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58

역사회복 2026. 4. 14. 13:40

https://youtu.be/UdEvb4ESgjo

 

18. 잃어버린 우리 역사: 열도(왜 지역)

 

(1) 야마토왜는 없었다

 

열도는 우리의 역사 영토

BCE 1000년 이후 한반도의 농경민들이 열도로 건너가 농경이 시작되고, 죠몬인이 야요이인으로 대체되었다. 야요이인은 그냥 한국인이다. 일제는 1940년 열도의 지명, 신사명, 사찰명, 성씨명, 동물명, 식물명, 가무와 음악명, 기물(器物)명 등이 모두 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조선의 국명에서 유래한 명사고-내선일체 회고자료란 책을 발간했다. 일제가 식민지배가 확고하므로 진실을 밝혀도 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여 발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8세기 말까지도 열도인은 한국문자와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옷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다. 따라서 8세기 초에 작성된 일본서기」 「고사기는 한국말로 쓰여져 있어야 하나 후세(평안시대와 그 이후)의 문자와 말로 조작되어 있다.

열도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의 100여개 소국시대, 야마대(야마일)라는 가야계 국가가 중심국인 마을연맹체 시대, 3세기 말 이후 백제 담로의 소국 관리시대, 5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분할 지배시대, 6세기 이후 백제 영토인 시대, 672년부터 700년까지의 신라 영토인 시대를 거친다. 701년 백제는 신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이라 한다.

일본 제국주의 유사학문은 열도가 한국의 역사 영토였음을 부정하기 위해, 한국어와 일본어의 동일 계통성을 부정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종적 동일성을 부정하고 있다. 한국의 일제 추종 유사학문들도 이들에 동조하고 있다.

 

열도에서는 자체적인 고대국가가 성립하지 못함

BCE 1000년 이후 한반도의 농경민들이 열도로 건너가 농경이 시작되었지만, 넓은 평야와 양질의 철광석이 없어 자체적으로 고대국가가 발생하지 못하였다. 열도는 마을국가 단계에서 열국(가야 왜부여 백제 고구려)의 영토나 영향권으로 흡수되었다.

신라의 제철 기술자들인 석씨 집단이 박씨 왕권에 의해 탄압받아 열도로 이주하였어도 열도에는 철광석이 없어 철정을 생산할 수 없었다. 강단 유사사학은 철정도 생산할 수 없었던 가공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에 강력한 영향을 줄 정도의 군사력이 있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로 그들의 유사사학성을 광고하고 있다.

 

열도인 중 왜집단은 일부에 불과함

삼국지후한서는 왜집단의 왜와 열도를 의미하는 왜를 혼동하여 열도의 나라를 모두 왜라고 기술하면서 문신을 한다는 왜집단의 특성을 함께 기술하고 있다. 한맥예가 모두 열도로 왔으므로 문신을 한다는 것은 왜집단의 특성이지 열도인의 특성은 아니다. 어민인 왜집단이 먼저 구주 북부로 진출하여 열도를 왜라 하였지만, 열도로의 이주민의 주는 농경민이었다. 왜집단이 모두 어민이었던 것은 아니며 당시에는 왜집단도 농업을 하였다. 박씨 권력의 탄압으로 인해, 2세기에 열도로 이주한 신라의 석씨 집단은 왜집단으로서 제철기술자들이었다.

5세기 초 전라도왜의 상당수가 신라에 항복하여 고구려 위성국의 나라 지역으로 보내졌는데, 이들을 대왜라 불렀다. 즉 열도에 왜집단이 있었어도 기존 왜집단은 당시 이송된 전라도왜와 비교하여 소수였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에서도 대왜는 자주 언급되나 다른 왜집단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열도인 중 왜집단의 비중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방후원분은 전통적인 묘제

전방후원분은 백두산 서편의 환국에서 기원하였고, 홍산문화에서도 발견된다. 적석분 형태의 전방후원분은 압록강변과 한강변 등 한반도에서도 발견되고 열도에서도 발견되는데 한반도의 것이 시기가 앞선다. 봉토분의 전방후원분도 황해도와 한강변에서 발견되는데 역시 열도의 것보다 시기가 빠르다. 전방후원분 이전의 묘제로 여겨지는 주구묘도 한반도의 것이 열도의 것보다 역시 시기가 앞선다.

