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56

역사회복 2026. 4. 14. 12:42

https://youtu.be/l3e25UsW9VE

 

(2) 신라와 관련하여 왜()로 기술된 세력의 실체

 

강단 유사사학은 신라와 관련된 왜가 나오면 무조건 열도의 왜집단 즉 가공의 야마토왜 왕국을 상정하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 조선총독부 소설의 추종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와 관련하여 기술된 왜는 왜집단인 경우보다 열도의 가야 백제 고구려 세력인 경우가 더 많다. 열도에 있는 세력을 지역명인 왜로 표시하여, 다양한 세력이 모두 왜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신라와 관련된 왜는 그 실질에 따라 구분하여야 한다.

 

의 왜

BCE 50년과 CE 14년에 왜가 신라를 침략하는데 당시 신라가 에 있으므로 이 왜는 신라에 참여하지 않은 의 즉 황하 하류의 왜집단을 의미한다. CE 59년 신라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는데 당시는 경주로의 이동 전이므로 역시 의 왜이다.

 

전라도왜

CE 73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략하였다. 백제는 경상도로 이전한 신라에게 복속을 요구하였으나 신라는 거부한다. 64년부터 76년까지 백제와 신라는 전쟁중이었으므로, 73년 신라를 공격한 왜는 백제가 신라와의 전쟁에 동원한 전라도(영산강과 섬진강) 왜집단이다. 193년 기근으로 신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왜, 208년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왜, 209년 가야와 신라를 공격한 포상팔국, 212년 가야를 공격한 포상삼국도 모두 전라도왜이다.

전라도왜는 399년 신라에 대규모로 항복하였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한반도에서는 한수 이북의 여러 성을 뺏겼고 요동반도에서는 관미성을 뺏겼고, 급기야 396년에는 백제 경제의 핵심 지역인 (황하 동쪽 제수 북쪽) 북부를 뺏겼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반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요동반도에서 393년 관미성 회복에 실패하였고 394년 수곡성 부근 싸움에서도 졌다. 한반도에서는 395년 패수 전투에서 졌다. 고구려와 연합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선 전라도왜와 열도주민으로부터의 징발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라도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상당수의 전라도왜가 공격하는 척하면서 신라로 도망가서 항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광개토대왕릉비 기해년(399)조에 나물왕이 신라를 침입한 왜인들을 백성으로 삼았다고 광개토대왕에게 보고하였다고 기술되어 있고, 삼국사에도 399년 거듭된 전투로 징집이 증가하여 백성들이 신라로 달아나 호구가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신라전에도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5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399년 신라로 항복한 왜인들을 광개토대왕이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로 보낸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이 야마토왜 왕국이라 거짓말하는 대왜의 실체는 백제의 수탈에 못 견뎌 신라로 도망간 신라의 전쟁포로였고, 광개토대왕의 명령에 따라 열도의 고구려 위성국으로 끌려가서 나라의 개척에 사역되었다가, 백제가 나라를 탈환하자 다시 백제의 주민이 된 피지배민에 불과하다. 일제·강단 사이비들은 야마토 왕국의 가공성을 은폐하기 위해 전라도왜를 부정하고, 포상팔국의 신라·가야 침략을 가야의 내분으로 날조하고, 광개토대왕릉비 기해년조의 글자를 조작하여 오역하고, 북사신라전을 오역하고 있다.

 

 

구주의 가야 분국

121년 왜가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122년 왜의 대규모 침략 소문으로 사람들이 도망가며, 123년에는 왜와 강화한다.

이보다 앞서 신라는 94년과 96 가야의 침략을 물리치고, 97년 가야와 화친한다. 102년에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분쟁과 관련하여 가야와 신라의 견해 차이가 있었으며, 106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고, 1152월 가야가 신라를 침략하고, 1157월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다 복병을 만나 후퇴하며 116년 가야를 공격하였으나 비가 와서 돌아왔다. 따라서 121, 122, 123년의 왜는 구주의 가야 분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와의 다툼에서 가야가 밀리자 가야는 121년 구주의 가야 분국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고, 이 공격이 왜의 공격 소문만으로 신라인들이 골짜기로 도망갈 정도로 효과가 있어 신라와 가야는 123년에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32년과 233년 왜가 다시 침략하는데, 이는 신라와 가야가 다시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3세기 초 포상팔국의 침입으로 가야가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신라는 가야의 왕자를 인질로 받았고, 가야를 압박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공격과 간섭에 대응하여, 가야가 구주의 분국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이 232년과 233년 왜의 신라 공격이다. 따라서 여기의 왜도 구주의 가야 분국이다.

