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민 사기극으로 전락한 「전라도 천년사」 온라인 시민설명회(3), 이동희.
이 글에 보이는 사진들은 모두 강단유사사학 설명회자료임



[이동희의 주장: 강단유사고고학에 의존하여 소설 작성]
- 토기 귀거리 투구 환두대도 등의 양식이 가야식이므로 전라도 동부는 가야다.
- 대가야가 대왜 교역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엽 사이 섬진강 쪽으로 서진
- 6세기 전반에야 백제가 전남 동부지역 지배: 토기나 무덤구조가 백제식으로 바뀜. 백제산성 등장
- 이상의 주장은 고고학 자료로 증명됨
1. 지배계층이 토착문화를 변경시키는 것은 아님
ㅇ 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은 韓에서 왔고, 가야의 지배층은 신나라에서 왔는데, 이들이 온다고 모든 문화가 지배층의 문화로 바뀌는 것은 아님. 즉 토기 귀걱이 등 생활용품 등과 무덤의 구조는 지배세력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토착적 문화이며, 토기나 무덤양식이 같아도 지배자에 따라 백제가 지배한 곳은 백제가 되고, 가야가 지배한 곳은 가야가 된다고 봄이 타당. 강단의 주장에 의하면 코카콜라와 맥도날드가 중국에 있으므로 중국은 미국영토라는 말과 같음. 웃기지도 않는 소리가 우리 교수님들이 주장하는 소리
ㅇ 남원에서 가야의 토기(강단의 표현상)가 나오지만, 백제계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 등 백제의 위세품이 출토되었다면 백제 땅으로 보는 것이 타당. 백제의 위세품은 백제가 지방을 통제하는 방식이기 때문. 이러한 기본적 사실을 무시하고 위세품도 교역 대상이라 하면서 가야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기. 그들의 말에 의하면 백제 영토 모두 사라짐. 전라도 전역에서 백제의 위세품이 출토되므로 전라도는 처음부터 백제 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
ㅇ 강단이 가야의 것이라 하는 모든 유물이나 유적은 한반도 남부식이라 해야 타당. 가야 토기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식 토기라 해야 하고, 가야 무덤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토착 무덤 형식이라 보아야 함. 백제식 토기로 변경된다는 것도, 백제의 중앙에서 유행하던 토기가 지방에까지 유행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이를 영토가 가야에서 백제로 바뀌는 증거로 볼 수 없음.
ㅇ 그들은 토기의 유행 변화나 산성의 형식으로 시기를 5세기니 6세기니 특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이 무슨 기법으로 시기를 특정하고 있는지 궁금함.
2. 대가야가 왜와의 교역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섬진강으로 진격했다고?
ㅇ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움
ㅇ 이동희는 대가야가 가야의 맹주국이라 함. 대가야가 맹주국이라면 열도와 무역하려면 김해로 가야 하지 왜 섬진강으로 오는가. 김해가 반발하면 김해에서 가장 가까운 남해안으로 가야 하지 왜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으로 오는가? 그들 소설의 혁신성에 우리 모두는 감동할 수밖에 없음.
3. 가야의 서진은 공상 역사 소설도 되지 못함
ㅇ 가야는 백제와 싸울 수 없다. 신라와 싸우기도 벅찼다. 처음 신라와 가야는 비슷한 소국이었고, 백제는 대국이었다. 가야가 대국인 백제를 적으로 하면 뒤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존치시켜 신라를 견제하게 한 후 고구려에 대비할 수 있었으므로 가야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었다.
ㅇ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4세기 말부터 백제가 약해졌고, 신라는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에서 독립하기 위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기에도 역시 가야가 백제를 공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ㅇ 6세기 이후 백제는 韓을 상실하여 약해지고, 신라는 더 강해지면서 가야와 백제를 동시에 공격하게 되므로, 가야와 백제가 적대적으로 될 수는 없다.
ㅇ 처음부터 백제 영토였던 백제의 위세품이 출토되는 전라도를 마한으로 상정하고 백제의 남방진출과 가야의 서부진출을 말하는 강단의 주장은 그냥 시종일관 소설에 불과.


