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본고는 이정빈의 논문에 대한 반론이다. 이정빈은 낙랑군이 4세기 전반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교치되었고, 5세기 전반 요서 지역에서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엔 근거가 전혀 없다. 낙랑군은 대동강 남쪽에도, 그가 말한 요서에도, 난하 유역에도 있었던 적이 없다. 그의 주장엔 전근대적 방법으로 역사를 추정하였던 18세기인들이 주장하고 일제가 불순한 목적으로 계승한 낙랑군 평양설에 대한 맹목적 추종만이 있다.
이문영은 「유사역사학 비판」이라는 책에서 로버트 캐롤과 로널드 프리츠를 인용하여, 유사역사학은 사료나 증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개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에 주목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이정빈은 유사사학임이 분명함도 살펴본다.
2. 낙랑군은 고조선 후기의 중심지였는가?
(1) 예맥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다
이정빈은 근거 없이 낙랑군이 고조선 후기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낙랑군과 고조선은 시대가 맞지 않아 관련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삼국유사』에 실린 조선의 역사설화는 단군이 산신이 되기 전 나이를 1908년이라 하는데, 1908년은 고조선이 존속한 기간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서기전 2세기말에 설치된 낙랑군과는 전혀 관련지을 수가 없다.
낙랑군이 설치될 당시 우리나라는 열국시대였다. 『사기』 「흉노열전」은 BCE 107년의 상황을 말하면서 “이 때 한은 동쪽으로는 예맥조선을 공격하여 군으로 삼았다”라고 하므로 한나라가 침략한 나라는 예맥조선이다. 예맥조선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이 될 수 없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고려시대에서 보면 예맥조선 이후 조선이 없으므로 예맥조선은 고조선이 될 수 없다.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명확히 다른 나라로 기술하고 있다. 이승휴도 『제왕운기』에서 우리 역사의 흐름을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순으로 제시하여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즉 예맥조선을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 예맥조선을 고조선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이다. 일제는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지우기 위해 예맥조선 이전의 역사를 모두 지우고 예맥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 하면서 고조선으로 날조하였고, 조선총독부 계승자들이 이를 승계하고 있다.
예맥조선이 있었을 때 예맥조선의 동북쪽에 북부여가 있었다. 『사기』 「화식열전」은 연 지역을 경제적 측면에서 말하면서 “북으로 오환과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맥조선과 진번의 이익을 통괄한다”라고 한다. 『삼국지』도 역계경이 우거와 정책 차이로 동쪽의 진국으로 가서 예맥조선과 무역하는 나라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 「조선열전」의 ‘眞番旁衆國’이 판본에 따라 ‘眞番旁辰國’ 또는 ‘眞番·辰國’으로 되어 있는데, ‘眞番旁辰國’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진번은 진번조선이 망한 후 하북성 북부 산악지역에 잔존한 소국으로 추정되므로 예맥조선과 북부여 이외에 다른 나라와 접하기가 어렵고, 진번 옆 진국인 북부여가 무역의 규모나 성격상 예맥조선의 무역이익 독점에 가장 강한 불만을 품고 漢과 교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고, 진번 등 나머지 소국은 예맥조선의 횡포를 알아도 보복이 두려워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맥조선은 한나라 바로 옆에 있었고, 예맥조선과 북부여가 대립하였고, 북부여 이외에도 옥저 낙랑국 등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예맥조선을 당시의 중심국으로 조작하면서 열국시대를 고조선 후기라고 하는 것은 사료에 명백히 반하는 조선총독부의 소설 즉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2)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술된 고조선의 실재성
당시 북부여를 진국이라 하였던 것은 고조선의 천자가 진한이었기 때문이다. 진국은 조선의 중심국을 의미하는 말이다.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된 단군조선은 요서에서 일어나서, 요동과 한반도의 환국세력, 중국 동해안의 청구국 세력을 전쟁으로 정복하여 통일하였다. 진한의 辰은 임금, 천자(天子)의 뜻으로 쓰였다. 辰韓은 천자왕(대왕)의 뜻인데 천자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며, 慕韓과 番韓은 비왕(좌현왕, 우현왕)의 뜻인데 비왕이 관할하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조선은 진한(辰韓) 12국은 단군이 직접 다스리고, 요동과 한반도엔 모한을 중국 동해안에는 번한을 파견하여 각각 54국과 12국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영역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에서 방사천리로 기록되어 있다. 범엽은 삼한이 모두 옛 辰國이라 하였고, 진수는 진한(辰韓)이 옛 진국(辰國)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국이 넓은 의미로는 삼한 전체이고, 좁은 의미로는 진한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임을 의미한다.