3세기 후반 고구려 탈영병들이 신라로 들어온 후 김씨로 입적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김해로 남하하여 김해와 부산에 금관국을 건국하였다. 이는 3세기 후반 이후, 김해 대성동에 대형 목곽묘가 나타나고 거기에서 고구려 양식의 무기·마구·갑주, 동복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된다. 287년부터 294년까지 왜가 신라를 침략하는데, 이는 구주의 가야 분국이, 신라에서 온 고구려 탈영병들이 김해를 침략하자, 신라가 침략한 것으로 보고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백제를 믿을 수 없어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신라는 295년에는 백제와 함께 왜를 공격하려고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그동안 신라를 괴롭혔던 구주의 가야 분국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열도의 석씨 집단

158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 왜는 열도로 건너간 시마네의 석씨집단이다. 전술하였듯이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달라왕 4(157) 연오랑이 일본으로 갔다. 이는 석씨 집단의 제철기술자들이 박씨 권력의 탄압으로 열도로 건너갔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이주로 무기와 농기구의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신라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158년 석씨 집단이 제철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기술자를 파견했다. 세오녀가 짜준 비단은 제철기술을 상징한다.

 

기내의 가야계 야마대국

173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 왜는 기내의 야마대국이다. 야마대국이 기내의 정세를 안정화시키자 신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며 신라에서 철정을 수입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여기의 왜는 기내의 가야계 야마대국이다.

 

왜부여

4세기 초 신라와 우호적 관계를 원하는 세력은 3세기 말 열도의 기내로 진출하여 야마대국을 대체한 왜부여의 의라왕이다. 300년 신라와 왜는 사신을 교환하였고, 312년 왜국 왕자는 아찬 급리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344년 왜는 혼인을 청하였으나 신라가 거절하였고, 345년에는 신라가 왜와 단교하였다. 신라는 기내로 진출한 왜부여 세력이 백제에게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왜부여와의 관계를 끝냈을 것이다.

백제의 열도 진출 시 백제에 저항한 기내 마을국가들은 백제에 패배하여 쫓겨나자, 346년과 364 신라를 침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393년 신라를 침입한 왜는 왜가 바로 금성을 공격했으므로 전라도왜가 아닌 백제 지배 하의 열도인이다. 이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 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라 묘사된 왜이다. 백제가 371년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고구려는 백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백제에 결정적으로 승리하지 못하자 고국양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391년 신라와 화친을 맺고 볼모를 받았다. 삼국사에는 392년으로 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 391년이므로 391년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만 볼모를 보냈으므로 고구려가 신라를 위협이나 무력으로 굴복시켰을 것이다. 어떻든 신라가 고구려 편에 속하게 되자, 백제는 열도인들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이 광개토대왕릉비에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393년의 공격은 신라가 이겼거나 규모가 컸으므로 신라측 사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393년 신라를 공격한 왜는 백제 지배하 열도의 소국들이다.

광개토대왕 즉위 후 백제는 계속 패배하고, 396년에서 397년 백제의 수도인 백제에서 대패하자, 열도에서의 징발을 강화하기 위해 397년 태자 전지를 왜왕으로 파견하여 열도를 직접 통치한다.