열도로의 이주가 BCE 1000년 이후 즉 삼조선 시기인데, 당시 지배층의 분묘 형태가 전방후원분이었을 것이므로, 열도인들은 지배층의 분묘를 전방후원분으로 하였을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전방후원분의 유행이 중단되나, 열도는 새로운 묘제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전방후원분 시기 건너간 이주민들은 전방후원분을 유지하였다. 가야계가 열도로 진출하자, 가야의 쌍분에 전방후원의 형식(외관, 하니와, 주구)을 적용하는 방식이 출현하였다. 따라서 여러명이 매장되었고, 전방부에도 매장이 확인된다. 원분에 1인의 시신을 안치하고 방분에서 원분을 향해 제사지낸다는 일제 유사고고학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열도가 마을국가단계에 머물러서 각 마을마다 지배층의 무덤을 전방후원분으로 만들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배층 이외의 사람들도 소규모의 전방후원분을 만들어 많은 전방후원분이 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중엽부터 5세기 말까지 점진적으로 북부의 고구려 위성국을 점령하여 열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무령왕은 에서 고구려에 쫓겨나 수도를 한반도로 옮겼다. 백제 경제의 핵심 지역인 의 통제권을 상실한 결과, 열도 영토의 중요성이 커졌다. 백제가 많은 관리를 파견하고 절을 짓는 등 열도 경영을 강화하면서 분묘 형태도 당시의 한반도식으로 변경되어 전방후원분은 사라졌다.

 

왜집단의 무덤은 옹관묘

전방후원분은 석실묘이고 석실에 목관이나 석관이 놓이는데, 왜집단의 묘는 분구가 없거나 원형이나 사다리꼴이며, 매장은 대형 옹관에 의하는 옹관묘이다.

왜집단은 강어귀의 해안가에 정착하여 어업을 위주로 한 집단이었다.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 등 양자강 이남의 왜집단은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금방 썩는 나무관 대신 부패에 강한 토기를 관으로 사용하였다. 전라도와 북구주의 옹관묘는 왜집단이 전라도에 있었고, 북구주로도 이주하였음을 입증한다. 열도에 대형 옹관묘가 북구주에 한정된다는 것은 열도에서 왜집단이 소수였음을 의미한다. 인도 남부 지역에서도 대형 옹관묘가 고인돌이나 석곽묘와 함께 나타나는데, 옹관묘를 남긴 이들은 양자강왜 중 인도 남부로 진출한 왜집단임을 의미한다.

제철기술자들로서 내륙인들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석씨집단에선 대형 옹관묘가 일찍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도왜는 나라로 이주되었는데, 나라에 대형 옹관묘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전쟁포로로서 이들의 관습을 유지하기 어려웠거나, 대형 옹관의 생산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전라도의 전방후원분

5~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도의 전방후원분은 백제가 구주 북부인을 전라도로 이주시킨 결과 나타난 것들이다. 400년 광개토대왕은 구주 남부를 제외한 열도 전부를 점령하였다. 이 때 구주 북부 지배층 즉 백제 우호세력은 구주 남부로 대피하였다. 전라도는 399년 전라도왜가 대거 신라로 도망가서 인구가 적었으므로 백제는 땅을 상실한 이들을 전라도로 이주시켰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전라도의 전방후원분을 왜집단의 것으로 보면서, 백제가 전라도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용병인 야마토왜의 군사를 배치하였다는니, 야마토왜가 선진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항로를 관리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였다느니 하는 소설을 창작한다.

