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의 현혹스런 글에 혼란스런 분이 계신 것 같아 강단유사사학의 글에 대해 반론합니다.
다음 글은 강단유사사학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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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식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신라의 국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관건은 6촌의 성격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있다. 6촌이 어디에 있던 무엇인지가 분명해져야 이를 토대로 성립했다는 신라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워낙 영성하여 이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다. 게다가 우리 사서와 중국 사서의 내용이 서로 상치하는 듯 보여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역사적 진실은 양측 사서의 내용을 모두 긍정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한국 고대사회의 발전을 계기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향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해는 6촌을 사로국의 성립 기반으로 간주하고 그 실체는 원시공동체 단계를 갓 벗어난 촌락 혹은 부족 집단이었다고 보는 '사로6촌설'에 주로 근거해 왔다. 그리하여 사로국의 영역 확장이 일단 마무리되는 시점에 비로소 신라가 성립했으리라고 파악되고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실제의 기년보다 상당히 소급된 형태거나 조작된 형태일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로써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전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고조선의 문화 능력과 역사 경험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로6촌'은 기록을 부인하고 성립한 조어인데다 이를 입증할 다른 근거가 뚜렷한 개념도 아니어서 추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기록에 입각한다면 '진한6촌설'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며 고조선사와 삼국사 사이에 역사적 간격을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동안 연구한 바에 따르면 6촌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6촌은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진한을 이루고 있던 6개의 소국을 지칭한 것이다.
이들 소국은 마한 지역으로 남하해 온 고조선의 유민 세력이 형성한 국가체로서 과거의 일정 시기엔 독자의 소국 연맹체를 이루고 고조선의 진왕을 배출한 역사 경험을 가진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이주하여 서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진한'이라는 국가 연합체를 형성하고 이를 전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진한 전체의 지배력을 갖는 정치권력은 아직 성립하지 않았으며 각국의 왕은 마한의 '국인'으로서 그 국정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의 마한은 삼한의 최대 세력으로서 위축된 진한을 대신하여 진왕을 내고 있었다.
진왕은 진국의 왕을 가리킨 말로 진국은 본디 고조선에서 최대 세력을 이뤄 진왕을 낸 나라를 지칭하였으나 점차 고조선을 형성한 삼한제국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국호로 쓰이게 된 것 같다.
한때는 변진 제국(諸國)의 왕들이 마한인이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삼한 전체에 일정한 통치력을 가진 진왕을 마한에서 냈고 여러나라 왕이 마한의 국정에 참여하는 '국인'이었던 사정을 전한 내용으로 이해된다.
'진한6촌'은 당시 벌(伐), 화(火) 등으로 표기하고 '부리'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 실체는 '국(國)'으로서 단순한 씨, 부족이나 촌락집단이 아니었다. 이것을 촌(村)이라고 표기한 것은 신라가 성립하여 발전하는 과정에서 '부리'들이 결과적으로 지방의 촌과 성으로 편제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기원전 1세기 중엽의 '부리'는 진한을 이루고 고조선을 형성한 경험을 가진 독자 세력의 왕자(王者) 곧 간(干)이 관료 조직을 통해 민(民)과 노비를 노예제적 형태로 강력하게 지배한 작지만 그 자체 완전한 국가였다.
그러나 전에 살던 곳보다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 유이민들이 파상적으로 유입하면서 전하는 발달한 철기문화 등의 영향으로 생산력이 급속히 발전하자 민의 성장이 가속화되었고 이에 따라 진한6국의 간들은 종래의 지배체제로는 이들을 더 이상 제어하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더 강력한 지배체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신라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진한 6국의 간과 그들이 거느린 지배세력이 모여 이룬 새로운 형태의 국가였다.
그들은 경주의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서라벌을 세우고 제간(諸干)을 지배할 수 있는 간을 뽑아 거서간이라 불렀다. 6국의 지배세력은 종래대로 자기 나라를 지배하는 한편 서라벌 국정에 직접 참여하기 위한 정치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것이 6부다.
이로써 6국의 제간은 각각이 분담하여 대규모 조직으로 구성한 통합 병력 '육부병'에 기초하여 대내적으로 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자위력 또한 배가시킬 수 있었다.
초기의 신라는 6부와 동의의 개념이었다. 6부가 곧 신라였다. 따라서 신라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곧 '국인'은 6부에 속한 지배층에 국한하였다.