399년 전라도왜는 백제의 전쟁동원에 지쳐서 신라로 도망갔다. 광개토대왕은 이제 백제가 동원할 세력은 전지가 왜왕으로 있는 열도백제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고 열도 정벌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예상대로 400년 백제가 열도 주민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구원함은 물론 열도로 건너가서 열도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 기사 중 앞부분에 나오는 임나가라 종발성은 대마도이다. 대마도는 열도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거점이 되므로 열도백제의 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은 대마도의 임나가라 종발성을 점령하고 구주 북부를 점령하였을 것이다. 구주 남부는 중요하지 않고 시간이 지체되므로, 고구려군은 구주 남부 대신 본주와 사국 방면으로 진군하였을 것이고, 나라까지 점령하여 열도의 남북국 시대를 성립시켰다. 5세기 초, 신라의 포로가 되었던 전라도왜가 나라로 보내져서 저수지와 농경지 등을 만드는데 사역되었는데, 이는 열도의 고구려 위성국이 기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열도의 고구려 위성국

실성왕은 402년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내는데, 이는 자신을 볼모로 보냈던 나물왕에게 복수도 하면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미사흔이 보내진 왜는 기내의 고구려 위성국이다. 신라는 405년 퇴각하는 왜를 공격했고, 407년 왜가 동쪽 변경을 침범했고, 408년 대마도의 왜 군영을 공격하려다 포기하였고, 415년 왜인과 풍도에서 싸웠다. 이들 왜 역시 고구려 위성국이다.

전라도왜를 전부 나라로 보내라는 광개토대왕의 명령을 신라가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도 고구려의 연합국으로서 광개토대왕의 원정에 식량 등의 지원을 하였을 것인데, 별다른 소득은 없고, 오히려 400년의 열도 정벌과 무관하게 399년 신라에 항복한 전라도왜를 전부 나라로 보내라는 것은 신라에겐 억울한 일이었다. 신라가 403년 전라도왜를 전부 보내지 않자 405년 고구려 위성국이 분개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고구려의 힘을 등에 업은 고구려 위성국이 결국은 전라도왜를 전부 차지하였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415년까지 수차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마도와 구주 북부도 고구려 위성국의 점령하에 있었으므로 고구려 위성국의 중심지가 기내이더라도 신라를 공격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신라는 대마도가 침략의 거점임을 알고 대마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해전의 경험이 많지 않아 포기하였다.

412년 신라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고구려가 볼모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가 전후처리에 대해 불만을 갖고 반항하는 듯하자 신라에 경고하기 위해 볼모를 요구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새로 확보한 후연 지역(서진의 유주와 평주)을 경영하고 위성국으로 세운 북연을 관리하는데 집중하여야 했고, 신라 정도는 아무 때라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눌지왕은 박제상의 충성으로 418년 복호를 고구려에서 미사흔을 고구려 위성국에서 구출하였다.

431년부터 500년까지 삼국사13회 왜가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역사상 가장 왜가 지속적으로 빈번하게 침략하는 시기이다. 433년은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는 해이고, 500년 무렵은 열도에서 백제가 고구려 위성국을 다 몰아내고 열도의 남북국시대를 끝내는 시기이다. 5세기 초 광개토대왕에게 열도에서도 후퇴했던 백제는 광개토대왕 사후 열도에서는 조금씩 반격하여 5세기 말에는 열도를 백제의 관리 하에 두었고 513년 이후 나라에 실무 관료와 왜왕을 파견하여 열도 경영을 강화한다.

5세기에 백제의 열도 관료인 왜5왕이 송에 조공하는 것은 고구려 위성국과의 경쟁관계 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왜왕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면도 있지만, 왜왕 자신보다 열도 소국의 세력가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백제 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진은 13, 제는 23인의 작호를 요구하는데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 위성국을 몰아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431년 이후 5세기에 신라를 침략하는 왜는 백제에 밀려남에 따라 생존을 위해 신라로 해적질을 하러 간 고구려계 열도 소국들이다.

 

663년 백강구 전투의 왜도 백제

열도는 5세기 말부터 백제의 완전한 영토였으므로 백강구 전투의 왜는 백제의 지방인 열도로부터 동원된, 백제왕 풍의 군대이다. 따라서 백강구 전투에 관한 사료 모두에서 왜장은 명시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서기에서도 그렇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백강구 전투에서 왜국과 백제유민의 연합군이 패배했다고 거짓말하나, 사료는 모두 백강구 전투의 상대와 패배자는 백제왕 부여풍이라 하고 있다.