고조선이 망한 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한 즉 요서지역의 강력한 국가를 진국이라 하였다. 그래서 역계경이 북부여로 갔을 때 진국으로 갔다고 하였다.
고조선 붕괴 후 소국들은 마한이나 말갈을 자칭하였는데, 마한이나 말갈은 이인자란 뜻이다. 백제에 망하는 마한은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 지역에 있었고, 마한의 속국이었던 진한은 예맥조선이 망하자 마한으로 도망오면서 자신들이 진한 지역에서 와서 진한의 유민이라 자칭하였고, 번한은 마한에 권력을 뺏긴 원주민이다. 즉 BCE 2세기 말에 시작된 삼한은 사실상 마한 한 나라이다. 진수와 범엽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로 단군조선의 삼한 즉 소위 전삼한과 韓 지역의 마한 즉 소위 후삼한을 혼동하여, 두 시기를 하나의 시기로 알고 전삼한과 후삼한의 사실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기술하려다가 그들이 본 원사료와 어긋나게 기술하고 있다.
(3) 왕검성과 낙랑군은 다른 곳이다
이정빈은 예맥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보아 낙랑군이 고조선의 중심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맥조선은 한나라 옆에 있던 나라이고 중심국가가 아니었음은 이미 보았으며, 낙랑군은 왕검성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원래의 한나라 영토에 설치되었다. 재야와 강단의 유사사학들은 한결같이 왕검성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근거 없이 주장한다.
漢은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예맥조선과의 경계로 하였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 예맥조선으로 들어갔다. 섭하도 비왕장을 죽이고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즉 요동고새 너머 패수가 있고 패수 건너에 왕검성이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에는 요동고새가 있다.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도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다고 한다. 『상서』에 의하면, 갈석산은 황하 어귀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사기』도 황하 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며 연 지역이 발해와 갈석 사이라 한다. 『기주협우갈석도』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다고 한다. 서기전 시기에는 발해가 태행산맥 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황하도 보정시쪽을 지나 발해로 빠져나갔다. 즉 서기 전에는 보정시에 황하에서부터 태행산맥까지의 짧은 거리만 요새를 쌓으면 북방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 요새가 요동고새이고, 그 북쪽 영정하가 패수였을 것이다. 따라서 패수 동쪽에 있는 왕검성과 요동고새가 있는 낙랑군이 같은 위치일 수는 없다.
秦도 회수와 사수의 조선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러한 이주정책은 토착세력을 약화시켜 점령지를 실효지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漢의 입장에선 골머리를 썩혔던 예맥조선에 대해서도 이주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왕검성 주민들을 요동고새 내부로 이주시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사료에도 부합하고 당시 상황에서의 개연성도 매우 크다.
낙랑군에도 패수가 있는데 이는 왕검성의 패수와는 다른 강이다. 당시 사람들은 거주지 주변에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으므로 낙랑군으로 이주된 사람들은 낙랑군으로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을 것이다.
(4) 기타 낙랑군이 대동강 남쪽일 수 없는 무수한 이유들
① 낙랑군의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 『수경』과 『설문해자』는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유사사학은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 “浿水 水西至增地入海”를 근거로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올바른 해석은 “패수가 증지현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이다. 『한서』 「지리지」의 저자는 낙랑군의 강들인 패수 대수 열수가 서쪽의 산에서 동쪽 바다로 간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여 기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강의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어느 지점에서 바다로 들어가는지 말하기 위해 증지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식의 표현을 한 것이다.
② 낙랑군 증지현도 대동강 하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지명이다. 증지현은 없다가 퇴적으로 생겨난 땅으로 볼 수 있는데, 한반도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로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는다. 반면에 하북성 중부는 삼각주로서 퇴적물로 육지가 늘어나는 곳이었다.
③ 유사사학은 『사기』 「조선열전」의 ‘眞番旁辰國’을 ‘眞番旁衆國’으로 보고 예맥조선이 예맥조선 남쪽의 소국들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와 漢은 같은 농경사회여서 무역할 것이 많지 않다. 漢이 필요로 했던 말 등 무역의 이익이 있는 품목은 경제의 성격이 다른 몽골초원에 있지 한반도 남부에는 없다. 예맥조선이 漢과 강화하기 위해 보내려 했던 말 5000필은 한반도 남부에서 키울 수 없다. 키워도 비싸서 漢이 수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맥조선은 예맥조선의 북동쪽에 있는 북부여와 한나라간 무역을 방해하였다고 봄이 타당하고, 왕검성이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사사학은 무식하여 비교우위에 의해 무역이 발생한다는 기본 상식도 없이 일제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 진력한다.
