는 특정인이 아니며, 호공 세력(韓 지역의 왜집단으로 어업세력)과 탈해 세력(요동반도에서 신라로 이주한 왜집단으로 제철세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석탈해 세력은 제철 기술자들
탈해 세력이 호공 세력을 제압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제철 기술 덕분이었다. 『삼국유사』는 탈해가 호공의 집에 숫돌과 숯을 묻어놓고 대장장이라 하면서 호공의 집을 취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박을 몸에 묶고 어업을 하는 호공 세력보다 제철 기술을 가진 탈해 세력이 신라에 더 큰 경제적 기여를 하여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석탈해가 난생설화를 갖는다는 것은 왜(예)도 우리 민족임을 의미한다.
당시, 인도 남부로 이주한 조선인들인 타밀인들의 제철 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이었는데, 이들로부터 제철 기술을 습득한 탈해 세력은 황하 하류에 정착하여 철기류를 생산·판매하기 위해 신라에 합류하였다. 『삼국지』는 변진에서 철을 생산하였다고 하고, 『후한서』는 진한에서 철을 생산하였다고 하는데, 철을 생산한 주체는 신라=변진=진한의 탈해 집단이다. 강단 사이비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변진을 가야라고 하면서 가야가 철을 생산하여 낙랑군에 팔았다는 거짓말을 한다.
신라의 고대국가화는 왜집단인 탈해 세력이 주도
韓에서 신라는 마한의 속국이었고,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韓의 신라는 독립국가라 하기 어렵고 마한과 백제의 주민에 불과하였다.
탈해 세력의 제철산업 이익을 기반으로, 탈해는 남해왕 5년인 CE 8년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CE 10년 대보로 등용되어 정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남해왕 사후 유리왕이 대보인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다는 것은 이미 남해왕 시부터 신라의 권력은 탈해 세력에게 있었음을 의미한다. 탈해 세력이 왕위를 유리왕에게 양보한 이유는 실권을 이미 장악한 탈해 세력이 왕위까지 차지하는 경우 박씨 집단의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유리왕 사후 CE 57년 탈해 세력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탈해왕은 58년 어업세력인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59년 신라에 참여하지 않았던 황하왜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59년 겨울 탈해왕의 신라는 韓을 떠나 경주로 이주하였다. 탈해왕은 제철산업의 이익에 대한 백제의 수탈이 과도하다 생각하여 이주를 결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술한 『수서』와 『북사』의 기술처럼 신라는 경주로 이주하여 독립적인 고대국가가 되었다.
탈해의 신라는 59년 겨울 경주로 이전하였다. 신라의 이동은 『삼국사』와 『삼국유사』의 탈해왕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 『북사』 「신라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탈해왕은 김알지의 계림국과 합병하여 백제의 침공을 물리치고 고대국가로 자리잡았다.
박씨의 석씨 축출
탈해왕은 김알지에 다음 왕위를 약속하였으나, 탈해왕 사후 박씨가 왕이 된다. 탈해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박씨 집단이 불만을 가진 김씨 집단과 연합하여 석씨를 축출하고 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인 파사왕과 지마왕은 왕비가 김씨이기 때문이다. 박씨인 일성왕과 아달라왕은 왕비도 박씨이다. 박씨 권력이 공고해지자 박씨들은 김씨도 권력에서 배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5대 파사왕부터 8대 아달라왕까지 박씨 권력이 석씨의 권력 기반인 제철 기술자들을 탄압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달라왕 4년 (157년) 연오랑이 열도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것은 석씨 집단의 상당수가 박씨 권력의 탄압으로 열도로 건너갔음을 의미한다. 연오랑의 이주로 신라에서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는 것은 제철 기술자들의 이주로 무기와 농기구의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열도는 양질의 철광석 부재로 석씨 집단이 이주하였어도 철정을 생산할 수 없어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였고 가야와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석씨의 재집권
박씨 정권의 제철 기술자들 탄압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와 국방 문제로 아달라왕 사후 석씨가 재집권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에는 아달라왕 21년부터 벌휴왕 등극 시까지의 10년 동안 기사가 없다. 이는 박씨와 석씨간 치열한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석씨는 9대 벌휴왕부터 16대 흘해왕까지 왕권을 유지하였다. 물론 262년에는 김씨라 주장되는 13대 미추왕이 즉위하였지만, 김씨임이 의심되고, 조분왕의 사위로서 등극하였으며, 다시 석씨인 조분왕의 장남인 유례왕이 왕위를 이었으므로 미추왕을 석씨 정권에서 제외하기는 어렵다.
