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역사비평사에 투고된 글입니다. 한글에서 복붙했더니 주는 다 지워졌습니다. 역사비평사는 이 글을 거부할 것입니다. 거부하면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기성을 드러내기 위해 투고하였습니다. 그들의 거부 답변이 오면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1. 서
조선총독부와 그 승계자들(이하 ‘유사사학’이라 한다)은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다는 것을 부정한다. 유사사학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얻은 영토가 대동강 원산만 선이라 한다. 그러나 유사사학의 주장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역사소설 수준도 안 되는 사기가 한국 유사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유사사학은 실증적 역사연구를 오히려 ‘유사역사학’이라 칭한다. 이문영은 유사사학의 편에서 실증적 연구자들을 유사역사학이라 칭하며 「유사역사학 비판」이라는 책까지 썼다. 그는 로버트 캐롤과 로널드 프리츠를 인용하여, 유사역사학은 사료나 증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개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에 주목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본고에서는 이문영이 인용한 유사역사학의 기준을 이용하여 요동반도 백제와 대동강 원산만 선에 관한 유사사학 주장의 유사역사학성을 살펴본다.
2. 요동반도 백제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① 『사기정의』 하본기 주석, 『括地志』 인용 부분
괄지지에서 이르길, 백제국 서남 발해 중에 큰 섬 15 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거주한다. 백제에 속한다고 한다.
② 『삼국사기』 「百濟本紀」 의자왕
무후(武后)가 또한 그의 손자 경(敬)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발해말갈에 의하여 분할되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③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아 주군으로 삼았다.
④ 『구당서』 권199 「百濟傳」
그 땅은 이로부터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가진 바 되었다.
⑤ 『신당서』 권220 「百濟傳」
그 땅은 이미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가진 바 되었다.
⑥ 『신당서』 권 제220 신라전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았다.
⑦ 『통전』 邊防一 東夷上 百濟
그 옛 땅은 新羅로 되었고, 城과 주변의 남은 무리도 후에 점차 약해져서, 突厥과 靺鞨에게 흩어져 투항하였다. 백제왕 夫餘崇은 끝내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고, 土地는 모두 新羅와 靺鞨에 편입되었으며, 夫餘氏 왕가는 마침내 끊어지게 되었다.
⑧ 『당회요(唐會要)』 권 제95 신라전
이미 백제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고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미쳤다. 동서 약 900리, 남북 약 1,800리이다.
위의 사료를 개연성 있게 해석하면, 발해 중에 서남쪽에 큰 섬이 있는 곳은 요동반도밖에 없다. 한반도 서남부를 대진이 가져갈 수는 없으므로, 『괄지지』의 내용을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통전』이 강력하게 보강하고 있다. 따라서 『당회요』가 신라가 백제 땅을 다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다'를 간단히 '다'라고 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유사사학은 『당회요』에만 근거하여 신라가 차지한 백제 땅은 한반도 서남부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당회요』 이외의 모든 사료를 무시한다. 그러나 『당회요』만 보아도 동서 약 900리와 남북 약 1,800리는 대동강 원산만 선의 신라와 부합하지 않는다. 요동반도 일부가 신라 영토여야 당회요의 영토 묘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북 1,800리와 관련하여 제주도를 포함하면 가능하다고 억지를 쓸 수도 있으나, 『당회요』는 탐라를 별도로 기술하고 있어 억지도 불가능하다.
『괄지지』는 638년부터 642년까지 편찬된 책으로 현재 전하여지지는 않지만 백제가 살아 있을 때 편찬된 책이며, 『괄지지』의 기사를 인용한 장수절의 『사기정의』가 『사기』의 3가주석으로 인정 받는 권위 있는 사서이고 736년에 저작된 만큼 『사기정의』가 인용한 『괄지지』의 백제 영토 기사는 부인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유사사학은 『괄지지』의 기사는 언급하지 않고, 대진과 신라가 백제 땅을 나누어가졌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 『舊唐書』 권199 百濟傳 및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그러나 발해는 6998년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에서 고구려 유장(遺將)인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므로 발해가 한반도 남부의 백제 땅을 신라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발해에게 분할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 고지(故地)는 신라 영토가 되고, 唐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하였다가 요동지역으로 옮긴 웅진도독부가 발해 영토에 포함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通典』 권185 百濟傳에는 “그 옛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城)과 나머지 무리가 점점 적어지고 약해지더니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 들어갔으며, 그 주인 부여숭(夫餘崇)은 마침내 옛 나라로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땅을 모두 신라에게 빼앗기니 부여씨(夫餘氏) 왕은 마침내 끊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그들의 유사사학성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① 『괄지지』에 요동반도가 백제 땅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일제가 교시한 한반도 서남부만이 백제 땅이라는 전제에서 그들은 『괄지지』의 기사를 무시하면서 『신당서』 『구당서』의 “발해가 한반도 남부의 백제 땅을 신라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근거 없이 결론을 내린다. ② 그들은 보강증거랍시고 『통전』을 인용하며 “그 옛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고”라 하는데 『통전』은 “토지는 모두 신라와 말갈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는 유사사학성을 넘어 사기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③ 그들은 객관적 사료를 무시하여 놓고, “唐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하였다가 요동지역으로 옮긴 웅진도독부가 발해 영토에 포함된 것을” 대진과 신라가 백제 영토를 나누어 가진 것으로 사서들이 표현하였다고 억지를 쓴다. 그러나 그들의 지리 비정에 의하면 요동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당나라가 고구려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러한 개연성이 떨어지는 사실을 주장하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들이 실증적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그리고 당시의 사서 편찬자들이 백제 영토가 아닌 곳에 설치된 웅진도독부를 차지한 것을 백제 영토를 차지하였다고 기술할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증거도 없다. 그냥 소설이고 억지다.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곳은 과거의 백제영토라 보는 것이 개연성이 있고, 사료를 문언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자신들의 추측에 의해 사료의 문언을 무시하고 변개하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 사료의 문언을 무시하기 위해선 문언보다 더 개연성이 있고 실증적인 증거에 의해야 함에도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추측만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것은 소설도 되지 못하는 유사역사학에 불과하다.
