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자조선의 허위성

역사회복 2023. 2. 23. 09:14
 
삼한조선(단군조선 전기)은 서기전 2333년에 건국하여 서기전 1500년경부터 다시 시작되는 한랭화로 서기전 1285년에 망한다. 『단군세기』는 이를 반란을 일으킨 고등의 혈통이 단군이 된다고 기술하며, 『태백일사』는 삼한이 삼조선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태백일사』 「마한세가 하」 五月, 改制三韓爲三朝鲜。

『제왕운기』는 전조선이 망하고 164년 후에 기자조선이 성립하는데, 위만에 망한 준왕의 조선이 기자조선이며, 기자조선 후, 위만조선-삼한 소국들-삼국의 순으로 이어진다고 기술한다. 『규원사화』는 서기전 1120년경 단군조선이 망한다고 한다.

『제왕운기』가 말하는 공백 164년과 『규원사화』가 타 사서보다 늘린 전조선의 존속기간은 기자조선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간설정이다. 삼한조선이 망한 서기전 1285년과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서기전 1122년의 차이를 메꾸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제왕운기』 저술 당시 서기전 1286년에 조선이 망했다고 기술한 사서가 있었음을 의미하며, 『태백일사』와 『단군세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한다.

서기전 1285년 삼조선이 시작함에도 이승휴는 기자조선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164년의 공백기를 두었다. 공백기가 있다면 서기전 1285년 이전에 있어야 한다. 기후변화로 辰韓이 붕괴되고 혼란기를 거쳐 서기전 1285년 삼조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기자의 묘는 상구에 있는데 준왕의 조선은 예맥조선으로 당산 지역에 있었던 소국이다. 『제왕운기』에 의해 준왕의 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보면 기자 묘의 위치가 이해될 수 없다.

『삼국유사』에 실린 조선의 역사설화는 단군이 산신이 되기 전 나이를 1908년이라 하는데, 1908년은 『단군세기』에 의하면 조선이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는 서기전 425년까지의 기간이다. 기자조선이 준왕의 조선이라면 1908년이 도출될 수 없다. 구전되어 온 역사설화에 나타나는 1908년은 거짓이 되기 어렵다.

『사기』 「송미자세가」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는 아니었다라 하는데 『사기』 「송미자세가」 武王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이는 모순되는 말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의미밖에 없다.

봉하면 당연히 신하인데 신하가 아니라 하므로 봉했다는 말은 기자에 차인 무왕의 자존심을 살리는 기술에 불과하다. 이 말로부터 기자묘가 있는 하남성 상구가 주와 무관한 조선의 영토라는 것과, 주나라 초기에는 번조선이 하남성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는 번조선에 망명하였을 뿐이고, 기자나 그 후손이 번조선의 왕이나 제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

『漢書』 「지리지」는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전잠직작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漢書』 「지리지」 燕地, 箕子去之朝鮮,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환국과 배달국에서의 과잉인구의 이주로 중국에서 문명이 시작하여 중국이 비로소 농사와 비단을 알게 되었으므로, 기자가 이를 조선에 전해주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濊조는 “일찍이 箕子가 朝鮮에 가서 八條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일컬었다”라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濊,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하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에 배송지가 인용한 『위략』은, 주나라가 약해졌을 때 연나라의 동쪽에 있는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의 나라와 연나라가 싸우려다 말았다가, 나중에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였고, 전한 때 위만이 조선왕 준을 물리쳤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衞滿亡命,為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故)〔收〕 中國亡命為朝鮮藩屏。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眾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衞,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

진개가 침략한 조선은 진번조선이고, 준왕의 조선은 예맥조선이므로 조성훈, 「사기 ‘예맥조선’ ‘진번조선’에 대한 시론적 신론」, 『역사와 융합 제5집』, 2019. 30-33쪽.

중국 사서는 조선이 나오면 근거없이 기자를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도 진개가 침략한 진번조선은 「흉노열전」에서 동호라 기록하고 있으며, 『사기』 「흉노열전」 燕北有東胡 ……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조선열전」은 위만이 찬탈한 예맥조선을 기술하고 있어 조성훈, 위 논문, 12-13쪽.

두 조선을 구별하고 있다.

『구당서』에 고구려가 기자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구당서』 「동이열전」 고려, 其俗多淫祀,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있으나, 거짓까지 추가하는 다른 사서의 태도로 볼 때 고구려가 기자신을 섬겼다면 이전의 역사책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고, 고구려는 辰國의 정통성을 승계한 천자국을 자처하는 나라인데 번국의 제후에게 제사지낸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漢代 이후 편찬된 사서에서 기자조선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과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역사적 연고권을 내세우는 허구로 볼 수 있다. 문안식, 「선진문헌에 보이는 숙신과 고조선의 관계」, 한국고대사탐구학회 제27회 월례발표회 발표문, 2012. 10-11쪽.