④ 『삼국지』와 『후한서』는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하며 『삼국지』는 한국을 지난 후 남으로 동으로 간다고 한다.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한국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진수와 범엽의 말은 정확하다. 유사사학은 황해도에서 김해까지가 7천여리가 될 수 없으므로 여행하는 데 걸린 날짜에 40리를 곱해서 얻은 수치일 가능성이 있다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무한 충성을 다짐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유사사학의 거짓말을 입증하는 사료에 대해선 그들은 항상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이미 논의가 끝난 사안이라느니, 학계의 정설로 되었다느니의 개소리를 시전한다. 학술적인 논의로 취급 받기 위해선 그러한 방식의 거리 계산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이 경우도 그러한 계산 방식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여야 하는데, 그들은 증거가 없으니 충성맹세만을 한다. 거짓말 자체도 무식이 철철 넘친다. 하루에 40리 가면 7천리는 175일 걸리는데, 황해도에서 김해까지 175일 걸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을 지나면 김해를 지나가는 것이 되므로 『삼국지』의 기록과 전혀 부합하지 않게 된다. 또 덕흥리고분 태수래조도에 연국이 낙양에서 2300리로 씌어 있는데(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里), 이는 『삼국지』와 『후한서』의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는 사실과 함께,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평양과 황해도가 아닌 보정시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⑤ 유사사학의 위치 비정에 의하면 백제는 경기도, 신라는 경상도, 낙랑군은 평안도, 낙랑군 동부도위는 함경도, 대방군은 황해도이다. 이러한 위치 비정은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은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하며, 신라는 서기전 28년, 서기 4년, 서기 14년, 서기 36년 네 차례나 낙랑군의 공격을 받는다. 『삼국지』에 의하면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고, 245년경 조위는 공손씨를 멸하고, 공손씨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辰韓 팔국을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들이 거부하자, 진한 팔국을 멸하였다.
백제 동쪽에 낙랑이 없으므로, 유사사학은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이들이 낙랑을 참칭했다고 하며, 백제 북쪽의 말갈에 대해선 동예설, 고구려 내 말갈설, 영서예설, 마한의 소국인 신분고국설 등을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한다. 황해도의 대방군과 다채로운 그들의 말갈과는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알 수 없다. 낙랑군이 평안도, 낙랑 동부도위가 함경도이면, 낙랑과 경주 사이를 낙랑군이 점령하지 않는 한 경주에 있는 신라가 낙랑군의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유사사학은 낙랑의 신라 침략 기사에 대해 날조기사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나 모두 설득력은 없다. 무려 4차례의 침략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를 침략한 세력은 낙랑군이나 낙랑군 동부도위가 아닌 다른 세력이라 볼 수는 없다. 진한이 경상도라면 공손씨는 경상도를 대방군에 편입하였고, 조위는 경상도를 멸하고 영토로 만들었어야 하며, 경상도에 왜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위치 비정의 모순은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韓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모두 해결된다. 이 경우 韓 지역은 낙랑군 동남쪽이고, 낙랑 동부도위는 낙랑군 동쪽 즉 韓 지역 북쪽이 된다. 백제 동쪽은 낙랑 동부도위이며, 신라를 공격하는 낙랑도 낙랑 동부도위이다. 백제 북쪽의 말갈은 요동고새와 패수 사이에 있는 우북평과 어양의, 오환인들이다. 유철은 흉노의 지배 하에 있던 오환인들을 요동외요 내부로 이주시켜 흉노에 대비하였는데, 이들은 흉노에 지배 당하게 된 북부여인들로서 이인자란 뜻의 말갈을 국호로 사용하였다. 황하 하류의 수류 변동은 서기 11년 또는 서기 15년에 있었다. 황하가 서쪽으로 이동하자, 백제에서 분리된 지역이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낙랑군에 붙은 땅이 되어 물이 어느 정도 마르자, 공손씨가 대방군으로 편입하였고, 조위는 진한을 자처한 이들을 멸하여 영토로 만들었다. 이 지역은 황하 하구로서 어업집단인 왜(예)도 살았기 때문에 공손씨가 왜도 복속시켰다.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韓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유사사학처럼 가지가지 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삼국사기』 『삼국지』 『후한서』 등의 신뢰성 있는 사료가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
⑥ 국가의 영역은 효율성을 위해 연결되고 밀집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이상한 영역은 비효율을 상쇄시길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원이 가장 밀집된 형태인데,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 왕조의 영토가 한반도 북부까지 튀어나온 이상한 영역인 경우, 그들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야 할 절실한 필요를 입증하여야 한다. 유사사학은 이러한 필요성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저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3. 4세기 전반에 낙랑군은 이동하였는가?
