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장수왕 한반도 남진설은 대륙의 고구려와 백제 영토를 부정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소설

역사회복 2023. 8. 11. 22:19
강단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수행한 충주고구려비의 과학적 판독도 부정

박용준은 광주드림 2023.8.11. 기고문에서 전호태가 그린 고구려의 전성기 지도를 제시하는데, 이는 한강유역을 백제 영토에서 제외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축소시킨 강단의 소설지도에 불과하다. 하옇든 그는 전호태의 지도와 이덕일이 그린 지도를 비교한 후, 사이비 역사학 신봉자들이 「전라도 천년사」 폐기를 주장하는데, 사이비 역사학은 사이비 종교나 같은 위험한 것이며, 사이비 역사학은 강단의 지지자들을 바보 취급하고 있지만, 진정한 바보는 사이비 역사학이라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박용준의 주장엔 근거가 없다. 그냥 동어반복이다.

박용준은 그가 제시하는 고구려 전성기의 지도라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그린 지도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강단이 작성한 ‘우리역사넷’에는 다음과 같이 장수왕의 한반도 남하가 기술되어 있다.​

_________________

장수왕은 475년(장수왕 63)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 원정에 나선 고구려군은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포위하고 군대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성문에 불을 질렀다. 개로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수십 기의 기병만을 이끈 채 도주하였으나 결국 붙잡혀 살해당했다. 목적을 달성한 고구려군은 백제의 백성 8,000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한성 백제 시대는 이렇게 종말을 고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의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남진 정책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장수왕대 고구려는 현재의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한편 왕과 도읍을 모두 잃은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떨어진 훨씬 남쪽 지역의 웅진(熊津)에 새 도읍을 만들고 재기를 노리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101700&code=kc_age_10

_________________

강단은 장수왕이 한성(현재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고구려 영토로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523년 무령왕이 한성으로 가서 한수 이북 주·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으며, 523년 성왕은 고구려군을 패수(한강 북쪽의 강으로 추정)에서 물리쳤으며, 548년 고구려는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즉 한반도에서 백제는 한강 유역을 잃지 않았다.

475년 고구려가 공격한 한성은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이하에서 韓이라 함, 이 지역이 백제에 망한 마한이 있던 곳임)의 백제 영토에 있던 한성이다. 韓의 백제 영토는 환황해 무역의 핵심기지이자 백제의 수도지역으로 고구려는 백제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韓의 한성을 공격했다.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을 동시에 통치해야 했던 백제는 韓 지역과 한반도에 두 개의 한성을 두었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백제 왕성은 동서 두 성이 있다고 명시한다. 고구려가 백제의 서도이자 실질적 수도인 韓 지역의 한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문자명왕 시 韓 지역 백제를 상당 부분 점령하여 무령왕이 한반도의 웅천으로 후퇴하였다. 이 상황이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 백제가 고구려에 크게 패한 후 여러 해 쇠약해지더니 남한으로 옮겨 머물렀다고 기술되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482년 말갈의 한산성 습격, 503년 말갈의 마수책과 고목성 공격, 506년 말갈의 고목성 공격, 507년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워 말갈에 대비함, 507년 고구려와 말갈이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 횡악 아래에 진을 침, 512년 원산성 가불성 함락으로 기술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재되어 있다.

강단은 『삼국사기』에 기재된 서도 한성 부근의 전쟁을 한반도의 전쟁으로 날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날조가 조선총독부가 교시한 장수왕의 충청도까지의 남하설과 불부합하자, 백제가 지명을 변경하였다거나, 『삼국사기』 기록이 착오라거나, 동성왕과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한강유역을 수복했다는 다양한 소설을 창작한다.

백제는 진흥왕 이전 한반도에서 한강 유역을 잃은 적이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553년 한강 북부의 백제 영토를 탈취하여 신주를 설치하는데, 강단에 의하면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고구려로부터 한강 북부를 탈취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강단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신라가 551년 고구려의 10군을 탈취할 때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다는 소설을 창작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554년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고, 607년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한다. 당시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을 접하지 않으며, 석두성은 고목성 부근이고(『삼국사기』 「百濟本紀」 溫祚王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髙木二城) 송산성은 석두성 부근이므로, 554년과 607년의 공격은 韓 지역 백제에 대한 공격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사이에 있는 한반도의 상황에선 이 두 공격이 잘 설명되지 않으므로 강단은 수군설, 신라 협조설, 서해안 고구려 영토설 등 탁월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장수왕과 그 이후 고구려 왕들은 한반도에서 남하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대륙에서의 남하정책을 채택하여, 韓 지역 백제를 약화시키고, 백제의 무역을 방해하였다. 476년과 484년 백제가 남조에 보내는 사신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되돌아왔는데, 이는 환황해 항로의 백제 지배가 깨졌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약화는 해양 지배의 약화에서 시작되었다. 고구려가 韓 지역을 점령해야 백제의 해상교통을 더 쉽게 방해할 수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남하는 韓 지역에서 있었다. 환황해 해상교통의 핵심기지인 韓의 한성에 백제왕이 있을 수 없도록 공격하였다는 것은 해상 교역로의 봉쇄를 통해 백제를 약화 시키려는 고구려의 전략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진흥왕이 한강 북부를 점령한 후에는 고구려가 백제로 남하할 수도 없었다.

대륙의 백제와 고구려 영토를 부정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여러 사서에 부합하지 않는 소설을 창작하였고, 강단은 이를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 그래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 소설의 문단 사이에 모순이 발생할 때마다 또다른 소설적 창의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모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료를 무시한다.

특히 2019년 3차원 스캐닝으로 충주고구려비 전면 상단의 글자가 ‘永樂七年歲在丁酉’ 즉 397년으로 판독되었다(이재환, 「永樂 7年’ 판독에 기반한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 검토와 충주 지역의 接境性」, 『목간과문자,27』, 2021. 11쪽.) 비문에 있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과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는 구절을, 391년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볼모를 받았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와 함께 고려하면, 고구려는 391년 1월 이전 신라를 굴복시켜 실성을 인질로 받았으며, 고구려군을 신라에 주둔시켜 신라의 통제와 백제의 공격에 활용하였고, 397년 이전에 백제 영토였던 충주를 점령하고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강단은 충주고구려비의 397년이 그들의 장수왕 남하설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사실성을 입증하므로, 충주고구려비의 과학적 판독결과조차 부정하고 있다.[양인호, 고태진, 「충주 고구려비 공동 판독안」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98)』, 2020. 5-8쪽]

객관적 사료와 과학적 증거에 의해 역사를 써야 한다. 그러나 강단은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수호하기 위해 사료를 조작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실증이라는 표현은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강단의 소설은 우리 역사가 아니다. 우리 역사는 우리 스스로 밝혀나가야 한다. 강단이 말하므로 역사라는 주장은 조선총독부가 창작한 소설이 우리 역사라는 말과 완벽히 일치한다.

이 글에 대해서도 강단의 댓글부대는 근거 없는 비난으로 댓글창을 도배할 것이다. 강단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이비 환빠 등 무의미한 언어폭력과 인신공격을 수행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실증적 과학적 연구에 대해서는 그들의 소설을 사용하여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본적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필자의 글에 기본적인 논리와 근거를 갖춘 반박글을 광주드림에 투고하여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강단의 소설을 버리고 진정한 우리 역사를 찾는 길에 함께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