첨해왕과 석우로
석우로는 나해왕(벌휴왕의 차남인 이매의 아들)의 태자였으나, 조분왕(벌휴왕의 장남인 골정의 아들)이 왕위를 가져갔다. 석우로는 조분왕 시 외침을 격퇴하고 영토를 넓혔으며 조분왕 15년(244년) 서불한이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조분왕이 247년 사망하므로 조분왕이 노쇠한 244년에 석우로가 서불한이 된다는 것은 다음 왕위를 예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위의 고구려 침략으로 변수가 발생한다. 『북사』 「신라전」은 “일설은 위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격퇴하여 고구려인들이 옥저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는데, (돌아오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있어 이들이 결국 신라인이 되었다고 한다.”라 한다. 245년 동천왕은 관구검(무구검)에 쫓겨 동옥저의 남쪽까지 도망갔다. 동옥저의 남쪽은 신라와의 국경이다. 유유의 충성으로 추격군을 쫓아내는데, 당시 신라의 국경까지 도망왔던 일부 고구려 병사가 신라로 도망갔다. 이들 고구려 탈영병들은 245년 겨울 신라를 침공하였는데, 신라군의 총사령관격인 서불한 석우로는 이들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들 고구려 탈영병들을 조분왕의 동생인 첨해가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석우로의 신라군이 이기지 못한 고구려 탈영병 세력을 등에 업고, 첨해가 왕위를 쟁취한 것으로 보인다. 247년 5월 왕이 된 첨해왕은 248년 1월 장훤을 서불한에 임명하고 248년 2월 고구려와 화친한다. 249년 4월에 왜인에 의해 석우로가 사망한다. 이들 기사를 토대로 추측하면, 장훤은 고구려 탈영병들의 수장이며, 장훤의 도움으로 왕이 된 첨해왕은 장훤을 서불한에 임명하였고, 이들 고구려 탈영병 세력을 신라인으로 받아들인 것을 고구려로부터 승인받았다고 보인다. 첨해왕과 장훤은 왜인을 이용하여 석우로를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 「석우로열전」은 석우로가 첨해왕 때 방문한 왜국 사신에게 왜왕을 노비로 만들겠다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왜국이 253년 침공하자, 석우로가 걷지도 못하는, 후에 흘해왕이 되는 어린 아들과 함께 왜 진영으로 무마하러 갔지만, 왜군이 석우로를 태워 죽였고, 석우로의 아들은 다른 사람이 안아서 돌아왔으며, 석우로의 부인이 미추왕 때 방문한 왜국 사신을 태워 죽여 원수를 갚았고 왜국이 다시 침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실일 수 없다. 먼저 석우로의 사망 시기가 『삼국사』 「신라본기」의 249년과 상이하며, 석우로가 죽을 수도 있는 왜진영에 간다는 것은 거의 개연성이 없다. 설사 석우로가 결벽증이 있어 왜군에 자기의 생명을 내맡길 정도의 무모한 행위를 하였더라도,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들을 데려갈 가능성은 없다. 또한 『삼국사』 「신라본기」의 249년 기사는 왜인이 석우로를 죽였다고만 하고 왜군의 침략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249년이나 253년에 왜군이 침략하였고 「석우로열전」의 내용 대로 왕이 수도를 떠나 도망갈 정도의 대규모의 침략이었다면 석우로를 죽였다는 간단한 언급만으로 당시 왜국의 침략을 기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석우로의 부인이 사적으로 왜국의 사신을 대접하려는 것을, 모든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하는 미추왕이 허락하는 것도 거의 개연성이 없으며, 「신라본기」에는 미추왕 시기 왜의 침략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첨해왕과 장훤이 왜인을 이용하여 석우로를 암살한 후, 석우로 암살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공의 이야기를 퍼뜨렸고, 여기에 살이 붙어 생성된 설화가 열전에 실린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골정계 석씨와 장씨(김씨)의 연합정권
장훤이 신라로 이주하자, 병권을 장악한 석우로에 대항하기 위해 첨해가 장훤에게 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하였을 것이다. 첨해는 자신 다음 왕위를 장훤의 아들인 미추에게 준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첨해와 장훤은 장훤 아들들의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첨해의 외가에 입적시키고, 미추는 조분왕의 딸과 혼인시켰다. 첨해왕 사후 석씨 집단은 미추를 왕으로 만들어 약속을 이행하였다.
미추왕 사후 석씨가 다시 왕이 되었다. 석우로 사후 석우로가 가졌던 군권을 첨해왕이 가져왔을 것이므로 석씨와 장씨의 세력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서 첨해왕과 장훤의 약속이 계속 이행되었을 것이다. 미추왕 2년(263년) 임명된 서불한 양부는 석씨계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유례왕은 291년, 혈통상 장씨이지만 김씨가에 입적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구를 이벌찬에 임명하여 중요 국정을 의논하였고 297년에는 장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장흔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장씨도 이서고국의 침입 시 신라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장씨의 군대가 신비한 군사로서 미추왕의 음병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장씨 집단이 신라 정부군과는 별개의 군대를 보유하였음을 의미한다. 기림왕도 298년 12월 즉위 바로 후인 299년 1월 장흔을 이찬에 임명하고 군권을 주었다.