사이비들은 백제와 야마토왜가 선진문물과 군사력을 교환하였다고 주장하는데, 항로 관리인 주장은 선진문물과 군사력이 교환되었다는 그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항로를 관리할 정도였다면 선진문물을 독자적으로 수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교환이라는 코미디

사이비들이 말하는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관계는 있기 어렵다. 강단 유사사학은 야마토왜가 무기의 원료인 철정이 없어서 백제에 군사력을 제공하였고, 말 선박 군량미 등 군수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철정도 못 만들고 선진문물도 없는데 군사 강국이라는 주장은 개연성이 없다. 개연성이 없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선 특별한 사유나 상황을 제시하여 그것을 정당화해야 하지만, 강단 사이비들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용병은 먹을 것을 위해 존재할 수는 있어도 선진문물을 위해 존재하기는 어렵다. 선진문물이 용병의 보상이라는 것은 개연성이 없으므로 정당화하는 설명이 필요하다.

열도를 백제 영토로 보면, 백제가 열도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탈하거나 주민을 이주시키는 것은 당연한 국가행위가 된다. 백제의 박사 파견이나 불교 전수도 지방 경영을 위한 것이 되어 국가의 자연스런 행정 운영이 된다. 제 박사와 공인들이 순번제로 교대했다는 것은 그들이 백제의 관료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고 지방에 지배자의 수족인 관료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내는 것은 중앙정부이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야마토왜라는 실체를 상정하기 위해, 백제가 열도 지방에 전문 관료를 파견하는 것을 야마토왜의 선진문물 수용이라 날조하고, 백제가 열도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탈하는 것을 야마토왜의 군사력 제공이라 날조하고 있다. 일제와 강단은 백제가 중국 남조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남조 왕조에게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하였는가? 백제는 남조에게 형식상 사대하였지만 군수물자와 병력을 바친 적은 없다.

 

야마토왜는 가공의 왕국

701년 백제가 일본이라 하면서 독립할 때까지 열도는 우리 역사 강역이었다. 야마토왜라는 국가가 있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야마토왜는 후세에 창작된 가공의 고대국가이다.

, 大倭, 大和, 日本을 야마토라고 읽을 수 없다. 일본서기고사기는 한국어로 쓰여졌다. 1527년 간행된 훈몽자회자를 설명하며 뜻은 (왜집단)’이고 음은 라고 한다. 의 수·당 시대 발음도 이다. 日本의 수·당 시대 발음은 니폰이다. 따라서 日本을 야마토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서기日本을 야마토라 읽는다고 본문에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별칭인 일본이 백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후대에 첨부된 날조이다. 일본서기를 야마토라 읽는다고 훈점이나 주석에서 표기하고 있는데, 물론 이것들도 후대의 날조이다.

삼국지에 야마일국(邪馬壹國), 후한서에 야마대국(邪馬臺國)이 중심국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이용하여, 열도가 3세기부터 왜()집단의 야마토()라는 왕조가 있었다고 날조하기 위해, 일제 유사사학은 를 야마토라 발음하고 있다. 그러나 야마대(야마일)김해김씨선원보략(金海金氏璿源譜略)의 신녀와 함께 떠난 거등왕의 아들 선의 기사로 볼 때 여왕(여자 무당)이 있는 가야계 이주민의 나라로서 왜집단과는 무관하다. 일제가 만든 조선의 국명에서 유래한 명사고-내선일체 회고자료에 의하면, 나라와 오사카에는 백제 지명이 많고, 가야계 지명은 열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이는 가야계가 백제보다 이른 시기에 대규모로 열도에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일제 유사사학은 지역명으로 사용된 왜를 왜집단의 왜로 곡해하여 가공의 왜계 야마토 왕조를 날조하고 있다.

