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길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이 사기인 이유를 우리 모두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재야유사사학은 강단의 사기를 낱낱이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영식 인제대 명예교수 교수는 한겨레를 통해 '김해시·전라도 지역사 편찬 논란…식민사학 시비에 발목 잡힌 역사서'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95628.html
란 글을 발표하였다. 그의 글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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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연한 식민사학 시비가 새로운 지역사 편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문과 다라의 지명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등재가 확실시되자 이번에는 같은 이유로 경남 김해시와 전라도의 지역사 편찬 저지에 나서고 있다. 모처럼 지방정부가 결심한 지역사 편찬사업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중앙 중심주의적 역사관에 가려 있던 지역사의 특수성과 역사상을 조명하고자 했던 지역사 복원과 편찬에 친일 식민사관의 낙인을 찍어 반대 소동을 벌이고 있음에는 아연실색할 뿐이다. 심한 오해와 의도적 왜곡으로 선동하는 시끄러운 소수에게 대꾸할 필요는 없지만, 민원을 제기했던 시민들에게는 성실하게 답변할 의무가 있다.
첫째, 일본서기 사용은 불가하다는 원칙적 반대가 있다. 이전 세대에게 ‘일본서기는 거짓말 책(위서)’이라는 게 상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에 천관우 선생이 “일본서기는 위서가 아니라 재미있는 책”이라 선언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가야사’를 발표한 이래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길이 열렸다. 이후 임나일본부설의 극복과 가야사 복원은 물론, 백제사와 신라사 등 우리 고대사의 새로운 역사적 장면을 복원하는 노력이 진행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아직도 일본서기의 황국사관을 겁내 건드리지 못할 종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구세대의 잔재이며, 그동안 쌓아 올렸던 학술적 성과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둘째, 일본서기가 지배 대상으로 설정했던 지명 사용은 식민사학이라는 의견이다. 일본서기 신공기에 기록된 침미다례는 전남 해남, 포미지는 전북 정읍, 벽중은 김제, 그리고 계체기에 기록된 기문은 남원으로 서술해 왜의 식민지로 만들었단다. 전라도 천년사와 김해시사 어디에도 이 지역을 왜의 식민지로 기술한 부분은 전혀 없다. 기문을 남원의 운봉으로, 침미다례를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추정)하지만, 여기에서는 왜가 아닌 가야와 마한·백제 계통의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서기의 기문과 침미다례 등을 왜의 지배와 전혀 무관한 가야와 마한의 역사로 서술한 것이다.
셋째, 일본서기의 임나와 관련 국명·지명을 한반도에서 구하면 식민사학이라며, 임나 관련 국가 모두를 삼한·삼국·가야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해 건국했던 분국들로 보는 이른바 북한 분국론을 맹종하는 의견이다. 임나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임나가라(400년), 삼국사기 강수 전의 임나가라(7세기),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문의 임나왕족(924년), 한원의 임나(당대)처럼 고구려·신라인과 중국인은 보다 일찍 가야를 임나로 기록했었다. 광개토대왕이 임나가라를 치러 대한해협을 건넜던 것도 아니었다. 보병과 기병 5만으로 기록했을 뿐, 대방 해역에서 활동했던 ‘수군’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했던 북한의 박시형 등도 임나가라는 김해나 고령의 가야라 했다. 아울러 신라의 강수나 진경대사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서기는 541년과 544년에 백제 성왕이 개최했던 2차례 사비회의에 아라, 가라, 다라 등의 참가를 기록했다. 이 백제 성왕을 일본열도의 분국왕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비, 곧 부여에 찾아갔던 나라들 역시 백제 인접의 가야왕국들이었다. 일본의 지배란 황국사관적 내용을 걸러낸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하지 않는 백제사와 가야사의 새로운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 우리가 선학들과 다르게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을 진전시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국사의 균형적 서술과 지역사 복원의 사명에서 많은 역사학 연구자들이 연구와 집필에 동참했다. 이런 학자들에게 무슨 득이 있다고 식민사학을 계승 전파하려 하겠는가? 어려운 유학생활에 독립운동처럼 임나일본부설 타파에 매진했던 학자도 있고, 지역사의 새로운 발견에 평생을 바쳤던 학자도 있다. 지역사에 대한 의도적 왜곡과 마녀사냥의 선동으로 어느새 자기검열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학문의 자유와 새로운 지역사가 멀리 사라지는 순간이다.