[이동희의 주장: 『한원』의 基汶河가 섬진강이고 섬진강 유역인 남원이 일본서기의 己汶이라 함]
1. 기문하가 섬진강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ㅇ 백제의 영토는 한, 한반도, 요동반도, 중국 동해안, 진평(광서성), 열도에 걸쳐 있고, 백제의 남쪽이면 진평현이나 열도일 가능성이 높음. 한반도의 남쪽만을 백제의 남쪽으로 보는 것은 백제의 영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생각
ㅇ 『한원』은 對句를 처음 학습하는 아이들을 위한 모범 例文集 으로 편찬된 책으로 전문 역사서가 아님. 『한원』 신라전은 "송서를 살피니 원가 연간에(424~453) 왜왕 진이 사지절ㆍ 도독ㆍ왜ㆍ백제ㆍ신라․임나ㆍ진[한]ㆍ모한육국제군사를 자칭하였다.”라고 하는데, 이는 장초금이 백제의 행정관료인 왜왕의 지배를 받는 열도 소국인 신라와 백제를 본국백제, 본국신라와 혼동하고 있음을 의미함. [백제의 행정관료인 왜왕 무의 상표문에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한다고 함. 이는 제군사의 백제와 가는 길의 백제는 다른 나라임을 의미하고, 제군사의 백제 등의 나라이름은 열도소국을 의미함. 한반도에는 임나 진한 가라 모한이 있을 수 없음.]
2. 基汶河가 섬진강이더라도 남원이 己汶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ㅇ 基汶과 己汶은 한자가 다름. 훈으로 읽는다면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 정상임.
ㅇ 基汶河가 있다고 하여 그 유역에 己汶이란 지명이 있어야 한다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황하에는 황이란 도시가 있어야 하고, 낙동강에는 낙동이란 소국이 있어야 하는가?
ㅇ 매림역사tv에 의하면 일본서기 원문은 원래 已汶(이문)이었으나,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일본서기 已汶을 己汶으로 바꾸어 경북 김천의 '감문'과 충청도의 '금물'과 연결고리를 만들려 하였다고 함.
3. 역사적 맥락
ㅇ 이동희는 지명비정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나 역사적 맥락이라고 함.
ㅇ 남원이 백제 위세품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백제였고, 가야가 서진할 수 없는 국제정세에서 남원을 대가야가 서쪽으로 진출한 기문이라 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전혀 가능성이 없는 주장.
ㅇ 이동희가 중요시하는 역사적 맥락이나 국제정세에서 보면 가야가 왜와 교역하기 위해선 섬진강이 아니라, 가야의 영역이었던 김해나 남해안으로 가야하는 것이 타당. 이동희는 대가야가 왜와 교역하기 위해 전라도 동부로 진출했다고 하는,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이 아니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음.

[이동희의 주장: 임나 4현은 가야의 영역이었다가 백제로 된 지역으로, 순천 여수 광양이며, 이는 고고학 자료에 의해 증명된다]
1.가야와 일본서기 임나가 같은가?
ㅇ 일본서기 지명의 한반도 비정은 가야=임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함. 이 전제는 일본서기 신라 7국을 임나 7국으로 날조하고,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는 일본서기의 문언을 무시하고[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가야가 망한 후에도 647년까지 외교와 전쟁을 하는 일본서기의 임나를 가야라고 간주하는 억지에 기반한 것임.
ㅇ 임나4현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닭과 개가 왔다갔다 하는 작은 마을이므로 이동희가 주장하는 순천 여수 광양이 임나4현이라는 주장은, 임나=가야라 하더라도 성립할 수 없는 더 큰 억지임
2. 강단의 동문서답은 그들의 사기성을 드러냄
ㅇ 일본서기에 의해서도 임나가 가야가 같지 않음을 계속 질문하고 있는데, 그들은 핵심적인 의문사항인 동시에, 그들 주장의 가장 기본적 전제인 이 사항에 대해 답변하지 않고 묵언수행함.