일제 유사사학이 야마토왜 정권이라 날조하는 나라(奈良)의 대왜는 신라에 항복한 전쟁포로로서 고구려 위성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나라로 5세기 초에 이송된 전라도왜로서 가야계의 야마대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야마대국은 예부여 의라왕이 기내로 진출할 때 정복되었다. 일본서기에서도 대왜는 일본의 일개 지역이나 속국으로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관료인 왜왕을 모델로 하는 일본의 천황이 대왜마을, 신라마을, 임나마을, 고구려마을, 백제마을을 통치하는 것을 기술하므로 대왜가 일본일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일제·강단 유사사학 날조의 핵심

일제 유사사학 날조의 핵심은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였다는 야마토가야설이 아니라 일본 즉 백제를 야마토왜로 변조한 것이다. 일본이 야마토왜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으므로, 야마토가야라는 더 큰 날조를 통해 이를 덮으려 하였다. 즉 야마토가야설은 야마토왜의 가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대마도를 반환하지 않기 위해 독도를 문제삼는 것처럼, 야마토왜의 날조를 숨기기 위해, 일제 유사사학은 야마토왜의 한반도진출이라는 더 큰 날조를 실행하였다.

 

도성도 없었던 야마토왜

백제가 열도에서 일본으로 독립하기 전 열도에는 고대국가의 왕궁이나 도성이 없었다. 일제 유사사학은 7세기 후반 설치된 등원경(藤原京 후지와라쿄)이 일본 최초의 도성이라 주장하지만, 등원경은 신라가 만든 지방도시이고, 백제가 일본으로 독립하면서 만든 평성경이 열도 최초의 도성이다. 일제 유사사학은 역대 천황들이 즉위할 때마다 새로운 궁으로 옮긴 이유를 열심히 찾고 있다. 나라도 없었고, 왕도 없었고 궁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유를 찾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백제의 파견 관료인 왜왕은 세습되는 직위가 아니었으므로 그 변경도 자주 있었고 그 거주지는 왜왕 스스로의 결정이나 백제 조정의 명령에 따라 열도 경영을 위해 탄력성 있게 조정되었을 것이며, 선임자의 집을 후임자가 뺏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도 천황의 궁 지붕이 판자면 아주 좋은 것이고 불과 며칠만에 지을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 백제는 관료인 왜왕의 반란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도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지금 일본의 천황가는 성이 없다. 그들의 성이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임을 숨기기 위함이다.

 

우연히 발굴된 유적들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천황은 날조이고 그 묘들도 날조이다. 일본 정부는 900기 정도의 왜왕묘 후보군을 두고, 학문적 근거 없이, 특정 묘를 특정 왜왕에 자의적으로 연결시켰다. 에도시대부터 존왕양이 명분으로 1965년까지 100여개의 고분이 재조성되었는데, 묘를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고 주위에 연못을 이중삼중으로 설치하는 등 완전히 변개 수준으로 하여 일본서기이상의 창작을 하였다. 마을국가 수장이나 왜왕 등 백제 관료의 분묘를 야마토왜 천황의 묘라 우기기 위해 분묘를 확대하고 변조하였다. 분묘가 발굴되는 경우 그들의 거짓말이 드러나므로, 일본 정부는 왜왕묘의 후보묘까지 과학적 조사와 발굴을 금지하고 있다. 고분을 발굴하는 경우에도 그 조사결과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인덕(仁德)묘라 주장되는 묘에서는 태풍으로 전방(前方)부에서 석곽이 노출되었는데, 발견된 동경과 환두대도가 백제의 위세품이므로, 이 묘는 백제 관료나 백제 영토 마을 수장의 묘로 추정된다. 응신(應神)묘라 주장되는 묘 주변 정비 중 많은 백제계 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이 묘도 역시 백제 관료의 묘로 추정된다. 토지주가 발굴한 후나야마 고분에서도 백제의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이 발견되어 백제 관료나 백제 영토 마을 수장의 묘로 추정된다. 원분이어서 발굴이 가능했던 후지노기(藤木)묘에서도 백제의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이 발견되어 백제 관료나 백제 영토 마을 수장의 묘로 추정된다. 주민들이 생강을 보관하기 위해 땅을 파다 발견한 다카마쓰(高松)묘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어, 나라가 고구려 위성국일 때 파견되었다가 백제에 귀부한 고구려인의 묘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우연히 발굴된 전방후원분이나 원분의 묘주는 모두 백제 고구려의 파견 관료나 백제 영토 마을 수장의 묘로 추정되므로 야마토왜라는 고대왕국이 있을 여지가 전혀 없다. 일본 정부가 천황의 묘라는 이유로 발굴을 금지하고 발굴해도 공개하지 않는 모든 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명도 없는 시대 구분