식민사학과 반일을 천하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선동가들은 표만 의식하는 정치인들을 회유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사실관계의 확인도 없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이들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앞서 주도했던 가야고분군 등재신청 반대 국민청원은 8천여 명의 동의에 그쳐 실패했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시끄럽지만 선동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시끄러운 소수에 현혹돼 다수의 국민을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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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은 " 일본서기의 황국사관을 겁내 건드리지 못할 종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구세대의 잔재이며, 그동안 쌓아 올렸던 학술적 성과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라고 말하며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지당한 말이다.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영식 등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조선총독부 소설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서기를 날조하고 있어 문제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날조하여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열도의 사실이 아닌 한반도 남부의 사실로 날조한다. 임나가, 가야가 망한 후 100년이나 외교를 하고 전쟁을 하여도,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야라고 주장한다. 일본왕을 야마토왜왕으로 날조한다. 이 모든 일은 조선총독부에서 했던 일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열도가 우리의 고대사강역임을 부인하고, 피지배민에 불과했던 대왜를 열도를 지배한 가공의 야마토정권으로 날조하면서 야마토왜가 한반도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조선총독부 소설을 승계하고 있다.
2.
이영식은 전라도천년사는 기문을 남원의 운봉으로, 침미다례를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추정)하며, 기문과 침미다례는 가야와 마한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영식의 주장엔 실증이 전혀 없다. 조선총독부 소설을 지키기 위한 소설에 불과하다.
남원은 가야가 아니다. 강단유사사학이 기문국이라 주장하는 남원의 고분에서는 백제계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가 출토되었다(배기동, 「백제의 땅에서 왜 가야의 유적이, 미궁의 ‘전북 가야’ 미스터리」, 한국일보). 지방세력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이 백제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은 백제가 지배한 지역이지 가야일 수가 없다. 토기와 무덤의 구조 등을 근거로 남원 고분을 가야계 고분이라 하면서 남원을 가야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토기나 무덤의 구조는 지배세력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토착적 문화이며, 토기나 무덤양식이 같아도 지배자에 따라 백제가 지배한 곳은 백제가 되고, 가야가 지배한 곳은 가야가 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강단유사사학은 위세품이 기문국이 백제와 교역한 증거라고 주장하는데, 위세품은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이므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본열도 등 백제의 위세품이 나온 곳도 백제의 영토가 아니라 백제와 교역한 독립국이 되어 백제의 영토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또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이라는 지명도 일본 열도에 정착한 한반도 이주민의 소국 이름이므로 열도의 지명이지 한반도의 지명이 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침미다례를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하며 마한이라 하는데 마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9년에 백제에 멸망되었다. 그들의 소설 속의 마한은 백제를 축소하기 위하여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한 멸망 시기는 갈수록 늦춰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문이니 침미다례니 하는 지명이 한반도 남부에 가능한 것은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한 전제에서 가능한 소리이다. 일본서기를 신라7국으로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기문이니 침미다례니 하는 지명들은 열도의 지명이다. 그들은 음상사를 따지는데 열도에 더 정확한 음상사 지명이 훨씬 많다.
3.