아무리 억지를 늘어 놓아도 신라가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다고 말하는 기사는 설명할 수 없다. 대진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을 차지한 것을 백제 땅을 차지했다 치더라도, 왜 신라는 백제 땅을 다 차지하였다고 하지 않고 많이 차지하였다고 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유사사학의 행태는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3. 신당전쟁의 전장
한반도 백제에서의 부흥운동은 풍의 군대가 662년 7월에 백강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여풍은 달아나고, 부여충승 등이 항복하여 실패로 끝났다. 홀로 지수신만이 임존성에서 항복하지 않았지만, 당군은 항복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시켜 임존성을 점령하도록 하여 한반도 백제는 모두 평정되었다. 665년 당나라는 한반도 백제의 당군을 철군시켰고, 당군이 철수하자 부여융도 당나라로 도망갔다. 즉 한반도 백제는 완전하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와 당은 한반도백제는 신라가, 대륙에 있던 백제는 당이 차지하기로 협의했을 것이며, 그들의 최종 목표인 고구려가 남아있기 때문에 한반도 백제를 가지고 당이 다툴 상황은 아니었다.
그 후 670년 이전에 한반도 백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사는 전혀 없다. 고구려와 싸워야 하는데 한반도 백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면 후방이 불안하므로 고구려와의 전투 이전에 진압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사사학은 670년 이후의 웅진도독부나 백제 관련 전투를 한반도 백제의 전투라 한다. 한반도에 당군도 없고 부여융도 도망갔는데 웅진도독부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백제와 당군이 다시 등장하고 그 부근으로 보이는 평양(지금의 요양) 일대에서 신라와 당이 전쟁을 하는 670년 이후 기사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ㄱ) 문무왕 10년 1월 (670년 01월 (음))
10년(670) 봄 정월에, 고종(髙宗)이 흠순(欽純)의 귀국을 허락하였으나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노하여 책망하며 다시 사자를 억류한 것이다.
(ㄴ) 문무왕 10년 7월 (670년 07월 (음))
〔10년(670)〕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儒敦)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곧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임을 알고, 예군을 붙잡고 보내지 않은 채,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의관(義官)·천관(天冠) 등이 63곳의 성(城)을 공격해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신라로 이주시켰다. 천존(天存)과 죽지(竹旨) 등은 일곱 성을 빼앗았으며, 목 베어 죽인 것이 2,000급이었다. 군관(軍官)과 문영(文穎)은 열두 성을 빼앗고 말갈병을 쳐서 7,000급을 베었다. 전마(戰馬)와 병기를 빼앗은 것도 매우 많았다. 왕은 돌아와서 중신(衆臣)·의관(義寬)·달관(達官)·흥원(興元) 등은 ▨▨▨사(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죄가 사형에 해당하지만, 사면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 ▨▨▨▨일(一) 등에게는 각각 급찬(級湌)의 관등을 주고 조(租)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ㄷ) 문무왕의 설인귀에 대한 답서 (671년 07월26일(음))
함형(咸亨) 원년(670)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쪽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그쪽과 우리쪽은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官人)을 서로 바꾸어서 인질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부성(府城)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와 장귀(長貴) 등을 부성으로 보내 인질 교환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인질 교환을 허락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면 밤에 와서 공격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가늘어지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처럼 닳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주었다 뺏었다 하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두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자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뒤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므로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ㄹ) 문무왕 12년 9월
왕이 앞서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하소연하고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공격했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級湌) 원천(原川)과 나마(奈麻) 변산(邊山),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당나라〕 병선(兵船) 낭장(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 예군(禰軍), 증산(曾山) 사마(司馬) 법총(法聰),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ㅁ) 문무왕 15년 (675년 (음))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詔書)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金仁問)은 오는 길에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아 주(州)와 군(郡)으로 삼았다.
