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쿠빌라이는 사무역을 금지하고, 관민 합자의 무역선(관7, 민3)만 허용하였지만, 성종은 해금을 철회하고 적성국이었던 일본과의 무역까지 허용하였으면서도, 백제유민과 고려와의 왕래는 금지시켰다. 김성호,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 맑은소리, 1996. 176-179쪽. 고려와 백제유민이 결합할 경우 원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말엽인 1348년부터 백제유민인 방국진과 장사성은 원의 쇠약을 틈타 독자세력화 하였지만, 주원장이 이들을 제압하고, 1368년 즉위하여 백제유민의 본거지격이었던 주산군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해금정책을 실시하자, 생활기반이 파괴된 백제유민은 해적이 되었다. 김성호, 위 책, 189-210쪽. 명나라는 이들을 왜구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