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나=가야 주장의 배경
일제와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를 비롯한 여러 소국들이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라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름이 같으니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물론 이들 국가는 열도에 있는 소국의 이름이다) 문제는 임나이다. 한국에는 가야가 있었고,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라고 날조한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를 말하므로 「일본서기」의 내용이 한반도 남부에 관한 이야기라 주장한다. 이러한 날조에 기반하여 강단유사사학은 가공의 야마토왜가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야마토왜라는 왕조 자체가 날조이고, 일본이 사실은 백제를 의미하고, 일본서기는 백제가 일본으로 독립하면서 정통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문학서라는 사실 등에 의하여 야마토왜설과 야마토임나설 모두 무의미하지만, 다 양보하고 임나가 가야라는 주장의 사실성에 대해서만 살펴 본다]
2. 임나는 가야가 아니다.
1) 김태식의 임나=가야 주장 근거
“비교적 신빙성이 인정되는 다수 용례를 중심으로 볼 때, 임나는 6세기 한반도 남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신라나 백제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소국들의 총칭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가야 소국들이 신라나 백제와 구분되는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의 반영이며, 그 임나를 왜측에서 친근하게 여긴 것은 이들과의 빈번한 교역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요컨대 대가야를 중심으로 파악되는 5~6세기의 가야연맹을, 왜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고 언급한다. [김태식,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 1』, 푸른역사, 2002. 666-667쪽.]
ㅇ 그렇다면 「일본서기」 6세기 후반 이후 나타나는 임나는 왜 비교적 신빙성이 없는가? 일본서기의 특성상 후대의 기사가 더 신빙성이 있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은 옛 기사는 주갑제라는 황당한 방법으로 연대를 조정하는 것 아닌가? 김태식은 더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 6세기 후반 이후 나타나는 임나 기사에 대해선 말이 없음.
동북아역사넷(http://db.history.go.kr) 「일본서기」 번역
- 571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임나를 멸망시킨 이유를 물음
- 575년: 신라, 임나, 백제에 사신을 보냄
- 583년: 임나를 다시 부흥하고자 기국조압승(紀國造押勝)을 보내 백제에 있는 일라(日羅)를 불러들임
- 584년: 난파길사목련자(難波吉士木蓮子)를 신라에 보내 임나에 다다름
- 591년: 임나를 세울 것을 명함
- 591년: 군대를 모아 축자에 머무르고, 신라와 임나에 사신을 보냄
- 600년: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워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
- 601년: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임나를 구하라 함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을 불러들임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이 축자에 도착함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이 왕경에 도착함
- 611년: 신라와 임나가 사신을 파견함
- 623년: 길사반금(吉士磐金)을 신라에 보내고 길사창하(吉士倉下)를 임나에 보내 상황을 알아봄
- 623년: 신라가 임나를 토벌하니, 천황이 신라의 토벌을 논의함
- 623년: 신라의 지세이(智洗爾)와 임나의 지(智)가 사신으로 옴
- 623년: 반금 등이 신라로 갈 때 신라와 임나의 영접선이 옴
- 638년: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내옴
- 642년: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을 난파에서 향응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에 사신을 파견함
- 646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냄
ㅇ 따라서 김태식의 말 중 남는 것은 ‘무슨 이유에선가’가 임나가 가야인 유일한 이유. 이것이 학문인가? 스스로 유사사학임을 자인하는 말.
2) 「일본서기」 임나 위치
「일본서기」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ㅇ 동북아역사재단: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동북아역사넷(http://db.history.go.kr) 「일본서기」 관련부분 해석
ㅇ 국사편찬위원회: 任那는 筑紫國에서 2,000여 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것은 『日本書紀』 찬자의 잘못인 듯하다.)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일본서기」 관련부분 해석과 주석
ㅇ ‘북쪽이 바다에 막혀 있다’는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은 불가능함에도 동북아역사재단은 임나를 한반도에 위치시키기 위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로 고의 오역하고, 국사편찬위원회는 맘에 안 드는 글자 나오면 항상 그러하듯이 오류라고 주장.
ㅇ 일본서기의 임나는 오카야마임. 오까야마 북쪽이 과거에는 바닷물이 들어왔음.
3) 「일본서기」 신공 49년 부분에 나오는 신라7국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그리하여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동북아역사넷(http://contents.nahf.or.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이 부분(擊新羅而破之. 因以)을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라 일부러 오역하여 뒤에 나오는 7국이 가라7국이라고 주장
강단사학의 통설에 의하면 이들 7국은 가야의 영역인데, 이들 7국의 영역이 모두 신라에 속했던 시기는 없다. 특히 강단사학은 남가라를 김해라고 주장하는데, 김해가 신라의 영역이었던 시기는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관련 부분은 열도 신라에 속했던 7국을 일본왕이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또 「일본서기」 임나10국 중에 가라 안라 다라가 있다. 그들의 「일본서기」 시기 설정방법(「일본서기」는 역사서의 기본인 시기가 사실과 달라 그들이 사용하는 시기 설정방법이 있다)에 의하면 신라7국은 369년의 일이고 임나10국은 562년의 일이다. 그들의 시기 설정을 존중하면 가라 안라 다라가 신라였다가 임나로 되었다는 것인데, 한반도의 신라에는 가라 안라 다라가 있지도 않았고, 신라가 그 세 지역을 가야에 뺏긴 적도 없으므로, 「일본서기」의 7국이나 10국은 신라인들과 가야인들이 이주한 열도 내 마을국가들의 이름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결론을 방지하기 위해 소위 강단사학계는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강변한다.
김태식은 문구는 일본왕이 7국을 공격하여 깨트렸다고 하는데, 김태식은 주체를 일본왕도 아니고 야마토왜왕도 아닌 야마토왜에 충성하는 백제로 바꾸고, 공격하여 깨트린 것도 교역권의 장악이나 공납관계의 형성으로 바꾼다. 원문이 군사를 이끌고 가며, 군사 수가 적을 것을 걱정하여 더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가는데, 김태식은 전쟁이 없었다고 하면서, 여기의 전쟁은 ‘동맹이나 통교라는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주장한다.
동맹을 전쟁이라는 설화로 표현한다고 하면, 역사서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강단유사사학이 자랑하는 실증의 정체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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