이정빈은 『자치통감』 장통의 모용외로의 귀부 기사와 『삼국사기』 미천왕의 낙랑 침략 기사를 근거로 4세기 전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사료는 전혀 낙랑군의 이동을 입증하지 못한다.
① 고구려의 313년 10월 낙랑군 침략 기사와 314년 9월 대방군 침략 기사는 말 그대로 침략 기사이지 영토 획득 기사가 아니다.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스럽자 고구려가 요동고새 부근의 낙랑 대방군을 침략하였지만 영토화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영토화한 시기는 후연을 멸한 407년이다. 407년에 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영토화하여 초대 유주자사로 진을 파견하였음이 덕흥리고분 묵서명과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조에 의해 입증된다.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는데, 요해는 요하(중역수) 주변의 땅인 요하 북쪽의 유주와 남쪽의 평주를 의미하므로, 이는 위가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② 『자치통감』에서 장통이 모용외에 귀부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늦어도 313년 4월 이전이다. 『자치통감』의 본기사는 왕준과 단질육권 모용외에 관한 기사이다. 初 이하는 본기사와 관련된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313년 4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데, 고구려의 낙랑군 공격은 313년 10월이다. 장통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도망갔다면 고구려는 낙랑군을 점령하면 되는데, 포로를 잡아 귀환했다. 이는 모용외의 세력이 강하여 낙랑군을 영토로 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개연성이 있다. 실제 모용외는 동진으로부터 320년 평주자사, 321년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로 봉하여 낙랑군 대방군의 점유자로 인정 받는다.
③ 『자치통감』은 고구려와 장통은 계속 싸웠으나 어느 한 쪽이 결정적 승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정적 패배를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근거지를 내준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장통이 고구려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까봐 모용외에게 의탁하여 모용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④ 사람이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취급되어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약취하는 것이 관례인 당시 상황에서, 장통이 1천여 가를 이끌고 대동강 남쪽에서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를 지나 요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정빈은 이러한 반박이 두려웠는지, 본문도 아닌 주석에서 낙랑이 해상으로 요동 산동지역과 왕래하였다는 허위사실을 제시하며 해상을 통한 도주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유사사학이 항상 하는 근거 없는 억지의 반복에 불과하다.
⑤ 『진서(晉書)』 「지리지」는 낙랑군이 후한말 공손도 이래 위치 변화가 없다고 한다. 서진 이후에도 전연이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고, 342년에는 환도성까지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천도하며, 355년에는 전연과 조공관계를 맺는다. 서진이 유지한 낙랑군이었다면, 전연은 낙랑군과 훨씬 가까운 위치에 세워진 나라였으므로 낙랑군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없다. 설사 유사사학의 주장대로 미천왕 때 뺏겼더라도 고국원왕 때 바로 찾아갔을 것이다. 서진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겨우 고구려가 정복한 땅이라면 전연 때는 바로 뺏겨야 정상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낙랑군이 4세기 전반에 대동강 남쪽으로부터 요서로 이동하였다는 주장은 전혀 개연성이 없는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낙랑군 평양설이라는 사기를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사기일 뿐이다. 낙랑군이 본래 중국 왕조의 영토로서 4세기 전반까지 계속 보정시에 있었다고 보아야 위에서 인용한 사료들이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
4. 5세기 전반의 낙랑군
이정빈은 432년 위의 탁발도(세조태무제)가 북연을 공격하고 요서 지역의 낙랑 주민을 북경 부터 난하까지의 지역 곳곳에 이주시키고, 낙랑군은 없어졌으며 난하 유역에 조선현만이 다시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혀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엉뚱한 소리만 생산하고 있다.
