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평양 2

낙랑군 위치와 낙랑군 위치 왜곡의 과정,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

​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는 다르다. https://taxecolaw.tistory.com/72 ​ 낙랑군 왜곡의 과정 ​ 강단·일제·중제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제부터 근거없는 날조임이 드러난다. 더 이상 그들의 날조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날조의 골이 깊어 날조의 과정을 더 살펴본다. ​ 진수(233년-297년)는 낙랑과 대방, 환도성의 위치를 알았다. 조위의 공손씨 정벌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이 그의 생존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방군에서 왜의 북쪽 대안이라고 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표시하고 있고, 그 경로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시하고 있다. ​ --------------------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

역사 2023.02.09

고려의 서경 (고구려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라는 것은 개솔

『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시대 때 서경이라 하였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면서 안북대도호부에 이르러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안북대도호부가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라 고려의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즉 지금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볼 수는 없고 구구려의 평양은 최소한 안주 북쪽에 있었고, 현재의 평양은 각..

역사 202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