이영식은 임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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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임나가라(400년), 삼국사기 강수 전의 임나가라(7세기),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문의 임나왕족(924년), 한원의 임나(당대)처럼 고구려·신라인과 중국인은 보다 일찍 가야를 임나로 기록했었다. 광개토대왕이 임나가라를 치러 대한해협을 건넜던 것도 아니었다. 보병과 기병 5만으로 기록했을 뿐, 대방 해역에서 활동했던 ‘수군’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했던 북한의 박시형 등도 임나가라는 김해나 고령의 가야라 했다. 아울러 신라의 강수나 진경대사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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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400년조 비문은 대부분 지워졌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결자는 대부분 400년의 것이다. 이영식은 결자를 추정하는 놀라운 초능력자이다. 광개토대왕의 열도정벌이 있어 열도가 백제와 고구려의 남북국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왜왕 무의 북진이 가능하고, 열도의 파괴된 흔적이 있는 고구려계의 유물 유적이 가능하다.
진경대사탑비문의 임나왕족은 임나가 열도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강단유사사학은 대사의 선조가 임나(任那)의 왕족이었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신라에 귀의하였다고 비문에 쓰여 있으므로, 임나가 김해가야를 의미한다고 한다.
임나=가야설처럼 탑비문의 임나를 김해가야로 해석하면 진경대사의 선조를 괴롭힌 나라는 신라가 된다. 김해가야를 매번 괴롭힐 수 있었던 나라는 신라이지 백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명왕은 진경대사에게 제자의 예를 표할 정도로 존경하여서 직접 진경대사의 비문을 지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진경대사탑비」 개관 (2022.4.25. 현재)
임나가 김해가야라면 경명왕은 신라가 임나를 괴롭힌 것을 명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부처님의 섭리라거가 좋은 인연이라거나 하는 다른 좋은 표현으로 그의 선조가 신라에 귀부했다고 기술했을 것이다. 경명왕은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선조를 신라가 괴롭힌 사실을 탑비에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 자체도 隣兵의 隣과 投於我國의 我를 달리 쓰고 있어 隣은 신라가 아님이 명확하다. 따라서 임나는 김해의 가야가 아니다.
강단유사사학은 소설을 쓰기 위해 근거도 아닌 것을 근거라고 한다. 어떻게 이웃나라가 우리나라가 되는가? 이웃나라를 우리나라와 같다 하면 아주 이상한 문장이 된다. 이웃나라를 우리나라와 같다고 주장하기 위해선 보강증거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들은 그냥 주장한다. 사슴을 말이라 하는 그들은 그냥 주장만 하면 된다. 교수되고 싶은 그들의 똥개들은 일제 똥처먹은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조건 추종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는 전혀 임나가 가야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임나족) 사람이라는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라고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강수열전」 관련부분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4.25. 현재)
그들이 하는 말은 전혀 임나가량이 가야라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충주에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만 이주시켰다고 볼 수 없으며, 설사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만 이주시켰더라도 그 선조의 고향이 모두 고령이나 김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임나가 가야이므로 임나가량이 가야라고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만약 임나가량이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를 의미한다면, 강수는 임나를 언급해서도 안 된다. 가야가 망한 지 오래되었는데, 왕에게 가야를 들먹이는 것은 신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강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령이나 김해의 신라지명으로 말해야 한다. 임나가 신라나 신라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수는 그 선조가 임나국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에는 강수 아버지의 이름이 석체(昔諦)로 나오는데, 강수의 성이 昔이라면 강수의 선조는 신라에서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의 석씨 집단이 나중에 다시 신라로 되돌아온 경우로 볼 수도 있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열도로의 이동이 주가 되었지만, 진경대사와 강수의 사례로부터 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동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영식은 "아울러 신라의 강수나 진경대사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의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 강수와 진경대사의 선조는 일본인 즉 열도백제인은 아니고 열도신라인이나 열도가야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열도신라인과 열도 가야인이 백제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영식은 소위 안라회의 사비회의를 한반도의 일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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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는 541년과 544년에 백제 성왕이 개최했던 2차례 사비회의에 아라, 가라, 다라 등의 참가를 기록했다. 이 백제 성왕을 일본열도의 분국왕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비, 곧 부여에 찾아갔던 나라들 역시 백제 인접의 가야왕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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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유사사학은 가야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 본다. 물론 근거는 없다. 열도에서 열도백제의 지배 하에 있는 여러 소국들을 가야로 날조하여 가야가 소국연맹체라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는 회의는 한반도와 전혀 무관한 일이다.