일제 유사사학은 열도의 고대사를 고분시대 아스카시대 나라시대로 구분하는데, 이는 열도의 고대사가 우리 역사였음을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소설에 의하면 야마토시대와 일본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함에도, 야마토시대라 하였다가 야마토정권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발각될까 두렵고, 일본시대라 하였다가 일본이 백제임이 알려질까 두렵고, 가공의 야마토와 실재했던 일본이 연결될 수 없음이 밝혀질까 두려워, 그들은 그들의 뿌리를 부정하고 있다. 열도의 고대사는 우리와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이므로, 날조자들 자신도 날조의 피해자에 포함된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의 특징은 자해사학이다.

 

일본서기는 문학서

일본서기는 신라에 쫓겨난 백제인들의 정신 승리를 위한 판타지소설이면서, 과거의 영광스런 백제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여 열도의 주민을 새롭게 다스리기 위해 제작한 통치신화이다. 열도인만을 다스리며 열도를 기반으로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인 701년의 일본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과거 백제관료인 왜왕은 백제왕으로부터 수여받은 삼종신기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는데 이제 백제가 없어졌으므로 정통성의 근거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민도가 달라졌으므로 과거처럼 하늘과 새와 알로 하늘로부터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일본은 오래 전에 하늘의 뜻에 따라 건국한 강력한 나라로서 열도 내의 많은 나라로부터 무수한 조공을 받고, 주변 소국을 정복하여 다스린 열도 내 황제국이었으며, 현재의 왕은 그러한 강력한 왕국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열도 주민들은 현재의 왕에게 충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날조 역사서를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관제 문학서이다. 조선이 만든 용비어천가와 그 성격이 같다. 물론 일본서기는 용비어천가에 비해 문학성도 없고, 사실의 조작도 심하여 그 품격이 매우 떨어지나, 이는 시대적 차이와 문화적 수준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문학서이지만 역사서 형식이어서, 사실로 보이는 것들로 내용을 채워넣어야 했다. 그래서 창작자는 완전히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 실제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한 가공의 기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창작 시 열국의 이주민들이 열도에 세운 마을국가들인 가라 임나 안라 백제 신라 고구려 모한 진한 등을 백제 담로와 백제의 파견관료인 백제 왜왕이 지배하는 이야기를 중심 주제로 삼고, 백제가 지배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갸야계와 고구려계가 지배하는 이야기도 활용하였다. 일본서기, 백제의 역사서에서 베낀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와 열국의 역사가 일부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일본이 한국을 고대에 지배한 나라였다고 주장하기 위한 후대의 날조에 불과하다.

 

일본서기는 꾸준하게 날조되어 왔다

일본서기720년 창작된 후에도 백제가 열도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속적으로 날조되었다. 15세기 일본어가 적혀 있으며 712년 창작된 다른 문학서인 고사기와도 많은 부분에서 불일치한다. 그러함에도 백제의 그림자를 지우지는 못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일본서기가 장기간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수없이 윤색되었다고 하면서, 백제가 야마토왜를 지배했다는 기사를 바꾸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고 말하였고, 스즈키 다케쥬(鈴木武樹)일본서기는 감추려고 하는 것이 하나도 감추어지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며, 한국사와 한·일 고대관계사를 가장 많이 왜곡한 스에마쓰 야스가즈(末松保和)일본서기에 대해 과학적 태도를 가지고 연구하면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된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스에마쓰의 말은 일본서기를 제대로 연구하면 날조된 일본 고대사는 사라지고 대왜가 백제의 한 지방으로 확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서기사후변조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시기의 조작이다. 그 시기에 120년을 더해야 하는 기사들은 원래의 일본서기에 없는 기사들을 첨부하다가 120년의 착오를 발생시킨 것들이다. 가공 기사의 개연성을 강화하기 위해 120년의 착오와 무관하게 시기를 자의적으로 변조시킨 기사들도 다수 존재한다.