 

『단군세기』에는 읍차였던 기후(箕詡)가 서기전 323년 스스로 번조선 왕이 되고 허락을 구했다 기술되어 있다. 『단군세기』 46세단군, 戊戌十九年。正月, 色借箕詡, 以兵入宮, 自以番朝鮮王, 遣人請允。帝許之, 使堅備燕。

기후가 기자의 후손이라 한다면 129년간 기자조선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기자로부터 800년이 지난 후여서 기자의 후손인지 여부도 불확실하고, 「동사」 「기씨보」 「기자지」 등 현존하는 기후의 계보에 의하면, 기후가 기자부터 35명의 조상을 추존하였다고 하는데, 왕조의 개창 시 추존은 황제국 5명, 제후국 4명이 관행인 사실에 비추어 대부여의 우현왕에 불과한 기후가 35명을 추존하였을 리 없으므로, 후세인들이 대부여의 우현왕이 된 기후를 기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라 추측된다.

당산 지역의 대부여 제후국에 불과하므로 ‘기자가 세운 후조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기후의 후손인 기준은 서기전 194년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가므로 『태백일사』 「번한세가 하」 丁未, 爲流賊衛滿所誘敗, 逐入海而不還。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侯準既僭號稱王,為燕亡人衞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기후의 나라는 예맥조선이다. 준왕은 위만을 예맥조선의 서쪽에 두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魏略曰:--- 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衞滿亡命,為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收中國亡命為朝鮮藩屏。準信寵之,拜為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眾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衞,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

이곳이 패수의 동쪽인 왕검성이므로 예맥조선의 위치는 현재의 당산 일대이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는 기후를 번조선의 왕으로 보지만, 기후의 번조선은 대부여내의 제후인 우현왕(番韓)을 의미한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는 대부여 내의 우현왕과, 중국 동해안의 番朝鮮을 혼동하고 있다.

 

발해 북안과 대릉하유역에서 발견되는 청동예기가 상말 주초의 유이민 즉 기자집단의 것이라는 주장은 성터와 같은 이주민의 거주를 증명하는 유적이 없고 대형의 용기만 있어 이주민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강인욱, 「고조선의 성립과 대릉하 유역 중원 청동예기의 재해석」, 『백산학보』, 2021. 11-12쪽.

또한 중국인들이 청동예기의 㠱를 箕자로 잘못 판독하였음이 밝혀졌고, 㠱가 적힌 예기는 산동성에서도 여러 개 발견되어 김종서, 『(고조선으로 날조되어 온) 기자 위만조선 연구』, 한국학연구원, 2004, 184~185쪽

청동 예기를 근거로 한 기자조선의 주장은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이들 청동예기에는 㠱 이외에도 庚, 亶伯, 鹿, 戊, 伯矩, 倗万, 史, 叔尹, 亞, 魚, 尹, 舟, 車 등 국가나 씨족의 여러 족휘(族徽)가 새겨져 있고, 좁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어, 이것들을 교역, 조공, 약탈 등으로 취득할 수 있었던 강력한 토착세력의 존재가 추정될 수 있다. 김종서, 위 책, 195-201쪽.

 

이승휴가 주장하는 기자조선은 다른 사서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이승휴가 주장하듯이 준왕의 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보면 조선의 역사설화(단군신화)와 모순된다. 그리고 준왕의 조선이 기자의 후손이 세운 제후국이라 하더라도 당산 지역에 있었던 대부여의 한 제후국에 불과하므로 기자조선 시기로 우리 역사를 구분할 수는 없다. 그리고 기후의 조선(준왕의 조선=예맥조선)이 기자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는 증거도 전무하고, 후대의 유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찾다찾다 기씨 제후국을 찾아서 35명의 가공 기자 후손을 만들어 기자와 기후를 연결한 것일 뿐이다.

중국 사서는 조선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언급을 근거로 조선만 나오면 무조건 기자와 연결시켜 침략의 근거로 활용했다.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했는데 번조선에서 그를 제후로 만들어줄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 은나라와 번조선은 계속 전쟁 중이었고, 은이 번조선과의 전쟁으로 약화되어 주나라에 망했다. 은나라 관료였던 기자가 번조선에 망명한다고 그를 제후로 떠받들 지역이 있을 수 없다. 기자가 힘이 세서 번조선의 일정 지역을 점령했다면 중국 사서는 기자가 조선을 점령하여 왕이 되고 주나라에 복종하였다고 썼을 것이다.

즉 기자조선은 사대 유학자들과 중화주의자가 만들어낸 가공의 역사일 뿐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