강단유사사학은 함안의 안라국이 주도하여, 신라에 의해 멸망된 남가라와 탁기탄 등의 남부가야를 재건하기 위해 529년 안라, 왜(倭), 백제, 신라가 안라에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일본서기에 왜는 참석자로 기재되어 있지도 않지만, 가공의 야마토왜를 주장하기 위해 강단유사사학은 참석자를 일본이 아닌 왜라고 날조한다), 안라가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외교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반도 가야의 경우는, 신라가 502년 고성을 532년 김해를 병합하므로, 529년 이전 남가라(강단유사사학은 김해를 남가라라 한다)가 망해서 529년 안라가 남가라 재건을 도모한다는 것은 열도의 이야기이다. 함안의 마을 국가가 백제와 신라를 불러들여 회의를 한다는 것부터 코미디이고 더 가관은 백제대표는 회의장인 고당에 앉지도 못하고 땅에 앉아서 회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백제대표가 땅에서 회의에 참석한 것은, 안라가 백제가 기문 대사를 취할 때는 백제 편이었다가, 안라회의 시에는 백제를 견제하기 때문이라 한다. 여러 달에 겨우 두 세번 회의가 있었던 것도 우습지만, 백미는 백제 대표가 당 아래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백제가 함안 마을 국가가 개최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상식적으로 함안이 다 도륙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백제 대표를 땅바닥에 놓아 둘 수 없고, 만약 그랬다면 백제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지, 거기에 남아서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열도 소국들간의 이야기라 하여도 코미디인데, 이러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백제와 연결시키는 강단유사사학의 탁월함에 숨이 멈춰질 뿐이다. 그들은 안라를 한반도에 정착시키기 위해 철면피를 뒤집어쓰고서라도 일제유사사학에 헌신하는 경이로운 투혼을 발휘한다.
이영식이 말하는 사비회의에 대해,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임나의 주도국으로 신라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백제는 임나 부흥보다는 고구려와의 대결을 위해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여 성과가 없었다거나, 안라가 친신라 경향이 있었고 백제는 이러한 정황을 반전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고 분석하기도 하면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한반도의 사실로서 주장한다.
그러나 541년 현재 가야는 대가야 즉 합천 고령(성산면 포함)만 남고 모두 신라에 점령된 상태인데, 소위 사비회의에는 임나십국 중 8국이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가야의 실질적 리더로서 회의에 참석한다고 하거나 백제가 안라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려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하여 안라를 회의의 중요한 국가로 보고 있는데, 함안은 법흥왕 시에 이미 신라에 점령당하여 아무리 늦어도 540년엔 신라의 영토이다. 그리고 함안은 대가야의 지방이었던 곳으로 가야의 리더가 될 수도 없다.
또 신라가 가야를 잠식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여도 가야의 구성국인 안라가, 친신라경향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불일치하는 그들의 공상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열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이야기로 날조하기 위해 가야를 근거 없이 여러 갈래로 찢어놓고 있다. 물론 그들은 『삼국사』 법흥왕의 함안 점령 기록도 날조라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기존의 견해들에서도 지리지의 기록은 신라의 安羅 통합에 관련된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한편, 安羅의 신라에로의 통합을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라고 한다. 객관적 사료를 부정하는 그들의 상투적 표현은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이다.
안라는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이고, 6세기 초 이전에 모든 고구려계 국가는 백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안라는 한반도의 가야와는 전혀 무관한 나라이므로, 소위 사비회의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열도의 일이다. 대가야 이외에 안라가야가 있다는 것도, 함안이 신라의 가야 잠식 과정에서 친신라적이었다는 것도, 백제가 함안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사비회의를 도모하였다는 것도 모두 코미디이다. 가야 전체가 557년에 망해서 562년에는 신라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함안의 안라가 560년까지 존속했다는 그들의 주장도 코미디이다.