일본서기에서 여성인 신공의 시기는 201년부터 269년까지인데, 이는 삼국지후한서의 비미호와 맞추기 위한 것이다. 즉 비미호 시기 조위와의 통교가 정확히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원 시기가 착오로 설정된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특히 비미호의 후계자인 일여의 266과의 통교도 일여를 왜의 여왕이라고 날조하면서 정확히 266년에 기재하고 있다.

변조자는 기내에서 마지막까지 백제에게 저항한 신라7국을 백제가 백제마을과 함께 공격한 369년의 사건을 신공이 신라를 정벌한 사건으로 변조하면서 시기에 착오를 일으켜 249년에 배치하고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관련 기사에서도 120년의 착오를 일으켰다. 신공의 신라 정벌이라는 사건의 맥락을 강화하기 위해 418년 있었던 미사흔의 귀환을 205년에 배치하였다. 또 전지왕이 백제 관료들에게 하사하기 위해 40811월에 만든 칠지도를, 가공의 신라 정벌 3년 후인 2529월 근초고왕이 보냈다고 날조하였다.

이처럼 일본서기는 시기도 맞지 않으며, 열도의 마을국가를 만주와 한반도의 열국으로 대치하여 가공의 천황과 일본의 강대함을 날조하는 내용이 상당하여 역사서로 보기는 어렵다.

일본서기사후 변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과 왜를 야마토로 읽는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본과 왜=대왜를 명확히 구분하여 왜는 일본의 속국이나 지방으로 명시하고 있다. 일본은 왜가 아니며 야마대국도 가야계로서 왜가 아니다. =대왜는 5세기 초 나라로 끌려온 전쟁포로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에 왜=대왜가 남아 있으므로 일제의 유사사학자들은 일본서기는 감추려고 하는 것이 하나도 감추어지지 않았다고 탄식하고 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강단과 재야의 사이비들은 야마토왜 왕국을 긍정하면서 일제 유사사학 이상으로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고 있다.

 

김부식이 열도사를 기술하지 않은 이유

김부식은 열도가 우리의 역사 강역임을 전혀 모르고, 열도가야 열도백제 열도고구려 모두를 왜라고 기술하였다. 특히 일본서기를 역사서로 간주하여, 왜국이라는 독립된 국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일본서기가 날조한 인질 등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김부식은 삼국사에서 왜왕 취임이나 백제 왕족이 열도에 공무로 출장가는 것을 인질로 표현했고 왜왕의 보고와 왜왕에 대한 지시를 사신(외교관계)으로 표현했다. 그는 백제의 관직명 왜왕을 왜국의 왕으로 생각하였다. 낙랑군이 요양이라고 생각하여 대륙백제의 사료를 싣지 않았던 것처럼, 김부식은 올바른 원사료를 변개(김부식의 생각에선 오류를 수정)하였거나 올바른 사료를 버리고 일본서기와 같은 그른 사료를 채택하여 기록하였다.

아신왕이 397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태자가 왜왕으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자를 왜왕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시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으로 열도 경영(물자와 인력 수탈)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신왕이 402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술을 구했다는 것은 왜왕(태자)에게 구술을 구해서 보내라 명령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이 죽은 후인 409년 왜왕이 야명주를 보내온다. 왜왕이었던 전지왕이 왕으로 취임하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올 때는 군사 1백명의 호위를 받는다. 인질을 호위해서 보내주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전지왕이 418년 보낸 비단 열 필은 왜왕에 대한 하사품이다. 비유왕 2(428)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50명이었다는 것은 그 관료가 호위병 50명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653년에 의자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왜왕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인데 무슨 우호관계를 더 맺을 수 있겠는가? 복신은 인질로 있던 풍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는데 일본서기는 풍의 귀환을 위해 5천명의 호위부대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풍이 백제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인원이다. 일본서기66327,000의 병력을 백강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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