석씨 정권의 종말
기림왕은 장씨(김씨) 집단의 간섭에 기분이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기림왕은 307년 나라 이름을 ‘계림’에서 ‘신라’로 복구하는데, 계림은 탈해왕이 김알지의 계림국을 신라로 포섭하면서 양보한 국호이다. 장씨 집단이 김씨는 아니지만 김씨로 포장되어 있으므로, 국호라도 탈해왕 시의 국호로 복구시키려는 마음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림왕 사후 이매계인 흘해왕이 왕위에 오른다. 흘해왕은 장씨 집단이 석우로를 살해했음을 알았을 것이다. 흘해왕은 311년 급리를 아찬에 임명하고 중요 국정과 군사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345년에는 강세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급리와 강세는 장씨 세력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에는 흘해왕 말기인 350년부터 356년까지 기사가 없다. 이 시기에 차기 왕권을 두고 석씨와 장씨(김씨)간 내전에 가까운 권력 투쟁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현재 석씨가 희성이 된 이유는 이때 장씨(김씨) 세력이 석씨를 거의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김씨(장씨) 세력 이주의 증거
『북사』 「신라전」 외에도, 적석목곽분이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이들의 이주를 증명한다. 강단 유사고고학은 황남동 미추왕릉이 눌지왕 시, 덧널무덤(목곽분)에서 눌지왕 시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수즙된 것이라 주장하나, 장씨 세력의 묘제가 적석목곽분이었으므로 묘 형태가 바뀐 것은 아니다. 장씨 왕들이 그들의 묘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3세기 미추왕릉과,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이 형태가 같다. 이들은 고구려 서북쪽 변방, 즉 몽골 서쪽의 유목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순장이 장씨가 왕이 된 후 갑자기 나타나서 지증왕이 금지시킬 때까지 지속되는 것도 이들 장씨 집단이 고구려 서북방의 유목 집단이었음을 실증한다. 마립간도 북방민의 수장 칭호였을 것이다.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는 전쟁을 하는데, 백제는 366년과 368년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 하나, 장씨 정권은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 망명 시 백제의 소환 요구를 거부한다. 이들은 고구려 출신이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고구려 쪽으로 기운 듯 보인다. 나물왕은 377년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81년에도 위두를 전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에서 와서 서역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여 ‘계림로 보검’이나 ‘로만 글라스’와 같은 물품을 취득하였을 것이다.
나물왕 시 신라는 실질상 고구려의 위성국이 되었다. 특히 2019년 3차원 스캐닝으로 충주고구려비 전면 상단의 글자가 ‘永樂七年歲在丁酉’ 즉 397년으로 판독되었는데, 비문에 있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과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는 구절을, 391년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볼모를 받았다는 『삼국사』의 기사와 함께 고려하면, 고구려는 391년 1월 이전 신라를 굴복시켜 실성을 인질로 받았으며, 고구려군을 신라에 주둔시켜 신라의 통제와 백제의 공격에 활용하였고, 397년 이전에 백제 영토였던 충주를 점령하고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강단 사이비들은 충주고구려비의 397년이 그들의 장수왕 남하설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사실성을 입증하므로, 충주고구려비의 과학적 판독결과조차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인질이었던 실성이 401년 7월 신라로 돌아간 직후인 402년 2월 나물왕이 죽고 실성이 왕이 된다. 나물왕이 고령으로 죽을 것 같자, 고구려가 실성을 차기 신라왕으로 임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물왕이 실성을 인질로 보냈고, 실성왕은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과 복호를 인질로 보냈고 눌지를 살해하려 했다. 이는 나물왕과 실성왕의 세력 기반이 완전히 달랐음과 실성왕은 눌지를 살해해야만 아들에 왕위를 물려줄 수 있는 미약한 권력의 소유자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실성왕의 비는 장씨(김씨)들이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석씨이다. 따라서 실성왕은 김알지의 진정한 후손으로서 신라왕이 된 유일한 인물로 추정된다.
실성왕은 눌지를 고구려를 이용하여 제거하려 하였으나 고구려는 오히려 눌지를 지지하며 실성왕을 제거하였다. 실성왕이 신라의 소유가 된 전라도왜를 고구려 위성국으로 보내지 않으려 하면서 잦은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신라는 405년과 407년 왜(열도고구려)의 침략을 받았고, 408년 대마도의 왜 군영을 공격하려다 포기하였고, 415년 왜인과 풍도에서 싸웠다.
눌지왕은 실성왕 사례로부터 고구려에 대한 예속이 왕권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눌지왕은 실성왕계의 원 김씨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고구려가 魏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틈을 타서, 눌지왕 17년(433년) 백제와 동맹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예속관계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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