ㅇ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것은 조선총독부 소설을 기필코 지키려는 의지의 반영이며, 그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폭력임을 나타내고 있음.
ㅇ 고고학 자료나 음상사는 그들의 사기 수단에 불과. 가야의 유물이 아닌 한반도 남부의 유물을, 물건이 말을 할 수 없음을 이용하여 가야라고 우기기만 함. 음상사가 입증 수단이 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을 충족하지 않음에도 무조건 우기기만 함.

1. 광개토대왕릉비문
ㅇ 이동희는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지 않았을 것이므로 비문의 임나가라는 한반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함. 일본서기에 의하면 임나와 가야는 같지 않으므로, 비문에 임나가 나온다는 것은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 열도를 정복했음을 의미함.
ㅇ 400년조 비문은 대부분 지워짐. 광개토대왕릉비의 결자는 대부분 400년의 것임. 일제가 고구려의 열도정벌을 숨기기 위해 400년 기사 199자 중 절반을 지움. 2면 9행 윗부분 9자가 연속하여 지워졌고, 2면 10행과 3면 1행은 거의 완전히 지워짐.
ㅇ 광개토대왕의 열도정벌이 있어 열도가 백제와 고구려의 남북국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백제 행정관료인 왜왕 무의 북진이 가능하고, 열도의 파괴된 흔적이 있는 고구려계의 유물 유적이 가능함.
2. 진경대사탑비문
ㅇ 진경대사탑비문의 임나왕족은 임나가 열도에 있었음을 증명함.
ㅇ 강단유사사학은 대사의 선조가 임나(任那)의 왕족이었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신라에 귀의하였다고 비문에 쓰여 있으므로, 임나가 김해가야를 의미한다고 함. 임나=가야설처럼 탑비문의 임나를 김해가야로 해석하면 진경대사의 선조를 괴롭힌 나라는 신라가 됨. 김해가야를 매번 괴롭힐 수 있었던 나라는 신라이지 백제가 아니기 때문.
ㅇ 그런데 경명왕은 진경대사에게 제자의 예를 표할 정도로 존경하여서 직접 진경대사의 비문을 지었음[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진경대사탑비」 개관 (2022.4.25. 현재)]
ㅇ 임나가 김해가야라면 경명왕은 신라가 임나를 괴롭힌 것을 명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부처님의 섭리라거가 좋은 인연이라거나 하는 다른 좋은 표현으로 그의 선조가 신라에 귀부했다고 기술했을 것임. 경명왕은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선조를 신라가 괴롭힌 사실을 탑비에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
ㅇ 문자 자체도 隣兵의 隣과 投於我國의 我를 달리 쓰고 있어 隣은 신라가 아님이 명확함. 따라서 임나는 김해의 가야가 아님.
3. 삼국사기 강수열전
ㅇ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는 임나가 가야라는 근거가 되지 못함.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임나족) 사람이라는 것.
ㅇ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라고 주장. 그들이 하는 말은 전혀 임나가량이 가야라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지 못함.
- 충주에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만 이주시켰다고 볼 수 없으며, 설사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만 이주시켰더라도 그 선조의 고향이 모두 고령이나 김해라고 볼 수는 없음
- 그들의 말은 임나가 가야이므로 임나가량이 가야라고 말하는 동어반복에 불과.
- 만약 임나가량이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를 의미한다면, 강수는 임나를 언급해서도 안 됨. 가야가 망한 지 오래되었는데, 왕에게 가야를 들먹이는 것은 신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강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령이나 김해의 신라지명으로 말해야 함. 임나가 신라나 신라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수는 그 선조가 임나국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임.
ㅇ 『삼국사기』에는 강수 아버지의 이름이 석체(昔諦)로 나오는데, 강수의 성이 昔이라면 강수의 선조는 신라에서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의 석씨 집단의 일부가, 나중에 다시 신라로 되돌아온 경우로 볼 수도 있음. 당시에 한반도에서 열도로의 이동이 주가 되었지만, 진경대사와 강수의 사례로부터 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동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