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찬기파랑가 최초 완전 해독

화랑들이 숙청 당하면서 기파랑도 숙청당했다. 충담사는 기파랑의 장지에 따라와 장지에 모인 모사들을 보면서 기파랑을 추모하는 시를 지었다. 이슬은 기파랑의 모사들이거나 백성들을 의미한다. 달은 기파랑을 의미한다. 흰구름은 기파랑을 죽인 세력이고, 달님의 안식처는(기파랑의 관념상 안식처는) 달이 진 서쪽 하늘 즉 서방정토이고, 기파랑의 현실적 안식처는 기파랑의 皃史들이 모인 기파랑의 무덤이다. 기파랑의 무덤은 물가에 있지 않았겠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무덤 아래에 있는 물 가의 자갈밭에까지 사람이 들어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기파랑의 장지에 왔다. 곶가리는 중의적 표현이다. 꼭대기와 화반의 뜻을 동시에 나타낸다. ​기존의 해독은 각자의 소설에 불과하다. ​​찬기파랑가 (충담사) 咽嗚 爾處米          ..

역사 2024.11.20

안민가 최초 완전 해독

내용이 뻔한 것임에도 쓰레기 집단은 해독을 못하고 각자의 소설을 남발하고 있었다. 대다수 국사학계와 일부 국어학계가 쓰레기들로 채워지는 이유는 세계적인 경쟁이 없고, 매국노 원조 교수 즉 매국노들을 비판하면 방출되었고, 매국노에 무조건 충성한 바보들만 후임교수가 되었고 그 과정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지보다 똑똑하면 교수자리를 안 주므로 바보들만 남게 되어 소창진평의 해독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소창진평의 해독이라 하면 일본 것이라 해서 거부감 있을까봐 양주동의 해독을 우위로 만들어 놓고 자칭 천재니 국보니 위대한 업적이니 지랄들 하면서 육갑을 떨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안민가 (충담사) 君隐 父也                                   님검은 아비여臣隐 愛賜尸 母史也   ..

역사 2024.11.19

쓰레기들의 서동요 심사 결과 공개

본 블로그 다음 글에 대한 심사 결과입니다.https://taxecolaw.tistory.com/372 서동요 ‘夘乙抱遣’ 해독에 대한 새로운 가설******본 블로그에 논문 형식으로 작성된 글은 모두 학술지에 투고된 상태입니다******** 목차1. 서2. ‘안고 가다’ 해독의 부자연스러움3. 새로운 가설: ‘夘乙抱遣’는 ‘돌보고’4. 결  1. 서서taxecolaw.tistory.com 위 글은 필자가 향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이전 '돌보고'에 대해서만 쓴 것으로 서동요에 대한 완전한 연구결과는 다음 글입니다.https://taxecolaw.tistory.com/387 서동요 최초 해독如는 훈으로 '닷'이나 '듯'이고 음으로 '에(여)'이다. 기존의 견해는 많은 경우 '다'로 읽는데 헛소리이다. 신..

역사 2024.11.18

경남도민일보 2024.11.18. 정효운의 거짓말에 대한 반론

정효운은 임나=가야라는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앵무새처럼 또 반복하고 있다.​​​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24671532년 금관국 멸망 이전 김해지역은 어떻게 인식·표기됐을까지인의 소개로 지난 11일 '김해시사 가야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나?'라는 김해시사 정책토론회에 참석했다. 참여자가 많아서 김해시민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도를 느낄 수 있었다. 토론회 주된 논점은 가야와 임나의 관계 및 위치로, 주최 측 의도는 김해시사의 고대사 서술이 민족사관 관점이www.idomin.com​특징적인 것은 조선총독부 소설 추종자들의 3종 세트 중에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삼종세트는 강수전, 광개토대왕릉비, 진경대사탑비의 셋인데, 토론회에서 그..

역사 2024.11.18

처용가 최초 완전 해독

양주동이 처용가를 오역한 이래 전 국민이 처용가를 오해하고 있다. 양주동은 자칭 국보이나, 양주동이 국보라면 김소월이나 윤동주는 국보 할아버지가 되어야 하는가? 독립투쟁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향가(사뇌가) 해독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창진평이 해독법을 제시한 상태에서, 당시 시간 많은 놈팽이라면 양주동 정도는 다 했을 것이다. 소창진평과 이오십보 소백보의 수준일 뿐이다. 현재의 해독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바보 대중을 상대로 국보놀이나 했던 양주동이 국보가 될 자격은 전혀 없다. 8행의 오역은 해독이라기 보다는 날조에 가깝다. 특히나 고려 처용가가 있는 상태에서 양주동처럼 해독한 것은 양주동이 아주 멍청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東京 明期 月良              東京 ᄇᆞᆯ기 ᄃᆞ라夜 入伊 遊..