(ㄴ) 기사에서 신라가 63곳의 백제 성을 공격하는데, 한반도 서남부에서 63곳의 성이 백제의 수중에 다시 들어갔다면 대규모의 전투와 조직적인 세력이 있었어야 한다. 유사사학은 이렇게 대규모의 성이 다시 신라의 지배에서 이탈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말갈병도 등장하는데 그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어떻게 보급을 할 것인가? 만약 한반도 백제 63곳의 성이 있었다면 어떻게 마음 놓고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겠는가? 유사사학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떠받들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이 기사를 요동반도 백제에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고, 신라가 요동반도 백제를 영토화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면 이상한 점이 없다. 말갈병이 개입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또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는 각각 정예병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격하여 대승하는데, 만약 한반도 백제와 한반도 내의 웅진도독부가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예병을 1만명이나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전장인 임진강을 훨씬 더 지나쳐 보낸다는 것은 아주 개연성이 없는 작전이다. 한반도 백제가 경주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작전은 먼저 한반도 백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압록강을 넘어가서 대승했는데, 이후에는 임진강까지 후퇴하여 싸운다는 것도 극히 개연성이 없다. 여기의 압록강을 요하로 보고 (ㄴ) 기사의 백제를 요동반도 백제로 보면 신라의 작전은 개연성이 있으며, 요동반도 요하 태자하 선의 전장도 모순 없이 설명된다.
(ㄷ) 기사도 요동반도 백제를 상정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유사사학은 신라와 당나라가 임진강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신라는 고구려 멸망 시 고구려 영토를 하나도 얻지 못하거나 기존의 신라 영토를 뺏겼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가 한반도 백제까지 당나라가 가져갔으면 신라는 도대체 왜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에 협력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신라인들이 바보였는가? 당은 고구려 공격 전 667년이나 668년, 신라에게 평양(지금의 요양)이남 고구려와 요동반도 백제를 주기로 한 이세민의 약속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이는 문무왕의 답서에 나타난, 3∼4년 사이에 줬다 뺏었다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한반도 백제를 완전히 제압한 후, 요동반도 백제는 당 웅진도독부의 점령하에 있었다. 당은 고구려 공격에 신라를 동원하기 위해 요동반도 백제와 요양 이남을 신라에게 주기로 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하자, 요동반도 백제를 신라에게 주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는 669년부터 요동반도 백제를 공격하였고 (ㄱ) 기사에서 보여지듯이 당나라가 반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한반도 백제는 신라의 땅이 된 지 오래이므로 당나라가 한반도 백제를 준다고 할 수도 없다.
(ㄹ) 기사와 (ㅁ) 기사는 672년부터 신라가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는 것을 나타낸다. 신라는 요동반도 백제의 대부분과 요양 남쪽을 확보하여 당나라와 더이상 싸우려 않고 방어만 한다. 만약 한반도 백제를 전부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가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였다면 한반도에 당나라나 대진의 영토가 남아 있어야 한다. 신라는 672년 2월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 이후 신라가 가림성을 취하였다는 기사는 없다. 즉 가림성은 신라가 취하지 못하고 나중에 대진이 취한 요동반도 서북부에 있는 성이라 보아야 한다. 신라는 675년 9월 매소성에서는 이기나 석현성은 탈취 당한다. 유사사학은 매소성과 석현성을 임진강 부근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신라가 언제 대동강까지 전진했는지를 알 수 없다.
4. 패강 이남의 땅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나라는 735년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 영토로 승인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4년
義忠迴, 勑賜浿江以南地. 의충(義忠)이 돌아올 때, 〔당나라 현종(玄宗)이〕 조칙(詔勅)을 내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내려주었다.
유사사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패강(浿江) 이남의 땅: 패강은 대동강을 이른다. 패강 이남의 땅은 예성강에서 대동강 사이의 황해도지역을 가리킨다.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임진강 이북과 예성강 이남의 옛 고구려지역을 한산주(漢山州)의 군·현으로 편제하였을 뿐이고, 예성강 이북지역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았다.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시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평양 이남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해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유사사학에 의하면 예성강과 대동강 사이의 평야 지역이 무주공산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아주 개연성이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사사학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라와 당은 임진강 예성강 부근에서 싸웠으므로 예성강 이북은 당나라의 영토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대진이 강해진 후에는 예성강 대동강 사이의 지역을 영유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없다면 대진이나 신라가 이미 차지했어야 한다. 675년부터 735년까지 이 지역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
유사사학 내에서도 이러한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신라가 한반도로부터 수만의 당병을 패퇴시켰을 때 신라의 北境은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德源에 이르렀다. 문무왕 8년(668)에 比列忽州를 다시 설치하고 15년에는 현재의 덕원으로 비정되는 鐵關城을 축조했던 데서 알 수 있다. 이렇게 東北境은 크게 북상해 있었고 서북경은 통일 이후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던 중 발해를 견제시키려는 당이 신라에게 平壤 이남의 영유권을 공인함으로써 聖德王 34년(735)부터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북경이 설정되었다.