서진의 유주와 평주는 고구려의 후연 정복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은 덕흥리 고분, 동수묘, 평양역 구내묘에 의해 입증된다. 덕흥리 고분 내조도에 고구려 유주자사 진 휘하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대방의 13군이 기록되어 있다. 동수묘 묵서명에 동수가 낙랑, 韓, 창려, 현도, 대방태수를 역임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평양역 구내묘의 묘주는 韓, 요동, 현도태수를 역임하였다. 韓군은 韓 지역 북부로 광개토대왕이 백제에게서 뺏은 땅이다. 서진의 평주와 韓은 바로 붙어 있다. 또한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연가(延嘉)7년’을 539년으로 보는데, 이 불상광배 뒷면에 ‘高麗國樂良東寺’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481년부터 494년까지 백제 동성왕에게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 고구려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다. 수나라의 공격군의 명칭이 이 지역의 지명으로 구성된 것도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증명한다. 이정빈은 이 부분이 신경쓰였는지 본문도 아닌 주석에서 이러한 명칭은 현실 지명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었다는 허위사실을 제시하여 수나라군의 관념성을 설파하고 있다.
『위서』에 탁발도가 432년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의 6군 사람 3만가를 유주로 이동시켜 진휼하였다고 하는데, 이들 6군은 북연 영주의 6군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407년 후연을 멸한 후 서진의 유주 평주는 영토화하고, 당하부터 호타하 사이에는 위성국인 북연을 세워 북위와의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고구려의 점령으로 기득권을 상실한 후연 지배층과 그들의 가솔들이 북연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요동 낙랑 대방 현도로 명명하였고 고구려도 이들이 북연의 세력 강화에 일조하여 완충국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주를 묵인하였을 것이다. 즉 북연 영주의 요동 낙랑 대방 현도는 고구려가 점령한 서진 평주의 그것들과는 다른 군이다. 탁발도는 고구려가 후연의 북부를 차지했으므로 후연의 남부는 위가 차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432년 북연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와의 관계상 점령하지는 못하고, 북연을 약화시키기 위해 북연의 영주 주민들을 魏의 유주로 이동시켰다. 魏는 북연을 차지한다고 하여 고구려가 반발하지 않을 거라 확인한 후 436년 북연을 차지하였다.
사서에 북연과 魏의 영역으로 나오는 유주, 평주, 낙랑군, 대방군 등은 서진의 유주 평주와 그 소속의 군이 아니다. 중국의 사서들이 서진의 유주 평주와 그 소속의 군을 북연과 魏의 영역으로 나오는 유주, 평주, 낙랑군, 대방군 등과 혼동하여 기술하는 경우가 많아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고구려가 서진의 유주 평주를 영토화하고 백제의 점령기를 제외하고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으며 당하 남쪽의 영주는 魏 등 북조 국가가 차지하다가 수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는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된 후 고구려가 수를 공격하자 영주총관이 대응한 데서 확인된다. 이정빈은 고구려가 서진의 유주 평주를 영토화하였다는 것을 모르면서, 사료 가치가 떨어지는 『위서』 「지형지」와 『독사방여기요』의 기사로 혼자 소설을 쓰고 있다.
5. 결론
쓰다는 『패수고』를 “浿水라는 이름은 史記 朝鮮傳에 漢初 古朝鮮의 北境으로 기록되고”라 하면서 시작하는데, 이정빈도 그의 글을 “일찍부터 낙랑군은 고조선 후기의 중심지로 파악되었다.”라 하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소설을 작성하기 위해 거짓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쓰다가 일제 유사사학이면, 이정빈은 일제를 계승한 강단 유사사학이다. 사기치는 방식까지 일치한다. 바보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리는 전제를 가져다 놓은 후 평양이 낙랑군이었다는 사기의 핵심을 도출한다. 이정빈이 진일보한 점은 낙랑군을 최근 시기부터 거꾸로 기술하면서, 최초 낙랑군의 위치는 유사사학의 합의사항에 불과하다는 유사사학의 가장 큰 약점을 논문의 뒤쪽 안 보이는 곳에 배치하는 치밀함이다. 쓰다가 이런 방식을 알았다면 크게 칭찬했을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은 고조선에 관해서 한마디도 없고, 패수가 고조선의 북쪽 경계라는 문언도 전혀 없다. 이정빈의 일찍부터는 일제의 교시로부터를 의미한다. 18세기인들은 사기 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연구 방법론이 전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황하의 수류가 변동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 동해안의 이천년 전 해안선과 중국 동해안이 4-10m 퇴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요서 지역에서 배달국과 고조선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신화가 구술된 역사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일제의 교시를 좇아 실학파도 이랬다는 헛소리를 나불대며 조선총독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그들은 이문영이 인용한 유사사학의 기준에서 유사사학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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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삼국지』
『후한서』
『晉書』
『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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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
http://www.china-tour.cn/china-maps/yellow-river-map.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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