더구나 안라가 함안이 아님은 「일본서기」에 의해 입증된다. 다음은 안라가 함안이 아님을 알려주는 「일본서기」 관련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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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52년 5월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황공하신 천황의 영위에 의한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ㄷ) 554년 12월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의 여러 왜신들, 임나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이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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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에서 369(249+120)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안라를 점령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함안은 가야이지 신라가 아니다. 「일본서기」의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안라를 한반도의 나라로 왈가왈부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ㄴ)에서 552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한다고 하는데, 550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지친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취하였고, 551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고, 553년에는 백제의 한강 이북을 점령하여 신주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백제 땅도 차지하여 한반도에선 고구려는 신라와만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에 도살성과 10군을 빼앗겼고 신라가 이를 돌려주지도 않았으므로 신라와 통모할 이유가 없다. 553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에선 백제를 공격할 수조차 없다. 554년 백제 웅천성 공격은 韓에서의 공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공모하여 백제와 가야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게 되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화친하여 신라를 견제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ㄷ)에서 사라와 박이 바다 북쪽의 미이거를 공격하려 한다고 백제 안라 임나가 말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박국이 고구려라 하며, 미이거는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고 한다. 바다 북쪽이라 표현했으므로 열도의 지명을 의미한다 추정되지만, 미이거가 한반도의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는 강단유사사학의 견해에 따른다 하더라도 (ㄴ)과 같은 내용이므로 한반도의 상황이라 볼 수 없다.
결국, 소위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보는 근거는 「일본서기」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이 이러한 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야마토임나설 즉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는 없다. 『삼국사기』는 절대로 믿지 않고, 횡설수설하며 불분명하게 꾸준히 조작되어온 「일본서기」는 어떻게라도 왜곡 날조해서 임나를 한반도의 가야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굳은 다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이영식 등 강단유사사학은 마치 그들의 주장이 조선총독부 소설과 다른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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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배란 황국사관적 내용을 걸러낸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하지 않는 백제사와 가야사의 새로운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 우리가 선학들과 다르게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을 진전시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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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복원해야 할 가야사와 백제사는 열도에 있다. 열도에서 가야계가 세운 임나와, 가야계 소국을 영향권 내로 흡수하는 백제의 담로나 백제의 파견관료 왜왕의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신라 7국을 임나 7국으로 날조하고, 임나 7국을 한반도에 비정한 후, 모든 열도 소국을 한반도 남부로 비정한다. 이는 조선총독부 소설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의 선학 즉 조선총독부 소설가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일본서기를 날조하여 열도의 이야기를 한반도남부의 이야기로 만든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가공정권인 야마토왜의 직접지배를 군사적 경제적 강한 영향력으로 바꾼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차이는 무의미하다. 모두 가짜 역사에 불과하고, 가공의 야마토왜 정권을 실재로 인정하고, 야마토왜의 한반도남부 진출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열도가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었음을 숨기기 위해 가공의 야마토왜정권을 만들어서 사기를 치고 있는데, 강단유사사학자들은 이들의 사기에 협조하며 대학교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부역자에 굴종하여 교수가 되었고, 굴종한 이들에 굴종하여 교수가 되는 과정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영식은 글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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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과 반일을 천하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선동가들은 표만 의식하는 정치인들을 회유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사실관계의 확인도 없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이들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앞서 주도했던 가야고분군 등재신청 반대 국민청원은 8천여 명의 동의에 그쳐 실패했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시끄럽지만 선동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시끄러운 소수에 현혹돼 다수의 국민을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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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식민사학이니 반일에는 관심이 없다. 실증적 역사에 관심이 있다. 이영식은 왜 일본서기를 날조하여 거짓 역사를 주장하는가? 그것만 대답하라. 이영식의 말대로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날조에 속고 있어, 가야고분군 등재신청 반대 국민청원은 실패했다.
이 글의 독자들께서는 역사광복군의 일원이라는 사명감으로 올바른 역사를 주위에 전파하여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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