이러한 주장도 개연성 없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이 유사사학은 “서북경은 통일 이후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던 중”이었다고 하는데, 전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위의 (ㄹ)과 (ㅁ) 기사에서 보여지듯이 신라는 당시 전투 선에서 당과의 전쟁을 끝내자는 입장이었으므로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동강 원산만이라는 일제의 교시와 날조된 전장을 일치시키기 위한 유사사학의 눈물겨운 충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패강은 요양 남쪽을 흐르는 태자하를 의미하며, 신당전쟁 시 당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신라가 요양을 고집하지 않고 방어가 쉬운 태자하 남쪽 산맥까지만 점유하고 있다가, 나중에 대진이 태자하 북쪽을 영역화하자, 신라는 대진을 태자하선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혹시 당이 트집 잡을까 봐 당으로부터 태자하까지의 진출을 승인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태자하와 태자하 남쪽의 산지 사이는 아주 좁은 지역이며, 당나라의 실효 지배가 불가능한 지역이므로 당나라는 이를 당연히 승인하였을 것이다. 신당전쟁의 전장을 요동반도 요하 태자하 선으로 보고, 패강을 태자하로 보면 ‘패강 이남의 땅’ 기사도 이처럼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
5.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유사사학은 객관적 사료를 부정하고 조선총독부의 교시에 따라 억지쓰기를 반복한다. 그들 주장에는 개연성이 전혀 없다. 그들 주장은 내적으로 부합하지 않고 모순된다. 그들은 더 이상 명확하기 어려운 요동반도 백제를 부정하고, 완전히 제압되어 당군과 웅진도독부가 철수한 한반도 백제 구토에 뜬금없이 백제와 웅진도독부를 부활 시키며, 임진강에서 피터지게 싸웠는데, 신라가 대동강까지 땅을 차지하는 마법을 발휘하게 한다. 그 틈에서도 신라는 압록강을 넘어가서 대승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역사를 연구한다기 보다는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유지하기 위해 연구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유사사학이라기 보다는 조선총독부의 망령이다. 유사사학이 사학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우리 역사를 창작하는 현실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사기』
『사기정의』
『한서』
『삼국지』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통전』
『당회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이문영, 『유사역사학 비판』, 역사비평사, 2018.
조성훈, 『한상고사』, 북랩, 2023,
The Baekje of the Liaodong Peninsula and
the Fallacy of the Taedong River-Wonsan Bay Line
Cho, Seonghun
According to reliable historical records such as the Gwaljiji and Samguksagi, it is almost impossible to deny that the Liaodong Peninsula was Baekje's territory. However, pseudo-history, in an attempt to follow the teachings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gnores objective evidence and denies that the Liaodong Peninsula was Baekje territory. To support this denial, pseudo-history falsely asserts that there was a rebellion in Baekje, located in the already completely pacified Korean Peninsula, and that the rebel forces successfully regained a considerable territory. It also claims that the land occupied by Silla was south of the Taedong River-Wonsan Bay line. These false claims are not supported by any evidence. In particular, the Taedong River-Wonsan Bay line is inconsistent with their assertion that the battlefield of the Silla-Tang War was in the Imjin River area. Pseudo-history is a group that aims to maintain the teachings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rather than to study history.
key words: the Baekje of the Liaodong Peninsula, the Taedong River-Wonsan Bay Line
괄지지와 삼국사기 등 신뢰성 있는 역사서에 의하면 요동반도가 백제의 영토였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사사학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추종하기 위해 객관적 사료를 무시하고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음을 부정한다.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음을 부정하기 위해 유사사학은 완전히 평정된 한반도 백제에서 반란이 있었고 반란군이 상당한 영토를 다시 되찾았다는 허위사실과 신라가 점령한 땅이 대동강 원산만 선이라는 허위사실을 주장한다. 이러한 허위사실들은 사료에 근거가 전혀 없다. 특히 대동강 원산만 선은 신당전쟁의 전장이 임진강 일대라는 그들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유사사학은 역사를 연구한다기 보다는 조선총독부 교시의 유지를 목표로 하는 집단이다.
요동반도 백제, 대동강 원산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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