 


전투 상대 전투의 패배자
삼국사 遇倭人白江口 王扶餘豐脫身而走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與倭人並降
구당서
동이 백제조
遇扶餘豐之衆
於白江之口
扶餘豐脫身而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
신당서
동이 백제조
豐衆屯白江口 豐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率殘衆及倭人請命
구당서
유인궤열전
遇倭兵
於白江之口
餘豐脫身而走,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眾并耽羅國使一時並降
신당서
유인궤열전
遇倭人白江口 扶餘豐脫身走,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其眾與倭人降
자치통감 遇倭兵
於白江口
百濟王豐脫身奔高麗
王子忠勝忠志等帥眾降

 

사이비들이 주장하는 가공의 야마토왜가 구원병을 파견했다면, 전투 상대방이나 패배자에 왜국군 장수 이름이 나와야 하지만, 어느 사료에도 명시되지 않는다. 가장 직접적인 사료로 볼 수 있는 구당서신당서의 백제조는 유인궤의 전투 상대를 풍의 군대(豐之衆, 豐衆)라 명시하고 있다. 모든 사료는, 도주자는 백제왕 부여풍이고, 항복의 주체는 백제왕자 부여충승과 충지라 한다. 구당서』 『신당서는 왜인을 백제왕자가 거느리는 무리에 명시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자치통감은 왜인이 백제왕자가 거느리는 무리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보아 왜인을 명시하지도 않는다. 삼국사는 왜인이 왕자와 함께 항복하였다고 해석할 소지가 있는데, 이는 삼국사작성 시 왜국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당서』 「유인궤열전은 탐라국사까지 항복의 주체로 명시하나 왜장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일본서기에도 야마토왜 장수의 이름은 없다. 6601224일의 이야기는 천황이 복신이 요청한 대로 준비를 한다는 내용이고, 663828일의 이야기는 백강구 전투에 대한 직접적 기록임에도 작전권자를 언급하면서, 백제왕과 일본의 장군들이라고만 기술하고, 야마토왜의 장수 이름을 명시하지 않으며, 백제왕 외에 유일하게 언급하는 박시전래진은 일본서기6618월 이야기에 나오는 백제 구원군의 장수로 기재된 진조전래진과 동일인물인데 풍왕이 주유성에서 피성으로 천도할 당시 천도 불가론을 풍왕에게 간한 백제왕의 신하라고 일본서기662121일자에 기술되어 있다.일본의 장군들은 후에 첨가된 조작된 문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의해서도 백강구 전투 시 열도 군대의 지휘권은 백제왕 풍에게 있었고, 풍은 외국군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온 것이며, 열도는 백제의 지방임을 알 수 있다. 풍이 야마토왜의 인질이었다면 복신도 왕족이므로 복신이 왕이 되었을 것이나, 풍은 백제의 열도 지역을 다스리는 왜왕으로 복신보다 선순위의 왕위 계승권이 있어 백제왕이 되었을 것이다. 복신은 열도에 있는 백제왕 풍에게 신하로서 열도에서의 전쟁 준비와, 왕의 한반도에서의 전쟁 지휘를 건의하여 6619월 풍이 전장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백제가 백강구 전투 패배 이후 열도에서 산성을 쌓으면서 전쟁에 대비한 것은 열도가 백제이기 때문이다. 열도가 백제가 아닌 야마토왜라는 독립국이었다면 당과의 전쟁 시 당이나 신라와 별도의 교섭을 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교섭은 없었다. 사료상 당시의 열도 군대가 백제의 군대임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열도인의 동원을 야마토왜의 군대로 날조하면서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하고 있다.

야마토왜가 실재했고 그것의 목적이 선진문물 수용이었다면 백제가 신당연합군에 망한 이후에는 야마토왜가 백제를 지원할 필요가 없다. 선진문물 수용론은 백제 멸망 시 열도인의 총동원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야마토왜에 선진문물을 주고 백제가 용병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강단 유사사학의 정신상태는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맹신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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