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 은합 2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9.장수왕 한반도 남하 소설)

1. 사료 ​ 『三國史』 「髙句麗本紀」 長壽王 63년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䧟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63년(475) 9월에 왕이 군대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 『三國史』 「百濟本紀」 武寧王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逹率沙烏等, 徴漢北州郡民年十五歳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23년(523) 봄 2월에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다. 3월에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 『三國史』 「百濟本紀」 ..

역사 2023.03.10

광개토대왕릉비문 병신년조 기사 초입부의 올바른 해석 (소위 신묘년조 비문 해석) (전치문설은 개솔)

1. 일제가 본 광개토대왕릉 병신년조 문장의 초입부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臣民(=신라)을 위하여, 영락 6년 丙申년부터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56-163쪽에 의해 入貢于가 渡海破로 변조되었다고 보았다. (날조된 글자의 글씨체가 다르고 글자의 위치도 다르다) - 계연수가 1898년 탁본한 내용을 토대로 이유립이 복원한 이유립본에 근거하여 聯侵으로 보았다. (윤창열,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整合性..

역사 202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