빈민과 노비 등 피지배층은 신라의 국인이 아니었으므로 신라왕의 지배에서 벗어나 저마다 속한 소국의 간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념과 원리상으로는 그리고 실제로도 각국의 간들이 거서간의 지배 하에 놓였으므로 모든 속국의 영토가 신라의 영토로 간주되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신라왕의 민으로 운위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6부의 합의에 반발하고 신라왕의 권위로부터 이탈하려는 지배세력이 있기도 하였지만 신라 6부를 벗어나는 일은 그리 용이하지 않았다. 심각하게 반발하다가 토벌당할 경우엔 지배하던 민을 강제 이주 형식으로 빼앗기고 그 지배세력 전체가 일거에 몰락하고 말 수도 있었다.
신라에 속한 제국의 독자성은 민에 대한 지배에 한하여 허여되었고 외교적 군사적 주권은 신라에 귀속되었다고 짐작된다.
신라가 성립한 후 6국의 간이 더 이상 마한의 국인으로 기능하지 않은 사실에서 그렇다. 봉평비의 '신라육부'란 표현은 이러한 사정에서 기원한 것이겠다.
그러므로 6부를 왕경의 행정구역이나 왕경에 사는 사람 전체에 대한 정치조직쯤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때 6촌의 위치를 경주 혹은 그 일원으로 한정시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6촌의 실체는 진한의 6국이므로 그 구체적 위치는 진한이 자리잡았던 경상도 전역에서 찾아야 한다.
「신라의 정치구조와 신분편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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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식은 기존의 사로6촌설을 부정하고 진한6촌설을 취한다고 하며, 진한 6촌의 촌은 나라라고 하며, 신라의 초기 영역은 경상도 전역이라고 한다.
서의식의 주장은 다른 강단유사사학처럼 소설이다. 전혀 근거 없이 그만의 소설을 창작한다.
1. 신라 건국의 주체
ㅇ 『三國史』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元年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시조의 성은 박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년 4월 병진일(일설에는 정월 15일)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하니 13세였다.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이 골짜기에 나누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는데,
ㅇ 『삼국사』 「신라본기」 혁거세왕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마한에 사신으로 간 호공은 조선의 유민을 辰韓의 유민이라고 구체화한다.
ㅇ 신라 건국세력은 조선의 유민이고 진한의 유민이다. 예맥조선(위만조선)이 망하고 한나라가 왕검성의 주민을 한나라 영토 내인 보정시 부근에 낙랑군을 설치하면서 이주시켰는데, 이 강제이주과정에서 韓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마한으로부터 땅을 받아 육촌에 거주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유민이다. 진한의 유민이란 것은, 단군조선(삼한조선) 이후 진한이 천자왕이고, 모한과 번한이 2인자이다. 진국이 천자국이고 모한과 번한은 진국의 번국이다. 진국은 조선민족의 나라 중 정통성이 있는 나라이다. 예맥조선이 강성한 시기 진국의 지역에는 북부여와 예맥조선이 병립하였는데 서로 진국임을 주장하였다. 예맥조선에서 韓으로 도망온 유민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진국 즉 천자국의 유민이라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을 진한의 유민이라 하였다.
ㅇ 서의식은 진한6국이 결합한 나라라고 하는데 유민들이 무슨 여섯 나라를 건국하였겠는가? 삼국사기 표현 그대로 여섯 골짜기에 살던 사람들이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나라를 만들어 마한의 횡포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ㅇ 서의식은 진한 나라들이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나, 유민들이 모여살던 것이었을 뿐이고 진한이라 자칭했을 뿐이다. 서의식의 주장은 한반도 남부에 진한 소국들이 있었다는 강단유사사학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진한은 한반도에 있었던 적이 없는 나라이다. 진한과 변한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말하는 주장은 모두 유사사학이다.
2. 신라 초기 건국지.
신라 초기 건국지, 백제초기 건국지 모두 韓이다. 그래서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
신라가 경상도에 있었다면 낙랑 왜인이 어떻게 박혁거세를 경외할 것인가? 강단유사사학은 신라가 경주라, 신의식은 그보다는 넓혀서 경상도라 하는데, 경상도와 평양은 멀다. 평양사람이 박혁거세를 존중할 이유가 없다.
韓지역은 낙랑군이 황하 건너 있고, 낙랑 동부도위는 바로 신라 북쪽에 있었다. 번한은 마한에 쫓겨 신라 옆에 있다가 진한과 병합하여 변진이 되었다. 이 변진이 신라이다.
3. 신라의 이동.
신라의 59년 韓에서 경주로의 이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명명백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이동을 부정하는 주장은 모두 유사사학이다.
(신라의 이동에 대해선 이 블로그의 글을 참조하시길)
결론: 신의식의 주장은 강단유사사학이다. 대중 속이려 약간의 립서비스 하는데 여기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 유사사학을 구분하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이야기하는가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무시하고 혼자 소설 쓰는 것들은 모두 소설가이고, 대부분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의 구도를 받아쓰기 하므로 유사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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