역사 2024.11.18

김영회의 향가(사뇌가) 해독법?

김영회는 향가 해독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지 마음대로 향가를 해독하고 한시도 향가라고 주장한다. ​그는 향가와 그가 향가라고 주장하는 한시가 모두 무대종합예술 대본이라고 한다. 그의 해석은 지 마음대로, 지 소설을 문자에 어거지로 가져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은 그가 해석하지 못하는 글자는 보언이라 하면서 시의 내용과 다른 것이라 하면서 무대의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 한다. 보언이 출현하는 위치는 그가 해석을 못하는 글자이거나, 그의 소설 작성에 필요한 글자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의사전달이 될 수가 없다.  그가 만엽집이 향가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신라만 한자의 음과 뜻을 사용하여 글을 적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도 그러한 방식의 표기를 하였다. 만엽집은 백제의 향찰을 사용한 ..

역사 2024.11.17

우적가 최초 완전 해독

기존 견해는 글자가 다 있어도 해독을 못 하는데, 우적가에는 결자가 네자나 있다. 기존 견해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창작하면서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다. ​​自矣 心米 저의 마ᅀᅳᆷ에皃史 毛達只 將來呑隐 日 皃史 모달기 디니오 날遠烏 逸(尸 知) 過出知遣 멀오 숨(을 디) 디나티고今呑 藪未 去遣省如 엳ᄃᆞᆫ 더믜 가고쇼에但 非乎隱焉 破(山)主 다ᄆᆞᆫ 외온ᄋᆞᆫ 破山主次弗(伊)史 內於都 還於尸 朗也 자블이사 드려도 도르혈 朗ᄋᆡ此 兵物叱 沙過乎 이 잠갓 沙過오好尸 曰沙也 內乎呑尼 됴흘 ᄀᆞᄅᆞ사야 드료ᄃᆞ니阿耶 唯只 伊 吾音之叱恨隐 㵛陵隐 아야, 오직 이 남짓한 㵛陵은安攴尙宅 都乎隐以多 알히尙宅 모돈이다 저의 마음에皃史 (남)모르게 지녀오던 날 (皃史: 皃史가 배정되는 높은 자리 즉 출세의 욕구를 의미..

역사 2024.11.17

혜성가 최초 완전 해독

혜성가는 진평황 때 지어진 것이다. 화랑의 위세가 대단하다. 화랑들이 금강산으로 가려 할 때 달도 도울 것이라 하고 있다. 기존 학계는 일본인 소창진평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 각자의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舊理 東尸 汀叱                                        녀리 살 믌갓乾達婆矣 遊烏隱 城叱肹良 望良古          乾達婆ᄋᆡ 노론 잣ᄒᆞᆯ랑 ᄇᆞ라고倭理叱軍置 來叱多                                 여릿군두 옷다烽 燒邪隱 邊也 藪耶                               홰 퓌얀 ᄀᆞᅀᅣ 수햐三花矣 岳音 見賜烏尸 聞古                    三花ᄋᆡ 뎜 보시올 듣고月置 八切爾 數於將來尸 波衣            ..

역사 2024.11.16

강단의 『삼국유사』 末을 未로 날조한 사기질

『삼국유사』 「탑상」 금관성파사석탑 원문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末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而圡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강단은 然于時海東末有創寺奉法之事의 末을 未로 날조하여 해석하고 있다. 원문을 해석하면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었으나, 대개 像敎(대승불교) 이전이었고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강단은 글자를 날조한 후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강단..

역사 2024.11.16

토사구팽, 皃史, 모죽지랑가 최초 완전 해독

토사구팽은 만고의 진리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당과 평화적 관계를 맺은 후 화랑도는 왕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화랑의 대장은 진골 출신이다. 성골은 아니지만, 힘으로 왕이 된다고 하면 백성들이 정통성이 없다고 부인하기는 어려운 신분의 사람들이다. 진골도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화랑도라는 전우애로 뭉친 전사집단이 전쟁 시에는 보물이었지만, 평화가 찾아 오자 왕실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681년 김흠돌의 반란(?)을 계기로 왕실은 관련되지도 않은 모든 화랑도들도 차근차근 숙청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흠돌은 자기 딸의 아들이 태자가 되게 하려 한 것이지 자기가 왕이 되려 한 것이 아니므로 엄밀히 모반이라 하기도 어렵다. 화랑도 숙청 과정에서 죽지랑도 힘을 잃었고..

역사 2024.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